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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97화 (197/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7)

나만 100년 더 한다

황성.

어전회의장.

옛날, 시릭 카라카스가 다스리던 시절에 문무백관들이 모여서 황제의 명을 받들었던 곳.

오늘 이 자리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웅성거리는 소리들.

“케렘 장관님, 뭐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메이호 전하께서 결심하신 겁니까?”

제국 정부의 여론을 주도하는 케렘에게 신하들이 다가와서는 이것저것 캐물었다.

아직 회의 시작 전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는, 황제가 나타나기 전에 이런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장려했으니까.

이러니까 회의장이라면서.

케렘은 신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말입니다. 메이호 전하도 뚜렷한 답은 안 주셨지만 어쩔 수 없으실 겁니다. 황실에 인재가 없어요. 이제 와서 다시 원탁회의를 할 수도 없고요.”

“그렇죠, 원탁회의는 이제 안 됩니다. 애당초 인간에게 황제를 다시 맡기다니 무리였습니다.”

“그저 초대 황제 폐하께서 너무 뛰어나셨던 겁니다. 다른 인간들은 안 됩니다.”

정부에서 높은 관리들이 모인 자리.

일곱 이종족, 숫자가 적은 용족까지도 드문드문 보이는데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제국 정부에서 급이 높은 인간들은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종족을 폄하하는 발언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파벌의 수장, 케렘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아무튼 장녀께서 오르는 일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암요, 아무리 용족이 강력하다고 해도 너무 어린 분 아닙니까? 한데 가장 먼저 태어났다고 용족들이 우기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케렘이 맞장구를 치면서 저편을 바라보았다.

국토부 장관, 용족 괴발.

용족 중에서 뛰어난 전사이자 정치적 센스도 있는 거물이다.

괴발은 장자상속제를 주장하면서 초대 황제의 장녀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황후 허룡공주의 딸, 1황녀를.

‘하지만 너무 어려. 그 어린 용족을 황제에 올리고 정국을 좌우할 심산이겠지…….’

허룡공주 바라메는 본래 정치에 뜻이 없는 이.

그러면 자연스럽게 용족들이, 어린 황제를 보필한다면서 권세를 얻으려고 할 것이다.

애당초 용족들은 칠죄신에게 맞서면서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 대가를 원하는 여론이 용족들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용납할 수는 없다.’

케렘은 결의를 다졌다.

사실 2황녀 메이호에게도 일부러 이 소식은 가급적 차단했다.

메이호는 1황자 세탄도 옹호하니, 1황녀와 맞서야 한다면 더더욱 황위를 고사할 거다.

안 된다.

메이호가 떡하니 황위에 올라서 제국을 안정시켜야 한다.

‘충심, 또 충심으로 보필하리라.’

케렘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칠죄신도 사라진 마당.

혼란스러운 제국을 반드시 다시 세우리라.

보다 엄격한 법과 질서로!

“2황녀 전하께서 곧 드시옵니다!”

시종이 외치는 소리.

제국 정부의 요직들을 맡은 이들이 자리에 섰다.

어전회의장에 이렇게 도열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지만 곧 자기 자리들을 찾았다.

고요한 정적.

다들 긴장한 얼굴이었다.

오늘 새로운 황제가 탄생한다.

“…….”

다들 케렘을 흘끔거리고, 이어서 괴발을 살펴보았다.

케렘이 미는 2황녀 메이호가 우세하지만, 괴발이 1황녀를 미는 것도 일리가 있다.

양측 다 논리로는 크게 어긋나는 게 없는바.

케렘은 속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 괴발, 결국 용족들은 소수, 너희들의 고집만 앞세우는 이상 다른 이종족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 가장 무난한 건 메이호 전하께서 오르시는 거다.’

1황자 세탄은 반역자의 아들, 안 된다.

2황자 오르카는 암살여왕의 아들, 계승 서열이 너무 뒤다.

3황녀 미리엘은 너무 어리고.

4황녀 리세라는 계승 서열도 낮고, 후사의 문제가 있다.

5황녀는 계승 서열 최하위.

결국 1황녀와 2황녀의 싸움이다.

케렘은 고르고 고른 논리를 피력하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정국을 반드시 휘어잡아서 제국을 바로 세우리라.

탁.

발소리.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메이호가 상좌에 나타났다.

밝은 금발, 쫑긋한 호랑이 귀.

선글라스를 쓰고 배를 드러낸 민소매 티셔츠, 거기다가 한쪽 허벅지만 훤히 드러난 기이한 바지.

어울리지만 제국의 황녀, 아니 오늘 황제가 될 사람이 선보이기에는 너무 파격적인 차림새였다.

“으으음.”

“……과, 과연 시릭 폐하의 따님이시다.”

메이호의 차림새에 웅성거렸지만 다들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원래 초대 황제 시릭도 막 입고 다녔다.

메이호 정도면 대단히 양호하지.

“…….”

황좌 앞에 선 메이호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신하들을 쓱 둘러보았다.

케렘이 목을 울리면서 외쳤다.

“황녀 전하! 부름을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 정부의 신하들이 다들 모였습니다!! 이제…….”

“내가 안 불렀는데요?”

“……예?”

말이 잘린 케렘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반박을 준비하던 용족 괴발 역시도 눈이 동그래져서는 메이호를 바라보았다.

메이호는 손사래를 쳤다.

“난 그냥 오프닝 게임으로 나온 거예요. 오늘의 주역은 내가 아닌데요.”

“예?”

“그, 그게 무슨…….”

대체 황녀가 무슨 생각이지?

이렇게 다 모였다는 건 정국을 정리하겠단 이야기, 황위에 오르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란 말인가?

다들 웅성거리는 와중에 케렘이 복잡하게 셈했다.

“저, 전하! 너무 갑작스러운 일입니다만. 저의를 알고 싶습니다! 설마하니…….”

“와, 진짜 똑같이 말하네요?”

선글라스를 슬쩍 내린 메이호가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의아하게 보자 메이호는 선글라스를 벗어서 옷깃에 걸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시원시원해서 시선들이 모인다.

케렘은 그 와중에 감탄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좌중을 압도하는 언행, 역시 이분이 황제가 되셔야 한다. 그것만이 정답이다! 그리고 내가 이분을 잘 이끌어서 천년제국을…….’

메이호의 말이 케렘의 상념을 자르고 들어왔다.

“내가 나와서 이러면 여러분들은 다른 황자, 황녀들을 황제로 내세울 거라고 착각하고 전전긍긍할 거라고 했어요. 나는 설마 그러겠냐고 했는데 진짜네. 내기는 내가 졌네요.”

“…….”

다들 침묵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람?

메이호는 손사래를 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황좌에 앉을 마음은 없다고.

신하들의 반열에 선 메이호가 낭랑하게 말했다.

“저기 앉을 분은 이미 오셨거든요.”

“예?”

“누구를…….”

다들 주목하는 가운데 메이호가 쾌활하게 웃었다.

“우리 아빠요.”

“……예?!”

“예?!”

“무, 무슨…….”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 드십니다!!”

시종의 말.

다들 깜짝 놀라서는 굳어 버렸다.

칠죄신과의 싸움에서 여력을 다해서 사라졌다는 황제 후보.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라는 그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었단 말인가?

좌중이 깜짝 놀란 가운데…… 황좌의 앞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성별이 얼른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운 얼굴선을 지닌 인간.

황좌의 앞에 선 인간 남자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들 아는 얼굴이구만.”

리젠 리브라타가 시릭 카라카스로서 말했다.

* * *

신하 놈들의 정적 속.

나는 한숨을 쉬면서 둘러보았다.

“아니, 이놈들이 마지막에 봤을 때랑 얼굴들이 하나같이 똑같아? 뭐야? 물갈이가 거의 안 됐네? 특히 장관급들은 다 똑같아?”

“……으으음.”

신음과 침묵.

그중에서 고양이 수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사, 살아 계셨습니까.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시여.”

“지랄하네.”

“예?”

“야, 내가 시릭인 거 아직도 모르냐? 칠죄신하고 싸웠잖아?”

나는 턱을 괴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칠죄신하고 싸우는 거 제국 전역에 생중계했고, 그놈이 나보고 시릭~ 시릭 카라카스~ 랩을 하더라. 그런데 설마 아직도 내가 시릭이 아니라고 할 생각이냐?”

“…….”

다들 침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바로 시릭의 환생이라는 점은 칠죄신이 보증해 준 셈이다.

나는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뭐 이제 내가 시릭 카라카스인 거 증명해 줘야 해? 설마 너희들 앞에서 쇼할까?”

“폐하께서 돌아오셨다는 걸 소신의 목을 걸고 증명하겠습니다!”

엘프 재상, 오드벨이 힘주어 말했다.

다들 두리번거리다가 얼떨결에, 혹은 힘주어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턱을 긁으면서 말했다.

“지금 나 하는 꼴 보면 내가 시릭인 거 알 텐데? 니들에게 이렇게 구는 사람 나 말고 또 있었냐? 황후들이 괜히 나를 하나같이 지지했겠냐?”

“……으음.”

“폐하께서 돌아오시다니! 정말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시릭 카라카스 폐하 만세!!!”

“화, 황제 폐하 만세!”

멍하니 있던 신하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른다.

나는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황좌에 앉았다.

“아, 칠성놈이 여기저기 구멍 뚫어 놨네. 이 의자는 여전히 불편한데 더 불편해졌어.”

“…….”

케렘이 눈알을 굴린다.

나는 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법무부 장관 케렘, 네가 다음 황제 하라면서 메이호 울렸다며?”

“……저는 제국을 위해서 마땅한 건의를 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무사하신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을 괴었다.

내가 일부러 길게 침묵하자 다들 눈치를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바로 시릭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황제 한다, 연임이다.”

“……예?”

“난 2대 황제가 아니야.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환생해서 돌아오고, 황제 연임한다고. 아직 초대 황제의 치세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똑같이 황제를 하더라도 2대 황제냐, 연임이냐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연임이라고 확정하면, 시릭 카라카스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와 의무가 고스란히 내게 다시 승계된다.

내가 시릭 시절에 지녔던 물건, 아이템.

……그리고 혼인 관계까지.

황제를 연임하는 순간, 황후들과 사별 사실 자체가 무효화되는 거다.

거기다가 내 자식들도 당연히 법적으로 부모 자식 관계를 인정받고.

나는 턱을 긁으면서 케렘에게 말했다.

“야, 법무부. 시릭 카라카스에 한해서 이 연임을 인정한다고 제국법에 써넣어라.”

“너무 갑작스러운…….”

“내가 시릭이 아니라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긴가민가하던 신하들이 케렘을 적대적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하는 걸 보니 완전히 시릭이고, 또 메이호와 오드벨이 나를 보증했다.

황후들이 고스란히 나를 지지했고.

마지막으로 칠죄신이 몇 번이고 보증했다.

이젠 내가 시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터무니가 없다.

케렘이 나직하게 말했다.

“……하, 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네 마지막 일이 될 거다.”

“예?!”

나는 턱을 긁으면서 말했다.

“아, 변명하지 마. 네가 메이호를 몰아세웠다거나, 세탄을 처벌해야 한다고 압박을 걸었다거나, 종족의 파벌 싸움을 했다거나, 이런저런 권세를 노린다는 게 몹시 짜증 나서 주리를 틀고 싶지만 그것 때문에 자르는 건 아니니까.”

“…….”

“물론 지금 말한 죄를 안 따지겠다는 건 아니고. 이 새끼가 감히 내 딸에게 함부로 굴어?”

나는 일부러 속된 말까지 쓰면서 케렘을 노려보았다.

다들 움찔했다.

사실 내가 말년에 황후들과 자식들을 멀리하면서, 황실의 권위가 추락했다.

그걸 반등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히 못 박아 둘 필요가 있었다.

내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황실을 능멸했으니 너는 좀 조질 건데, 그래서 잘리는 건 아니야. 알았냐?”

“……폐, 폐하.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여기 있는 놈들 다 내가 시릭으로서 급사하기 전에 봤던 얼굴들이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나는 픽 웃었다.

“이제 그만 좀 보자. 니들 전부 다 은퇴해라.”

“……예?!”

“폐,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신하들이 반사적으로 대꾸하자 나는 정색했다.

포효.

“이제부터 제국의 공직자들은 정년을 50년으로 둔다.”

“예?”

“폐, 폐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외는 없다. 제국 재상 오드벨.”

“예, 폐하.”

“너부터 인수인계 들어가고 후임 준비해라. 설마 후임 하나도 없진 않겠지?”

나는 말하면서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황제인 나도 급사하는데 너희들이 천년만년 무사할 리가 없잖아? 근데 니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후임 하나씩은 키워 놨지?”

“그, 그게…….”

“제국의 번영과 치세를 말하는 놈들이 자기가 책무를 다하지 못할 만약의 상황도 하나 대비하지 않았더냐! 너희들 중 하나가 벼락이라도 맞아 죽으면 나는 손가락 빨면서 전전긍긍하랴? 앞으로 법무부 일은 누구한테 맡기지 한숨만 푹푹 쉴까?”

나는 쏘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고? 너희들의 앞에 앉은 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니 제국이 100년 동안 황제 하나도 없이 정치가 어지럽고, 엉망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냐!”

“폐, 폐하…….”

“앞으로 이런 정치적 공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정년제도를 도입한다!”

나, 시릭 카라카스의 사례를 거론하는데도 반발하겠다고?

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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