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8)
변함없는 것
정년퇴임 제도.
50년을 공직에 종사하면 물러나란 이야기.
인간이라면 당연하겠지만 수백, 천년을 넘게 사는 이종족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폐, 폐하!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천부당…….”
“천부당만부당은 무슨. 내가 누구냐?”
반사적으로 반발하던 제국 정부의 관리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지, 지엄하신 화, 황제 폐하이십니다.”
“시릭 폐하이십니다!!”
“그래, 그런데 내 결정에 토를 다네? 내가 다 깊이 생각하고 이러는 거거든?”
일단 신하들의 말문을 막은 나는 차근차근하게 설명했다.
“카라카스에서 우리 제국 이전에 제대로 된 국가가 세워진 적이 없었다. 칠죄신의 때는 도시나 지방 단위의 통치였고, 통일된 국가 체제라는 걸 가져 본 건 내 치세가 처음이었지. 그래서 하고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너희들이 너무 오래 해 먹는다.”
“그거야…….”
“폐, 폐하. 저는 아직 327살입니다! 아직 500년은 거뜬히 더 일할 수 있습니다!”
말석에 있던 다크엘프가 부르짖었다.
나는 턱을 긁으면서 말했다.
“니들이 능력이 없다거나 뭘 잘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은퇴 제도 자체는 각 종족에 알음알음 있을 텐데? 엘프들도 원로가 있고, 수인들도 어르신이 따로 있지 않나?”
“우, 우리들은 아직 한창이옵니다.”
“너희들 개인은 한창이지만 제국 전체로 보면 너무 오래됐다고. 야, 저기 오드벨 봐라. 저놈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재상질 해 먹고 있어. 이런 나라에 어떤 획기적인 발전이 있겠냐?”
내가 오드벨을 가리키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물론 오드벨은 내 뱀 새끼답게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다는 얼굴이다.
“오드벨이 능력이 없어서, 불충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충성심이 남다르고 유능하지. 하지만 오드벨 아래에, 행정부에도 각종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들이 즐비할 거다. 그런 이들을 백 년, 이백 년을 썩히기는 아깝지. 그러니까 적당한 때 물러나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달라, 이거다.”
“그, 그래도…….”
“폐하, 50년은 너무 짧습니다.”
“이제 막 돌아오신 폐하를 다시 성심으로 모시고자 하는데 갑자기 관두라니요! 저는 죽으면 죽었지 차라리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문체부 장관, 드셀이 갑자기 옷깃 단추를 풀더니 목을 내밀었다.
차라리 자기 목을 베어 달라는 제스처다.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누가 오늘 당장 은퇴하래? 너희들에게 앞으로 2년 준다. 너희 후임들 쌔끈한 놈으로 구해 와라. 어떤 놈이 가장 내 마음에 쏙 드는 후임을 뽑아오는지 시합이다.”
“예?”
“가장 마음에 드는 후임 데려온 놈에게 내가 은퇴 선물 준다.”
다들 순간 낯빛이 달라졌다.
이제 슬슬 내가 시릭 카라카스가 맞다는 걸 확인했고.
또 내가 따로 총애하겠다는 소리를 들으니 귀가 솔깃한 거다.
……자화자찬이지만 이놈들은 나를 너무 좋아해.
정확히는 나보고 계속 황제 하면서 수천 년 동안 자기들 교통정리 해 달라는 요구지만.
나는 무릎을 치면서 일렀다.
“사실 나도 그냥 나 편한 대로, 내가 늘 보던 놈들 편하게 굴려 먹고 싶지. 내가 헛기침만 해도 알아듣고 움직이는 수족들이 많으면 정치하기 편하지.”
“폐하, 저희들도 같은 마음…….”
“하지만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비명횡사를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그리고 이 자리의 누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변을 당하거나 사라질지 모른다. 정치의 공백은 이미 충분히 겪은 일, 그런 경우를 방지하고자 인재들을 계속 발탁하고 키워 나가야 한다.”
“…….”
“물론 최대 50년이라는 거지, 일 못 하면 그전에도 얼마든지 자른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법무부 장관, 케렘이 느닷없이 말했다.
“폐하, 아무리 2년이라는 기한을 주신다고 해도, 정부의 핵심이던 이들이 썰물처럼 물러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자문 기구…….”
“아, 은퇴한 다음에도 정계에 계속 압력 넣고 참견하고 싶다고?”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야, 니들이 정치를 잘하냐, 내가 더 잘하냐?”
원색적인 질문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내가 더 잘한다.
그리고…… 나보다 잘하는 놈이 있어도 여기서 나설 수는 없지?
나는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니들이 하루아침에 은퇴해서 집에 가면 나는 안 쓸쓸하겠냐? 나는 안 힘들겠어? 내가 더 힘들다? 내가 나 힘든 일을 억지로 하겠다는데 왜들 잔말이 많아?”
“폐하, 그래도 2년은 너무 짧습니다. 한 5년 주시면…….”
“5년이면 산도 절반이나 변한다, 이놈들아. 2년도 사실 너무 오래 준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 잘하는 놈이 팍팍 출세해서 팍팍 치고 올라오고 거침없이 물갈이돼야 한다. 너희들은 자꾸 너희들의 자리 보전만 생각하는데, 니들 아래 애들 생각해 봐라. 니들이 500년 장관 하면 니들 아랫놈들은 500년 내내 차관만 해야 한다. 걔네들도 장관 하고 싶을 거거든?”
“…….”
“정말로 나라를 생각한다면 계속 새로운 인재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해. 그래야 나라가 더 부강해지지.”
나는 거듭 말하고는 이번에는 달랬다.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지만 신입 키우는 건 굉장히 귀찮고 손이 가겠지. 나도 짜증 나서 집에 돌아간 너희들 불러서 외주 줄지도 모르지. 야, 전직 문체부 장관, 네 후임이 어리바리해서 그런데 네가 예산안 좀 더 다듬어 봐라. 이렇게.”
문체부 장관 드셀이 갑자기 벌쭉 웃었다.
……그냥 예시인데 낚이지 마라.
나는 손사래를 치고는 말했다.
“혹시나 하지만 그딴 거 노리고 이상한 거 후임으로 앉히고 가면 니들 대가리 날려 버린다. 너희들 이상으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선별해라. 니들 마지막 임무니까 유종의 미를 거둬라.”
“…….”
“알아들었냐?”
내가 재차 확인하자 신하들이 멈칫하더니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알겠습니다!”
“예!”
“폐하 만세!!”
중구난방인 거 봐라.
백 년 만에 회의하니 이 모양이지.
“아, 그리고 케렘.”
“……예, 폐하.”
연이어 불린 법무부 장관이 내 눈치를 살폈다.
이제 본인도 나에게 단단히 찍혔다는 걸 알고 전전긍긍하는 거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엔라 재판해야지.”
“……예?”
“법무부잖아. 4황후 철혈성군을 재판해야지. 법리 해석 잘해 봐.”
케렘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놈도 파벌을 굴린 만큼, 자기가 메이호에게 한 말이 나한테 다 들어갔단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나오니, 내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폐하, 저에게 4황후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판결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네가 법무부잖아. 황후들도 법 아래에 있지 않나?”
제국은 일단 법치국가다.
황제인 나야 예외, 모든 것은 통치행위라서 법을 초월한 위치고.
하지만 황후들은 법에 구속당한다.
케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4황후는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무슨 소리요!”
“아니, 저자가 미쳤나!”
“철혈성군은 폐하의 아내이십니다! 어찌 신하된 자로서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이요!”
“폐하! 당장 저자를 파직하소서!!”
정부의 고관들, 케렘의 파벌이던 이들까지 정색했다.
케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 파벌까지 이럴 줄 몰랐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놈은 신하고, 황제는 나다.
내가 제국의 중심이다.
“케렘, 네 생각이 그러면 그렇게 재판 추진해라.”
“……정말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법무부 장관은 넌데?”
“…….”
케렘이 주저했다.
반대로 다른 신하들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폐하! 아닙니다!! 4황후의 죄가 크다고는 하나 폐하의 깃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칠죄신과 맞서지 않았습니까!”
“목숨을 빼앗을 정도는 결코 아닙니다!”
“황자님의 어머님이십니다!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주소서!”
나는 무시하고는 케렘만 바라보았다.
케렘은 저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판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할 말 다 했다. 이제 다들 일하러 가라.”
정적.
다들 멍한 얼굴이었다.
설마 진짜로 엔라를 처형하려는지, 내가 뭔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여기 앉아서 생각 좀 하고 가련다. 다들 돌아가.”
“폐, 폐하…….”
“내가 아까 말한 정년퇴임, 누가 제대로 된 놈을 데려오는지 누가 재빠르게 행동하는지 내가 눈여겨본다.”
다들 흠칫하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온갖 잡념들이 많겠지.
나는 턱을 괴고는 놈들이 하는 바를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언제 해도 이 모양이야.
“…….”
신하들의 반열에 서 있던 메이호도 물러났다.
다들 빠져나간다.
고요해지는 어전회의장.
마지막에 남은 건 재상 오드벨이었다.
“……폐하, 4황후를 처벌하실 생각이십니까?”
“케렘이 알아서 하겠지.”
“폐하, 저는 폐하의 뜻을 따라서 재상의 자리를 내려놓고 물러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폐하에게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칠 생각입니다. 부디 뜻하신 바가 있으면 제게 귀띔을 해 주십쇼. 뭐든지 하겠습니다.”
오드벨이 간곡하게 말했다.
나는 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케렘은 일단 능력이 있는 놈이지.”
“예?”
“메이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머리를 쪼개 버리고 싶지만. 일단 파벌 우두머리 꿰찰 정도니 가락은 있어. 제 딴에는 제국에게 충성한다는 생각도 있을 테고. 오로지 자기가 권력을 쥐어야만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타입. 정치하는 놈들 중에서는 흔하지.”
“예, 근본이 악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놈의 그 신념은 깨졌다. 나한테 밉보였고, 그게 아니라도 이제 은퇴해야 한다. 더욱이 방금 파벌들까지 등을 돌렸으니 배신감도 들 테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해 온 자기 방식에 대한 절망이 크겠지.”
“…….”
“그런데 네가 놈을 믿고 4황후의 재판을 맡겼다.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스테이지가 되는 거지.”
나는 황좌를 손가락 끝으로 툭, 툭 두드렸다.
“놈은 신념대로 엔라의 극형을 주장할까? 아니면 내게 아첨하겠다고 살리려고 할까? 아니면 다른 신하들의 등쌀에 못 이긴 척 형벌을 낮출까? 박살 나 버린 케렘의 속에서 온갖 고민이 소용돌이칠 거다. 정말 능력 있는 놈이라면 달라지겠지.”
“……케렘의 성장을 기대하신다는 겁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강제로 은퇴시키지 않습니까?”
나는 픽 웃었다.
“이놈아, 인재는 백년대계라고 했다. 굴려 놓고 한 200년 뒤면 괜찮은 데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폐하는 참으로 관대하시군요.”
“아닌데? 저놈 용서할 생각이 진짜 없는데?”
나는 정색하고는 말했다.
“감히 내 애를 몰아세워? 콱 다리를 찢어 버릴라.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거든?”
“…….”
“말려 죽여야지. 내가 아주 긴 관심을 두고 지속적으로 갈굴 거야. 나중에 반성문 5000장 정도 쓰게 만들어야지.”
내가 엔라의 처우를 맡긴 순간, 케렘은 아주 막막하고 난감할 것이다.
내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자기 판단대로 가도 될지 모르겠고. 뒤늦게 내가 개입해서 판결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고.
계속 고민하고 갈등하느라 잠도 못 자겠지.
괴로워해라, 이놈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오드벨, 갑자기 은퇴하라니 어떠냐?”
“폐하의 결정이시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아쉽군요.”
오드벨은 아쉬워했다.
“다시 돌아오신 폐하를 받들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그 기쁨이 얼마 가지 않는다니.”
“이제 여동생 좀 봐라.”
“…….”
“좀 해. 내가 니 집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하냐?”
오드벨은 자기 여동생인 나비린과 사적으로 말을 섞은 지가 백 년이 넘었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군자다만.
지켜보는 나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아니, 나랑 결혼하기 전에는 나비린하고 나름 사이좋았잖아. 근데 말도 안 하고, 조카인 리세라 안아 주지도 않고. 이번에만 해도 네가 나서서 리세라 도와줄 수 있었잖아.”
“폐하.”
“알아, 네가 외척이라서 오해 살 수 있으니까 삼가는 거 알아. 옆에서 지켜보는 내 가슴이 쓰리다, 이놈아. 내가 너 데려오는 바람에 너희 가족이 반쪽이 됐잖아.”
나는 무릎을 치고는 말했다.
“내 아내와 내 딸에게 가족을 돌려주고 싶다. 이제 돌아가라.”
“폐하, 소신이 어찌 폐하만 이 자리에 남겨 두고…….”
“가라, 이놈아.”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오드벨을 바라보았다.
이놈의 뱀 새끼.
유능하지만 이젠 놓아 줄 때가 됐다.
“그동안 나를 따라서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고생 많았다, 오드벨. 이제 우리, 처남 매부로 만나서 같이 술이나 마시자. 정치 이야기 따위 하지 말고.”
몸을 가늘게 떨던 오드벨은 고개를 돌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 봤지만 나는 웃기만 했다.
아는 척해 봐야 민망하니 그냥 웃을 수밖에.
“폐하는 혼자 남으셔도 괜찮으십니까?”
“애들 엄마 친정 보냈고 혼자라서 좋아 죽겠는데? 니가 그토록 외치던 대로 천년황제 해 보련다.”
내 우스갯소리에도 오드벨은 진지했다.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가도 난 애들만 있으면 충분하다.”
“폐하.”
“됐다. 너도 얼른 가서 후임이나 물색해라. 아, 그리고 내 연임식 준비해라.”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정부 애들에게도 공표했고 제국민들에게도 한 번 말해야지. 네가 알아서 적당히 세팅해 봐.”
“예!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행사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예산 안에서 해라.”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가 봐.”
“예, 폐하.”
오드벨은 내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오랫동안.
이게 마지막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걸 각오했단 의미로.
오드벨은 허리를 펴고는 말했다.
“그럼 폐하, 물러나겠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일은 끝내야지. 얼른 가서 야근이나 해라.”
“예.”
오드벨이 돌아섰다.
멀어지는 발소리.
이제 안 들린다.
“…….”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한 어전회의장.
이제 나 혼자다.
“돌고 돌아서 다시 여기네.”
혼자 여기 앉아 있다가 죽었지.
오만가지 감상이 떠오른다.
“…….”
갑자기 지구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의 나는 시릭 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다.
공간도 수월하게 다룰 정도로.
이번에는 지구를 봐도 실수하지 않을 것 같은데?
잠깐 생각하는데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보통 신하는 내가 부르지도 않으면 멋대로 들어올 수 없지만.
“아빠, 일 다 끝났죠?”
“…….”
자식은 예외지.
허리에 손을 얹은 메이호가 되바라지게 물었다.
“일 다 끝났잖아요? 뭐 남은 일 있어요?”
“……아, 아니. 음.”
방금 내 속을 들킨 기분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메이호가 다가와서는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예법에 따르면 설사 황자와 황녀라고 해도 이렇게 멋대로 계단을 올라와서는 안 되지만.
“일 다 끝났으면 세라 보러 가요. 아빠 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으음, 그래.”
“아, 그리고 언니랑 막내도 이제 황도로 들어온대요. 아버지도 잘 차려입고 만나야죠.”
“그래…….”
혼자 막막하게 앉아 있던 그때와는 다르다.
이젠 내게는 애들이 있다.
“하하하.”
애가 잡아끄는 대로 걸어가던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메이호가 돌아보고는 곱게 눈을 흘겼다.
“왜 그러세요? 제가 뭐 이상한 소리 했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서.”
세상이 변해도.
행복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딸이 내 손을 끌어당기면서 걷던 시절이나.
다 큰 딸이 얼른 가자고 나를 끌어당길 때나.
여전히 행복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