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9)
이건 못 참지
연임식.
리젠 리브라타, 환생한 시릭 카라카스가 다시 천년제국을 다스린다고 제국의 만민에게 선언하는 행사다.
갑작스럽지만 꼭 필요한 절차, 사실상 내 즉위식이다.
오드벨을 비롯해서 정부의 직원들이 집에 못 들어가고 일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제국군의 전사자들 문제, 유해 수습, 유족 보상,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장 현지로 갈 수는 없으니, 황도에서 시간 단위로 보고 받으면서 세세하게 결제하고 지시를 내렸다.
그런 한편 황성을 정비하고, 황도 안의 민심을 온갖 방법으로 달래야지.
또 100년 동의 국정 공백, 각종 단체들의 소통 문제.
손대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었다.
수면 시간이 줄어들었다.
연임식 당일까지.
잠에 취한 멍한 머릿속.
“아빠!!”
아침이다.
애가 부르니 일어나야지.
생각은 드는데 너무 졸리다.
퍼어억!!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가슴에 납덩이가 떨어졌다.
“컥?!”
나는 눈을 번쩍 뜨고는 염동결계를 발휘했다.
내 가슴 위에서 방방 뛰던 물체는, 염동결계에 튕겨 오르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으, 으아아앗!?”
천장까지 튕겨 오른 녀석이 엄청 신나했지만 나는 기겁했다.
내 딸이잖아!
정신이 번쩍 뜬 나는 애가 떨어지는 각도를 재고는 몸을 날렸다.
“으아악!!”
다이빙 캐치 성공!
침대 밖으로 떨어지려는 애를 양손으로 붙잡은 나는 진땀을 흘렸다.
큰일 날 뻔했다!
“헉, 허어억.”
“아하하하!! 신나! 아빠! 또 해 줘!”
“……아, 아빠 놀란다.”
내가 받아든 어린 소녀, 머리에는 사슴뿔이 달려 있고 허리에는 꼬리가 달려 있다.
용족.
1황녀 라온이다.
나와 바라메의 딸.
장녀, 가장 먼저 태어난 애지만 용족은 성장 속도가 가장 느린 종족이다.
라온은 정말 다섯 살짜리 어린애였다.
살랑거리는 녹색 머리카락, 자수정 빛 눈동자가 천진난만하게 반짝거린다.
“아하하! 아빠 얼굴 이상해! 땀 냄새나!”
“……어, 언제 왔니?”
“응! 방금 전에! 아빠 보고 싶어서 뛰어왔어!!”
“그, 그래…….”
장녀를 다시 봐서 기쁘지만, 놀란 심장이 쿵쿵 뛴다.
생각해 보니 라온은 용족이다.
벽에 부딪쳐도 애가 다치는 게 아니라 벽이 부서진다.
“……아, 후우우.”
그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지.
애를 무사히 받아 냈다는 안도감에 맥이 탁 풀린다.
“아빠, 자? 힘들어?”
라온이 갸웃거렸다.
말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내 등 위에 올라타고는 내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아, 음. 그, 근데 아빠를 바로 알아보네?”
“안쪽이 아빠잖아.”
바라메가 내가 바로 시릭이라는 걸 알아본 것처럼, 라온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용공주의 혈통, 육체가 아니라 그 안의 영혼을 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라온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신나서 마구 잡아당겼다.
“아, 아야야. 아파. 아빠 아프다.”
“히히히.”
내가 엄살을 부리자 라온은 손을 놔주고는 밝게 웃었다.
아무튼 애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니 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으으으으.”
“아빠 아파?”
그러자 라온은 내 등에 엎드려서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일부러 다 죽어 가는 목소리를 흘렸다.
“라온이 무거워서 아빠 힘들다.”
“응!”
라온은 얼른 내 옆으로 내려와서는 같이 드러누웠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
얘는 100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안 변하고 구김살도 없구나.
죽은 아빠가 돌아왔는데도 출장 다녀온 것처럼 가볍게 맞아 준다.
용족, 허룡공주의 딸이라는 특수한 계보라서 가능한 일이리라.
내가 일부러 기운 없는 표정을 하자 라온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물었다.
“아빠 많이 아파?”
“졸려서 이래…….”
“나도 같이 잘래.”
라온은 냉큼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애가 하는 바가 너무 천진난만해서 보고 있으면 웃게 된다.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건만 가장 어리다.
몸에 힘을 빼고 엎드려 있던 라온은 살짝 고개를 들고, 곁눈질로 나를 바라본다.
“…….”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얼른 눈을 감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아빠가 놀아 줄까?”
“응!”
라온은 고개를 들고 반색했다.
기운 넘치는 애가 일요일 아침에 같이 놀자고 깨운 상황.
일단 시간을 벌자.
“막내랑 같이 왔지? 가서 아빠랑 같이 숨바꼭질 놀이하자고 해.”
“응! 다녀올게!”
라온은 벌떡 일어나서는 활기찬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단숨에 뛰어나가는 등.
나는 웃으면서 보다가 눈을 감았다.
“큰애랑 막내도 왔군…….”
이러면 애들 얼굴 다 보는 셈이다.
라온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자 이제야 새삼 실감 난다.
여기가 황성, 황제의 침실이고.
내가 여기로 돌아왔다는 걸.
“…….”
그래도 지금은 좀 자야지.
똑똑.
내가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졸려서 무시했다.
달칵.
“아버지, 일어나세요.”
“……조금만 더 자고.”
“오늘은 일찍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야근 그만하고 주무시라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일어나세요.”
차남, 오르카가 채근하는 목소리.
내가 적당히 팔을 휘두르면서 돌아눕는데…….
펄럭!
이불을 빼앗겼다.
“……이놈아, 아빠 잠 좀 자자.”
“나중에 낮잠 더 주무시고 일단 일어나세요. 의상부 애들이 아주 미칠 지경이니까.”
오르카는 말하고는 밖을 향해 외쳤다.
“다들 들어와요!”
드르르륵.
그러자 이동식 수납장이 바퀴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끌고 들어온 사람들.
내가 흐리멍덩하게 보자 오르카가 사람들과 의논했다.
“머리 장신구는 역시 금색이 낫죠?”
“그건 너무 자주 써먹었습니다. 그리고 부츠에다가 금실 박는 건?”
“오르카 님, 부츠는 12종류를 구해 봤는데요. 뭐로 할까요?”
“잠깐만요. 아버지, 발 좀 줘 보세요.”
잠에 취한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대충 정해.”
“아, 다리 좀 펴 보세요.”
오르카는 억지로 내 다리를 쭉 펴게 하더니 발에다가 부츠를 번갈아 대 보기를 반복했다.
“부츠는 4번으로 가고요. 코트 안감은 준비됐습니까? 전에 그건 가죽이 질겨서 못 쓰겠다니까요.”
“아니, 뭐 이렇게 질질 꾸며. 그냥 적당히 가면 될걸.”
내가 투덜거리자 오르카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환생하셨다는 건 이제 대중들에게도 알려졌지만, 그래도 황제로서 처음 나서는 자리는 무게가 다르거든요? 좀 제대로 꾸밉시다.”
“그냥 예전에 하던 대로…….”
“예전에 아버지는 덩치가 좋았지만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잖아요. 그리고 황실의 복장 코디네이터도 이제 은퇴한답니다. 그러면 새로운 기풍을 만들어야죠?”
“뭐?”
“아버지가 정년 만들었잖아요. 그 사람도 공직자니 물러나야죠.”
나는 멍한 머리로도 하나를 생각했다.
이게 바로 제 무덤을 팠단 거구나.
결국 나는 오르카가 하라는 대로 적당히 갈아입기를 반복했다.
겨우 일단락이 났다.
중앙응접실 의자에 앉은 나는 눈가를 비볐다.
“아, 졸려. 그냥 좀 적당히 할 것이지.”
“화장을 뭐 그리 싫어하세요.”
“야, 남자가 무슨 화장이야.”
“다들 필요하면 하거든요?”
오르카는 내친김에라는 투로 쏘아붙였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가 불쾌해하시니 손도 못 대는 거지. 오늘 아버지 코디는 제가 맡기로 했으니까 그냥 해 주세요.”
“…….”
보통 잔소리는 싫은 게 정상인데.
아들 잔소리는 하나도 싫지 않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라온 봤지?”
“큰 누나 봤어요. 지금 황성 안을 엄청 신나서 뛰어다니고 계세요. 막내가 따라다니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애들 준비는?”
“메이호 누나와 미리엘 누나, 리세라 누님도 다 준비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잠 좀 깨고요.”
“넌 정말로 안 나갈 거냐?”
연임식은 황도를 한 바퀴 도는 퍼레이드다.
그 자리에 나만 나가는 게 아니다.
메이호와 미리엘, 리세라는 그동안 황도의 민중들에게 위로, 봉사 활동을 많이 해서 얼굴이 알려진 편이었다.
연임식에 나와 함께 하는 게 홍보 효과가 좋다는 적절한 판단이었다.
오르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야 요원질이 더 편해요. 얼굴 알려져서 좋을 거 없고요.”
그런 것치고는 대외 활동이 많지만.
내가 하품을 하는데 오르카가 불쑥 말했다.
“아직도 졸리신가 본데 깨워드려요?”
“뭐 좋은 방법 있냐?”
“즉효약이 있는데요.”
오르카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거 다른 애들에게 말하면 안 됩니다. 다른 가족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음?”
“약속해 주세요, 아버지.”
“그래.”
그래도 오르카는 얼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 눈치를 계속 살피는 시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왜 그래? 그러고 보니 너 좋아하는 여자 있다며? 혹시 그 문제라서 그래? 아빠가 뭐 상담이라도 해 줘?”
“……제가 아니라요.”
“뭐? 그럼 누군데?”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오르카는 아주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리세라 누님에게 남자가 생기신 것 같아요.”
“…….”
부우웅.
내 정신력이 급상승, 흘러나온 염동력에 테이블과 의자, 식기를 비롯해서 내 주변의 모든 기물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르카가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것마저도 붕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뭐?”
“아버지, 진정하시고요.”
“아니, 너 지금 뭐랬어. 지금 뭐라고? 뭐? 남자? 세라에게 남자?”
완전히 깼다.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오른다.
오르카가 차근차근하게 말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진정 좀 하시고 들으세요.”
“아니! 이게 진정할 문제냐! 넌 동생이라는 놈이 누나가 그러는데 대체 뭐 하고 있었어!!”
“……아니, 제가 뭘 어떻게 해요.”
하긴 그렇다.
모가지를 비트는 건 내가 직접 해야지.
“그래, 그렇지. 내가 처리하마. 네가 하면 안 되지.”
“아니, 왜 처리라는 표현을 쓰세요? 아버지 대체 뭐 하시려고요?”
“아, 걱정하지 마. 뉘 집 자식이건 다리만 박살 내면 정신 차리고 얼씬도 안 하겠지. 법? 내가 황제니까 그래도 돼.”
내가 이러려고 황제 한다!
오르카가 재차 말했다.
“일단 진정 좀 하세요. 저도 어쩌다 알게 된 거고, 심증만 있는 상황이니까.”
“상대는 누구냐?”
“지금은 말씀 못 드려요. 심증만 있다니까요.”
“…….”
나는 일단 정신을 가다듬고는 테이블과 기물들을 지상으로 내려놓았다.
오르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저도 우연히 알게 된 상황이니까. 아마 어머니도 모르시고요.”
“…….”
다크엘프의 정보망에 우연찮게 걸려들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오르카가 나직하게 말했다.
“좀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누님이 부탁하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뭔데?”
“……안 되겠다. 말씀 못 드려요.”
오르카는 진저리를 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아들에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면서 회유했다.
“아, 괜찮아. 그냥 다 말해. 아빠 못 믿어? 아빠 그놈 안 죽인다? 그러니까 그냥 아빠 믿고 다 말해!”
“……살려만 둔다고요?”
“하하하하, 아냐. 하하하하. 어떤 집 자식새끼인지 확인하고 조지기만 할 거다. 하하하.”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뻗치다니.
오르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일단 알아만 두세요.”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 말해라.”
“안 돼요. 혹시나 만에 하나 어머니가 아시면 진짜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아버지가 미리 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
이셀렌은 진짜로 암살해 버릴 수도 있다.
암살여왕이니까.
오르카는 내게 달래는 투로 말했다.
“저한테 들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마시고요. 누님에게 직접 물어보셔도 안 됩니다. 일단 그냥 가슴 속에 품고만 계세요.”
“그래, 리세라 모르게 처리해야지.”
“…….”
오르카는 괜히 말했다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정색하고는 일렀다.
“오르카, 이건 중차대한 문제다. 우리 둘만이 아니라 세탄까지 불러서 서로 머리를 모으고 합심해서 해결해야 한다. 알아들었느냐? 너도 최대한 돈과 시간, 자원을 아끼지 말고 수사에 착수해라. 조질 수 있는 상황이면 조져라, 내가 허락한다.”
“……왜 이런 화두에 근엄하게 말씀하시는데요? 진짜 무섭거든요?”
“이 녀석아, 당연히 해야지! 어떻게 놔둬!”
“뭐가요?”
목소리.
우리 두 사람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지금 논의 중인 화제의 주인공, 리세라가 다가오면서 말한 거니까.
리세라는 하프엘프, 청력이 좋다.
“아버지 모시러 왔어요. 준비 다 되셨어요?”
“으음.”
내가 리세라의 눈치를 살피니 다행히도 앞부분은 못 들은 모양이다.
나는 안도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엄청 예쁘구나, 세라야.”
“아버지도 오늘 멋지세요.”
리세라는 생긋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르카도 일어나면서 우리 두 사람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행사에 차질 없게, 저는 진행 준비하겠습니다.”
“오르카, 부탁할게.”
“염려 놓으세요, 누님.”
오르카는 나에게는 당부의 눈빛을 보냈다.
혹시나 모르니 입조심하라고.
안다, 이놈아.
리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와 팔짱을 꼈다.
“자, 그럼 얼른 나가요, 폐하. 다들 기다리고 있어서요.”
“세라야.”
“예?”
“…….”
나는 잠깐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할 말은 하나다.
“고맙다.”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저야말로 키워 주셔서 감사한걸요.”
“……그래.”
이런 말은 몇 번을 해도 부족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황제가 돌아왔다고 알리러 가자.”
만백성에게 평화의 시대가 왔다고.
다시 내가 다스리는 시간이 왔다고 알려 줘야지.
……다 끝나고 조지자.
주제도 모르고 딸 곁에서 얼쩡거리는 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