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6)
아빠가 잘해 주실 거라고
그리고 밤.
나는 미레이 집 소파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혼자다.
미리엘과 메이호, 미레이는 목욕한다고 욕실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음.”
이거 갑자기 적적해지네.
늘 함께하던 칠성도 이제는 없고.
“황후들은 서부에 있고.”
오드벨이 말하기를 전사자가 최소 8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시신을 수습하고, 또 사후 정리에 다들 정신이 없으리라.
나는 오드벨이 올린 보고서를 싹 훑어보았다.
“이놈들 보게…….”
메이호가 한 설명,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메이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정부 관리라는 놈들이 자기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안 했을 게 뻔하니까.
메이호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게 정부의 중론이라고? 반대 여론이 하나도 없을까?
당연히 아니다.
파벌에는 적대하는 파벌이 있기 마련.
법무장관 케렘을 적대하는 파벌은 내 다른 자식을 황제로 밀고 있었다.
바로 1황녀를.
즉, 지금 정국은 1황녀와 2황녀, 둘 중 하나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대립 구도다.
“하지만 메이호는 이걸 몰랐지. 메이호는 세탄의 이야기를 꺼내면 정색하니까. 형제자매를 아낀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감추셨다…….”
케렘 이거, 간교한 술책을 부리는 놈이네.
아무튼 마음은 굳어졌다.
3일 뒤, 어전회의장에서 썩은 물들을 싹 정리해 버린다.
다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그리고 다시 황제하고…… 황후들 데려오고, 내 환생하고 혼인 문제도 정리하고. 제국군 수습하고, 장녀랑 막내도 만나고. 그리고 하시아 딸 데리러 가야지.”
당장 생각나는 일만 꼽아도 한둘이 아니다.
칠죄신을 잡았다고, 이제 평화로운 시대라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내가 제국을 다스리던 시절에도 범죄는 있었고, 빈부 격차도 있었다.
“잘 살아야지, 잘 살아야…….”
“아빠!”
그때 욕실 쪽에서 미리엘이 뛰어나왔다.
토끼 무늬 잠옷이 귀엽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는 얼른 양팔을 벌렸다.
폴짝!
미리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품에 뛰어들었다.
비누 냄새.
미리엘을 받아든 나는 제자리에서 돌았다.
“아하하하!”
비행기를 탄 미리엘은 신나서 크게 웃었다.
두 바퀴를 더 돌고 멈춘 나는 미리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머리 덜 말랐네. 감기 걸려. 언니가 걱정하겠다.”
“아빠만 혼자 밖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얼른 나왔어요.”
“아이고, 우리 딸. 아빠 쓸쓸할 것도 알아주네.”
예쁜 말만 해 주네!
나는 얼른 거실 천장을 뒤져서 타월을 꺼냈다.
폴짝.
헤매던 내 옆을 따라다니던 미리엘은 먼저 달려가서 소파에 앉았다.
하얀 날개를 접고 다소곳하게 앉은 폼.
내가 머리를 말려 줄 걸 알고 기다리는 중이다.
쓱쓱.
나는 마른 수건으로 미리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아, 근데…….”
생각해 보니 여자애는 머리 관리 잘해야 하지 않나?
피부에도 뭐 바르고.
전장에서 구르던 나야 평생 뭐 바르는 거 없었고, 황제한 다음에도 뭐 바르려고 하면 짜증 냈다.
어차피 군중들 시선 모으는 거야 포효 한 번 쓰면 그만이니까.
“아이고, 우리 딸이 참 예쁘기도 하지.”
“언니도 예뻐요!”
“그래, 그래. 메이호도 예쁘지.”
내가 웃으면서 물기를 닦아 주자 미리엘이 돌아보았다.
“메이호 언니, 정말 힘들어했어요. 세라도 힘들었어요.”
“그래, 아빠가 얼른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이제 다 괜찮은 거죠?”
“응, 물론이지.”
사실 문제가 첩첩산중이다.
제국군의 사후 수습, 제국 정부의 개혁안, 황실과 제국의 안정, 그리고 엔라의 처리.
그리고 하시아와 나 사이의 딸, 아직 이름도 없는 딸아이를 데려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다.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하시아나, 그 아이가 직접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 제일 중요한 내 수명 문제…….
구렁이 담 넘어간 척하기에는 리세라가 너무 절절했다.
내가 진시황도 아니고 불로불사가 될 리가 없겠지만…… 최소한 시늉이라도 해 봐야지.
하나같이 어렵고 끝이 안 보이는 문제들.
하지만.
순진하게 물어보는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니 그냥 다 잘 될 것 같단 생각만 든다.
미리엘은 아무 말 없이, 반사적으로 나를 끌어안고는 품에 뺨을 댔다.
목욕한 직후라서 그런지 몸이 따뜻하다.
“그래, 그래…….”
“아빠, 술 드세요?”
그때 메이호도 욕실에서 나왔다.
가벼운 잠옷 차림.
내 시선에 메이호는 한 바퀴 돌았다.
“아, 이거요? 전에 레이 씨 집에 놀러 왔다가 입었던 거예요.”
“그래.”
메이호는 식탁 쪽의 벽 천장을 뒤져서는 술잔을 꺼냈다.
하는 걸 보니 여기 몇 번 온 눈치였다.
“저도 아빠랑 같이 마셔도 돼요?”
“그럼, 당연히 되지.”
메이호도 다 컸고.
그리고 자식에게 술 마시는 걸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
……또 메이호도 이래저래 지치고 힘들었으니까 위로도 해 줘야 하고.
메이호가 내 맞은편에 앉자 나는 잔을 채워 주었다.
메이호도 내 빈 잔에 채워 주었고.
미리엘은 내 옆에 앉아서는 우리 두 사람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메이호는 술을 마시고는 크게 결심한 투로 말했다.
“아빠, 엔라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으으음, 그건 나랏일이다.”
“해 주세요.”
“호야, 그건 나랏일…….”
“제발요. 예?”
“…….”
메이호가 매달리는 눈빛을 보자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미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미리엘도 주고받은 이야기가 뭔지 알았는지 잔뜩 기대 어린 눈빛이었다.
……두 딸이 나를 압박한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부드럽게 일렀다.
“……호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맘대로 그걸 용서해 버리면 나중에 반역을 다스릴 수가 없어진다.”
“아버지도 이미 들으셨잖아요. 세탄도 장난 아니게 속앓이할 거라는 거.”
“…….”
세탄은 내 앞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건 억누르는 거지.
어머니가 상하는 걸 달가워할 아들놈이 어디 있겠는가?
“호야, 알았다. 알았으니까…….”
“아빠, 말해 두는데 나 황제 안 해요. 절대로, 절대로 안 할 거예요.”
메이호는 크게 결심한 투로 말했다.
“아빠가 오래오래 사셔서 황제 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후계자 이야기는 결국 나올 거예요. 이번처럼…… 후보로 오르는 건 나와 세탄일 거고요. 그런데 나는 황제 안 해요. 절대로.”
“……으음.”
“세탄 하라고 할 테니까 대신 엔라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
이런 말도 안 되는 교섭이 있나?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자기 어머니도 아니고, 다른 황후의 구명을 탄원하다니.
세상 어느 집안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을 거다.
메이호는 자못 당당하게 말했다.
“아빠는 결국 세탄을 황태자로 삼을 수밖에 없을걸요? 사실 세탄 하는 게 마음에 드시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데리고 나가셨고요.”
“……음, 아니. 아니.”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음 황제가 될 세탄의 어머니가 반역죄로 몰려서 사사당하면 황실 전체의 문제가 될걸요.”
“…….”
와, 우리 딸이 정치적인 고려도 하네?
메이호는 본인이 황제에 안 어울린다고 하지만, 제법 센스가 있었다.
리세라가 영민하다면 이 아이는 감이 좋다.
“어때요? 그러니까 아빠도 엔라 어머니에게 중형을 내리는 건 관두는 게 좋을걸요.”
“으으음, 약점을 찌르는구나.”
사실 내 후계자를 따지면 이래저래 세탄이 적임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 출정 때도 옆에 두고 됨됨이와 능력을 살펴봤는데.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아니, 설사 부족한 점이 있어도 내가 틈틈이 가르치면 될 일이다.
메이호는 딱 잘라 말했다.
“오르카에게 미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걘 이미 구워삶았으니까.”
“……딸아, 거짓말이 서툴구나. 넌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고 나서 오르카에게 연락할 틈도 없었잖니.”
“걔, 걔는 내가 하자면 들을 거라고요. 세라도 제 편일걸요? 그렇지, 미리엘?”
“응!”
미리엘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내 자식 중 4명이 엔라의 사면을 원하는 건가?
……솔직히 흔들린다.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애당초 엔라를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정말이에요?”
“일단 재판정에는 세워야 한다. 3심까지 가면 이런저런 증거가 나올 테고. 뭐 안 나오면…… 내가 좀 흘려 주고.”
제국해방군의 진정한 목적이 칠죄신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그러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은 될 테고 극형까지는 안 갈 것이다.
“여론 조성이야 자연스럽게 될 테니까.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래요, 알았어요. 아빠 말 믿을게요. 만약 약속 어기면 아빠랑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믿는다고 하면서 또 왜 그러니.”
“혹시 몰라서요. 그래도 세라 먼저 봤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죠.”
메이호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내가 세라부터 찾았다는 걸 은근히 섭섭해하는 투.
내가 물끄러미 보자 메이호는 술잔을 비우고 자기 스스로 따라서 연거푸 마셔 버렸다.
그러자 나는 비어 있는 내 왼쪽 자리를 툭툭 쳐 보였다.
“자, 호야. 여기 와서 앉아라.”
“왜요.”
“앉아 보라니까.”
내가 거듭 말하자 메이호는 술잔을 들고는 내 옆에 앉았다.
두 딸과 어깨를 붙이고 앉은 상황.
나는 술병을 들어서 메이호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면서 일렀다.
“많이 힘들었지?”
“……힘들긴 뭐가요. 렌시엘 어머니도 나 믿고 가신걸요. 언니도 없으니 내가 맏이 노릇 해야죠.”
“아빠에게 서운하지?”
“……아니요.”
“서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는 너희들을 다 사랑해. 메이호도 미리엘도, 오르카도, 너도 다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자식들이다. 네가 괜한 일에 시달리게 해서 미안하고, 또 엔라의 일로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아빠가 못해 준 게 많아서 또 미안하고.”
도리도리.
메이호는 어느새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는 가로저었다.
어린애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머리를 문지른다.
“…….”
메이호도 강단 있게 보여도 사실 속은 여리다.
나, 시릭 카라카스와의 문제로 어머니인 랑에이랑 크게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고.
오해도 잘하고.
“막내라고 더 예쁘고, 그런 거 없다. 너도 내 자식인데 내가 예뻐하지 않을까?”
“……알아요.”
메이호는 부끄러워하면서 작게 대답했다.
맏이 노릇해서 억울하고 갑갑한 것도 있겠지.
정부의 갑작스러운 압박, 내 실종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버텨서 동생들을 지켜야 했을 테고.
“이제 술은 그만 마시고. 내일 머리 아프다.”
“……예.”
메이호는 얌전하게 술잔을 내려놓고는 내 팔을 끌어안았다.
한숨을 쉬면서.
반대쪽을 돌아보니 미리엘은 진즉 내 팔을 베개 삼아서 잠들어 있었다.
음.
둘 다 잠들면 침대로 옮기자.
미레이는 베란다에서 자라고 하고.
“아빠.”
“응?”
잠든 줄 알았던 메이호가 나직하게 불렀다.
“사랑해요.”
불쑥 말한 메이호가 멈칫했다.
“아, 음. 이, 이상한 의미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다 커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지 메이호가 우왕좌왕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 우리 딸을 사랑하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진짜, 그거 그만 놀려요.”
“싫은데? 앞으로 평생 놀릴 건데? 둘째 딸이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말한 거 사방팔방 자랑할 건데.”
꼬집.
메이호가 내 팔을 꼬집자 나는 장난스럽게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틀었다.
웃음을 터트린 메이호는 다시 내 팔에 고개를 기댔다.
“……아빠가 잘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래, 나도 너희들이 있어서 든든하다.”
메이호가 알아서 착실하게 효녀 노릇을 하고.
자기는 황제를 안 할 테니까 대신 세탄과 그 어머니를 봐 달라는 소리까지 한다.
국가적으로는 어떻건, 아버지로서는 가슴이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자식 농사 하나는 잘 지었구나.
아니, 사실 난 한 것도 없네.
그냥 우리 애들은 하나같이 착실하고 예쁘게 컸구나.
“나도 너희들을 사랑한다.”
약해진 숨소리.
메이호는 이미 잠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상관없다.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 다음에 다시 말해 주면 되니까.
나는 두 딸의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식은 부모의 보물이다.
“그러면…….”
자식 농사는 성공했다.
이제 국가 농사를 끝내러 가자.
나 죽었다고 내 자식들에게 골육상쟁 운운하면서 황제 시키려고 했던 놈들.
100년간 부귀영화를 누리던 놈들이 순순히 은퇴할 리가 없지?
그럼 하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