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5)
나는 못하니 너희들이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가 죽었다는 소문에 제국 정부 놈들이 허튼짓을 한다고?
나는 리세라에게 사정을 듣고 바로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일단 정보 수집하는 동안 황성 밖의 은신처가 필요했다.
최대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
다크엘프의 안가는 이셀렌이나 다른 다크엘프에게 알려진다.
아르센의 집? 가족하고 사는 부하 집에 머무는 건 못할 짓이지.
그래서 미레이의 집을 작전 회의실로 정했다.
오드벨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애들이 온 타이밍이 안 좋네.
나는 오드벨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속삭였다.
“야, 일어나. 웃어.”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애들이 겁먹잖아, 좀 더 자연스럽게 못 웃냐?”
내가 갈구자 오드벨이 말했다.
“폐하,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메이호가 떨면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서 바들바들 떠는데, 주먹을 꼭 쥐고 있고.
미리엘이 얼른 내게 다가오려다가, 손을 잡고 있는 메이호의 반응을 보고는 놀라서 굳어 버렸다.
“아, 호야. 호야? 진정해.”
“……아빠, 살아 있었어?”
“음, 그게. 그렇게 됐다.”
“살아 있는데 죽은 척하고 있던 거야? 세라도 걱정해서 쓰러졌는데? 다들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메이호는 성급하게 따졌다.
뭐 오해한 거지만, 일단 들어줘야지.
애도 갑자기 황제 되란 소리에 엄청 곤혹스러웠을 테니까.
그때 메이호의 손을 잡고는 미리엘이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아빠야, 언니.”
“……알아, 아는데, 아는데에.”
“메이호 언니, 화내지 마.”
미리엘이 간곡하게 부르자 메이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는 진저리를 쳤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 메이호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통곡.
“왜, 왜 아빠는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왜.”
“…….”
사실 전후 사정을 알면 메이호도 이럴 애가 아닌데.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정말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운다.
몸을 웅크리고 통곡하는 메이호의 등을 미리엘이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 시선으로 나를 부른다.
“…….”
나는 조심스럽게 메이호에게 다가갔다.
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서럽게 딸이 우는 게 너무 안쓰럽다.
“그래, 아빠에게 화내. 다 화내.”
내가 끌어안자 메이호는 처음에는 몸부림을 쳤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다시 펑펑 운다.
“아빠, 아빠…….”
“그래, 그래. 아빠다. 아빠가 다 미안하다.”
“아빠아아.”
메이호는 더는 말을 못하고 목이 찢어져라 울었다.
어느새 날 끌어안고.
다 컸는데도 갑자기 어린애로 돌아간 모습.
나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안아 주었다.
자식이 잘 컸다고 해도, 아버지에게는 어린 자식이니까.
30분 뒤.
다 운 메이호는 얼굴을 가리고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 설명을 듣고.
“……오해해서 죄송해요, 아빠.”
“괜찮다니까, 힘들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진짜 미안해요, 죄송해요.”
메이호는 진짜로 얼굴도 들지 못하고 그 소리만 거듭했다.
내가 일부러 실종된 게 아니라는 걸, 설명을 듣고는 안 것이다.
내가 돌아오자마자 리세라부터 만나서 이변을 알고 대책을 마련하면서, 두 딸을 은밀히 불렀다는 걸.
다 알고 나니 나한테 화낸 게 엄청 미안해진 모양이다.
메이호의 옆에 앉은 미리엘이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리엘은 안 울었네?”
“메이호 언니가 불쌍해서 안 울었어요.”
의젓하게 말하는 미리엘의 눈가도 붉어져 있었다.
나를 만지고 싶은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에 슬쩍 옷자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냉큼 옷자락을 잡고는 좀 안심한 얼굴이 된다.
아빠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충격적이었지만, 그게 오보였다고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인 모양새다.
“……트, 특관님. 힘들어요.”
“폐하에게 충성을 보일 좋은 기회다, 미레이 이관.”
“……여, 여기 제 집 마루인데 제가 왜 이래야 하죠?!”
내 앞에는 제국 재상 오드벨과 집주인 미레이가 나란히 머리를 박고 있었다.
나는 오드벨에게 쏘아붙였다.
“하던 이야기 계속하자, 오드벨. 너 애들 관리 어떻게 했는데 이 모양이냐?”
“죄송하지만 저는 관리 못합니다.”
“뭐?”
이놈이 항명인가.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오드벨이 머리를 박은 채로 힘겹게 말했다.
“저는 폐하의 충신입니다만 정부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6황후의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
뭔 소리인지 알겠다.
오드벨이 아무리 옳은 말, 공정한 처리를 하더라도 6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외척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자기 세력 확대를 꾸미는 야심가로서.
물론 오드벨은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이놈은 진짜로 자기 여동생이 황후 관뒀으면 하거든.
하지만 제국의 문무백관들에게 오드벨의 그런 마음은 가식, 위장으로 여겨진다.
“그래, 황후들이 날 시해했다는 음모론까지 합쳐 보면 더 그렇지. 그래서 애들 관리를 못했다는 게 네 변명이냐? 그래서 메이호에게 황제 하라는 정부의 공론까지 만들 정도고?”
“……폐하, 죄송합니다만 법무장관 케렘은 저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이가 아닙니다.”
“걔가 그렇게 잘나가?”
“폐하가 계셨을 때는 그냥 법무부의 차관이었습니다만. 100년 사이에 상당한 거물이 되었습니다.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요.”
나는 턱을 괴고 혀를 찼다.
“얼씨구? 그리고 너와 대립하는 파벌이고?”
“폐하에게 이의를 제기해서 몹시 죄송합니다만 저는 파벌 따위 없습니다! 언제나 혼자 퇴근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술을 마십니다! 애인도 없습니다!”
“…….”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오드벨은 사적으로 교류하는 친구도 하나 없다.
재상이자 외척인 자기가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파벌놀음하고, 불순분자들의 우두머리가 된다면서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군자다운 태도지. 사실은 네츄럴 본 아싸고.”
“감사합니다, 폐하!”
“덕분에 애들이 파벌놀이 하는 건 막지도 못하네. 메이호를 황제 만들겠다는 소리에 반대 안 했냐?”
“전 어떤 의견도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제가 의견을 내면 그게 6황후의 의중, 혹은 4황녀 리세라를 지지하는 발언으로 곡해되기 때문입니다.”
오드벨의 말이 맞다.
나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돌아온 게 알려지면 메이호를 부추겨서 황제로 만들려던 놈이 일제히 입을 다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아예 싹을 싹 쳐 내야 한다.
“제국과 황실이 고작 100년밖에 안 됐다 이거지. 결국 정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어.”
인간들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이종족들에게는 찰나의 순간이니까.
결국 내가 오래 버티면 해결될 문제긴 한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보고할 게 그것뿐이냐? 메이호의 말을 들으면 애들이 아주 제대로 미친 소리를 하던데?”
“……4황후와 1황자 전하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는 그리 틀린 예측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신하들 전원 다 오로지 순수한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메이호를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 종족의 권세 다툼은 단 하나도 없이?”
“…….”
“제국에서 인간 다음으로 가장 숫자가 많은 게 수인이지? 그러니 3대 황제는 수인이 되는 게 맞다, 뭐 그런 계산이 하나도 없다?”
애들에게 정치적인 이야기는 사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애들이 정치판에 강제로 휘말려 버린 이상, 무작정 회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오드벨은 머리를 박은 채로 신음을 흘렸다.
“일각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
“저기, 폐하…….”
나는 오드벨의 말을 잘라 버렸다.
“이건 그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정치 체계 문제다. 내가 시릭 카라카스로 제국을 다스리던 시절, 여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일하는데 바쁘기도 했거니와…… 이종족들의 수명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하지 못했다.”
“…….”
“그래서 제국해방군의 말단에 유달리 인간들이 많이 투신했지. 자기들의 출셋길이 막혔다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고인물들이 다 해 먹는 판 자체를 엎어 버려야 한다.”
“트, 특관님. 저, 저, 진짜 힘든데요.”
오드벨의 옆에서 머리를 박고 있던 미레이가 하소연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힘들게 하려고 시키는 거야. 헌병대라면 머리 박고 2시간쯤은 버텨야지.”
“이러다가 머리 훌렁 벗겨질 것 같단 말이에요. 이마가 뜨거워요!”
“…….”
나는 무시하고 미레이를 노려보았다.
얘가 은근슬쩍 내 애들이랑 너무 친해졌어.
이걸 강제로 떼어 놔야 하나. 그냥 놔둬야 하나?
그때 미리엘이 나와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빠, 레이 언니 아파해요.”
“……응, 그래. 미리엘.”
애가 부탁하니까 어쩔 수 없네.
“둘 다 그만하고 일어나.”
후다닥.
미레이는 얼른, 오드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드벨에게 지시했다.
“시간 3일 준다. 정부 애들의 의견들 적당히 수집해 놓고 어전회의장에 싹 다 모아.”
“싹 말입니까?”
“제국군이야 아직 서부에서 정리 중이니까 무리겠지. 황도에서 출근 가능한 놈들만 추려서 데려와. 새 황제가 부른다고.”
“그건…….”
“멍청한 놈들이 메이호가 황제 할 거라고 착각하게 놔두라고. 굳이 정정하지 마.”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오드벨에게 물었다.
“하루만 메이호와 미리엘의 부재를 감출 수 있겠냐? 내가 돌아왔단 사실을 감추고?”
“오르카 황자님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 겁니다.”
“그래, 일단 자세한 건 말하지 말고 오르카에게 부탁해라.”
나는 메이호와 미리엘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두 사람 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오늘은 아빠랑 지내고, 내일 세라에게 돌아가라.”
“그래도 돼요?”
미리엘이 반색했다.
내가 같이 있어 준다니 몹시 신난 얼굴이다.
메이호도 얼굴을 풀더니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세라 혼자 놔두는 건 미안한데.”
“세라는 이미 보고 왔다. 아빠도 외롭고 쓸쓸해서 그래.”
나는 일부러 약한 척을 했다.
메이호 좀 위로해 줘야지.
갑자기 황제 하라는 직격탄, 그것도 세탄과 엔라의 처우까지 들먹였으니 애가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으리라.
“알, 알았어요. 그럼 오늘 밤만 여기서 지낼게요.”
메이호는 어색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얼굴이라도 씻고 올 모양이다.
나는 미리엘과 맞잡은 손을 흔들면서 웃어 보였다.
“우리 미리엘도 언니랑 같이 얼굴 좀 씻고 올까?”
“네!”
미리엘은 천사처럼 방긋 웃으면서 나를 한 번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폴짝, 소파에서 내려가더니 종종걸음으로 메이호의 뒤를 따랐다.
내 딸이지만…… 어쩜 저렇게 하는 짓이 귀여울까.
애가 너무 예뻐!
미레이가 내 눈치를 보면서 슬쩍 미리엘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풀렸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 딸이지만 진짜 귀엽지?”
“…….”
“대답을 안 하네? 아니라고? 지금 황제에게 아니라고 하고 싶다고?”
“3황녀님의 귀여움은 우주 제일이십니다.”
오드벨이 어색하게 아부했다.
나는 돌아보고는 오드벨에게 눈을 흘겼다.
“넌 진짜 아부 못하는구나. 티가 난다.”
“전 폐하에게 충성하지, 폐하의 혈육들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아이고, 알았어요.”
오드벨이 각별히 이상한 놈이기는 하지만 다른 놈들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나를 존중하는 거지, 황후와 그 자식들을 크게 존중하는 건 아니거든.
그 기풍을 뿌리째 고쳐야 한다.
“오드벨, 지금 염병하던 놈들의 명단, 이력서 싹 다 가져와.”
“1시간 주시면 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 빨라?”
내가 어이없어서 묻자 오드벨이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가 돌아오시면 달라고 하실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내가 안 돌아오면?”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가져와.”
“폐하, 실례지만 어떻게 처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은 지금 제국 정부의 중핵입니다. 진노하신 것은 알겠지만…….”
“싹 은퇴시킬 거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은퇴를 못해서 서러우니까 대신 너희들이 은퇴해라.”
백 년 넘게 고여서 썩어 버린 놈들.
마개를 뽑아서 흘려 보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