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4)
퇴근하고 돌아오니 마주하는
황성의 동궁전.
호랑각(虎郞閣).
2황녀 메이호가 머물고 지내는 곳이다.
객실.
메이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8명의 사람들.
제국 정부의 중핵, 12부를 각각 담당하는 장관들이다.
즉, 제국 정부의 중신들이다.
서로 순서라도 정했는지 번갈아서 찾아오더니만, 오늘은 아예 전원 집합이다.
내놓는 소리는 똑같고.
“황녀 전하, 부디 결심을 굳히소서.”
“부디 천명을 받드소서!”
“……싹 다 미쳤어요? 집어치우라고 몇 번을 말해요?”
메이호는 으르렁거리면서 이를 드러냈다.
호랑이의 딸은 호랑이.
불세출의 영웅인 시릭 카라카스와 제국 최고의 선봉장인 랑에이의 딸.
처음에는 기가 눌렸던 신하들이지만, 이내 적응한 모양새였다.
“지금의 기염은 우리들이 아니라 제국의 신민들에게 펼치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
“이건 하늘을 받드는 일입니다, 전하!”
“전하가 아니시면 이 어지러운 시국을 대체 누가 어찌하실 수 있다는 겁니까?”
“굽어 살펴 주소서!”
“……아, 진짜. 나보고 어쩌라고요, 대체. 아버지가 실종되셨다고 바로 황제 하라고요? 내가 미쳤어요?”
메이호는 질색했다.
아빠가 예전에 왜 신하들이 뭐라고 하면 신발 집어 던지고, 엉덩이 걷어차고 다녔는지 알겠다.
그녀도 지금 그러고 싶으니까!
중신들 중 가장 앞에 앉은 고양이 수인 남자.
법무부 장관 케렘.
재상인 오드벨 다음, 정부 내에서 2~3위를 다툰다는 거물이다.
“전하! 제국에는 하루라도 황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하물며 지금은 제국군이라는 강력한 무력이 한군데에 모인 상황, 얼른 대통을 세우셔야 합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릴레이로 매일 찾아오는 정부의 대신들.
메이호의 귀에도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뭔 계산을 깔고 있는지도.
“반역을 도모한 4황후와 1황자가 지금 제국군을 이끌고…….”
“아가리 안 닥쳐?”
메이호가 정색하고는 경고했지만 케렘은 물러나지 않았다.
“전하!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실 때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모인 제국군은 제국 군대의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반란을 일으킨 4황후가 군을 장악해서 황도로 진격해 오면 대체 어찌하시겠습니까!”
“…….”
엔라 어머니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엔라가 반란을 일으킨 사정은 아주 복잡하고, 그건 가족사와 연관된 것이었다.
설사 메이호가 전부 다 털어놓는다고 해도, 이들은 믿지 않을 테고.
만에 하나 믿어 주더라도 엔라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는 믿지 않으리라.
케렘이 부르짖었다.
“가족은 사사로운 일이고 이는 국가 중대사! 4황후는 극형을 면할 수 없는 몸,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제국군을 장악하고도 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내 어머니도 거기 계시잖아요. 그리고 다른 제국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도 있고!”
“랑에이 전하의 무용이 뛰어나신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지만 군대 장악에 있어서는 4황후를 경시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격문 한 장에 서부군 전체가 그녀에게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지금 서부군이 중앙군에게 항복을 하였다고는 하나 내부에서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는 법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 부디 천명을 받드소서!!”
“천명을 받드소서!! 황녀 전하!!”
메이호는 입을 다물었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다 패 버리고 싶은데,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
듣다 보면 이들의 걱정도 상당히 합리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아니, 왜 나인데요? 나 정치 하나도 몰라요. 100년 동안 여행만 다녔는데요? 나보고 덜컥 황제를 하라고요?”
“2대 황제 후보도 사라진 상황에서 제국군이라는 강대한 힘이 붕 떠 버렸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초대 황제의 혈육 중에 한 분이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 이게 바로 제국 정부의 공론입니다!”
“1황녀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고, 1황자는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2황녀 전하께서 대통을 이으심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메이호는 신음을 흘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치에는 맞는 소리다.
“……이, 일단 아빠, 아니, 리젠 리브라타의 생사가 불분명하잖아요? 그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죠.”
“외람되지만 비밀스러운 정보망에 따르면 2대 황제 후보께서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칠죄신을 물리치고 나서 그 힘을 감당하시지 못한 거로 압니다.”
“하지만 제국군은 이에 대해서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하지 않는바, 삿된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가 염려 중입니다.”
“…….”
아니, 그냥 어머니들이 공황 상태 아닐까?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죽은 다음에 황후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메이호는 잘 보았다.
겨우 재회한 아버지, 그런데 또 사라졌다면?
그걸 옆에서 지켜본 황후들은 지금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이 신하 놈들은 그런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호는 이성적으로 설득해 보려고 했다.
이미 몇 번이고 오간 논의지만.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국군에서 뭐 특별한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왜 부랴부랴 그래야 하는데요.”
“해산하고 있지 않는 게 이미 삿된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움직인 다음에 행동하면 너무 늦습니다! 지금 메이호 전하가 대통을 잇는다고 발표하셔야 그들의 헛된 준동을 막을 수 있습니다.”
“…….”
아, 반박할 말이 없네.
메이호는 치를 떨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 할 마음 없다.
……아니, 진짜 꼭 해야 한다면, 가족들을 위해서 꼭 해야 한다면 하긴 하겠다.
“……당신들 자꾸 입을 놀리는데, 내가 황제가 되면 세탄하고 엔라 어머니는 어떻게 되죠?”
“…….”
“내가 황제가 돼서 두 사람을 처벌하라는 거 같은데? 아니, 천 번 양보해서 엔라 어머니는 그렇다고 쳐도, 세탄은 무슨 죄인데요? 걔 아빠 따라서 전쟁터 나가서 열심히 싸웠잖아!!”
케렘이 나직하게 말했다.
“1황자에게 다소의 공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4황후를 처벌한다면, 그 자가 거기에 한을 품지 않을 것 같습니까?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시면 후환을 마땅히 제거하셔야 옳을 줄…….”
“후환? 제거?”
메이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의자를 잡았다.
그러고는 케렘의 머리를 향해서 던졌다.
케렘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의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퍽!!
의자는 빗나가서 벽에 꽂혀 버렸다.
메이호가 의자를 놓는 막판에 이성을 찾아서, 궤도가 틀어진 것이다.
케렘이 자못 당당하게 말했다.
“제 머리를 때려서 제국이 평안해진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소서! 하지만 황녀 전하! 대업이라는 건 때로는 가슴 아픈 일을 감수해야 하는 법입니다! 하나로 뭉쳐서 속을 알 수 없는 제국군! 비어 버린 황위! 지금 황도에 남은 메이호 전하가 대통을 이으셔야 제국군이 스스로 따르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
패 버리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안 떠오른다.
메이호는 분노로 떨면서 케렘을 비롯한 다른 대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케렘은 꼿꼿하게 말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1황자가 군을 장악하기 위해서 술수를 쓸지도 모릅니다. 전하의 용단이 바로 이 제국을 구하는 것, 돌아가신 초대 황제를 위한 일임을 헤아려 주소서!”
“헤아려 주소서! 메이호 전하!!”
“…….”
신하들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외치자 메이호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린다.
울화가 치밀어서.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고, 한편으로는 이들의 말이 옳지 않을까 생각이 슬그머니 든다.
메이호는 어린 장녀를 대신해서 자기가 자매 중 맏이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세탄 카라카스, 그녀와 동년배.
형제 중 믿음직한 의논 대상이다.
‘하지만…… 엔라 어머니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세탄이 자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제국군을 장악하고 황도로 진격해 올까?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을 직접 보고 들었는데, 설마 그런 끔찍한 일을 할까?
하지만 일말의 불안, 의심은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어머니의 목숨이다.
입장을 바꿔서, 메이호가 세탄의 입장이라면.
랑에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지 않을까?
“…….”
모르겠다.
메이호가 떨면서 신하들의 머리를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여동생, 3황녀 미리엘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메이호를 도와주러 온 거다.
“……다 돌아가요.”
“전하.”
“다 돌아가요. 난 미리엘하고 이야기해야 하니까.”
“…….”
메이호의 말에 신하들은 눈짓을 교환했다.
3황녀 미리엘과 정치적인 밀담을 나누려고 한다고 착각하는지, 멋대로 수군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전하의 용단을 기다리겠습니다.”
“…….”
다 나가자 메이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미리엘은 눈치를 살피다가 다가와서는 메이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언니?”
“……응, 괜찮아, 미리엘.”
메이호는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애써 웃었다.
아버지, 리젠 리브라타가 가 버렸다는 사실.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황도, 황성을 지켜야 하는 건 실질적인 맏이인 메이호의 몫이니까.
리세라는 쓰러졌고, 그 다음에는 미리엘을 돌보고.
이후에는 신하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아, 음.”
이제야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메이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도 안 계시면 그녀가 이 황실의 어른이다.
리세라와 미리엘, 두 여동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미리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탄 오빠랑 싸워요?”
“아냐, 쟤들이 이상한 말 하는 거야. 그런 일은 절대로 안 벌어져.”
아, 그러고 보니 급하게 돌아온 오르카도 있지.
하지만 오르카도 지금 제국군 내부의 사정은 잘 모르는 모양새다.
그저 황도의 안정을 위해서 급하게 달려와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고.
“음, 우리 세라에게 갈까? 세라 건강해졌는지 물어봐야지.”
“세라 지금 잔데요. 대신에 레이가 놀아 준다고 했어요.”
“……미레이 씨?”
메이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도헌병대원이지만 리세라와 미리엘이랑 각별한 사이다.
얼굴은 예쁜데 꾸밈이 없고 넉살이 좋은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황실의 자제들을 상대할 때면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깔리는데…….
“그 사람은 진짜 아무 생각이 없지…….”
“……?”
“……응, 아냐. 그래. 나도 레이 씨가 보고 싶네.”
아무런 계산도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상대는 소중하지.
지금처럼, 가족이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면 더욱.
“그럼 준비하고 가자, 어디서 보자고 하는데?”
“레이 씨가 자기 집에 초대한대요.”
“……음, 지금 상황에서?”
황성을 비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오르카에게 부탁하면 되려나.
메이호는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해질녘의 황도.
번화가, 미레이의 집.
전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선글라스를 껴서 얼굴을 감춘 메이호는 최소한의 호위병과 함께 찾았다.
그녀는 물론이고 미리엘의 안전도 있으니까.
“그럼 밖에서 계속 경호 부탁해요.”
메이호는 그리 이르고는 미리엘의 손을 잡고는 계단을 올랐다.
미리엘은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지 메이호의 손을 잡고는 의젓하게 굴었다.
리세라가 쓰러진 마당, 자기가 언니 노릇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기특하긴.’
메이호에게는 미리엘도, 리세라도 둘 다 소중한 동생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메이호는 새삼 마음을 다잡고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이 없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메이호는 의아해하면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 씨도 정신이 없으신가, 이젠 문도 열어놓고 다니네.”
“실례합니다.”
미리엘이 대신 안쪽을 향해서 인사했다.
메이호는 미리엘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데…….
거실에서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고 싸우고 있었다.
“특관님이 또 망칠까 봐 그렇죠! 아멜리아 씨도 울려 놓고!”
“네가 뭔데 우리 아멜리아 갖고 이빨 터는데? 너 진짜 혼나 볼래?”
“폐하! 그 수인 메이드가 그리 마음에 드시면 새로이 아내로 맞으심이 어떠하십니…… 크악?!”
옆구리를 찌르는 펀치에 엘프 남자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제국 정부의 넘버 원, 제국 재상 오드벨이었다.
“넌 좀 조용히 하고 있어. 애들이 난동 부리는 거 하나도 관리 못하고는 어디서 개소리야? 재상이라는 놈이 뭐 이리 무능해?”
“…….”
메이호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남자가.
……미레이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고 있었다.
“넌 왜 나보다 애들하고 친한데? 응? 왜 은근슬쩍 내 애들하고 일촌 먹었어?”
“아와와와와와, 아와아아아아.”
“……아빠?”
왜 여기에 있지?
이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또 죽었다고 해서 리세라가 쓰러지고, 그녀는 황제가 되라는 온갖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
메이호가 멍하니 부르자 미레이를 털고 있던 남자가 덜컥 굳었다.
리젠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메이호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미리엘도 보고.
“……으음, 둘 다 안녕?”
메이호는 주먹을 쥐었다.
때려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