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3)
나의 은퇴 계획이 산산조각
리세라가 느릿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아주 느린 동작.
“…….”
서로 마주한 시선.
리세라의 눈가는 부어 있었고,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그걸 안 순간 가슴이 꽉 조여들 듯이 아파 왔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또 너희들에게 괜한 걱정을 시켜서…….”
“오셨어요?”
리세라는 조용하게 말했다.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나직하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세라야,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그게 아니라…….”
“옆으로 와 주세요.”
리세라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나직했다.
나는 부모 자식 관계가 뒤집힌 기분으로, 쭈뼛거리면서 리세라의 옆으로 향했다.
리세라의 창가 자리에서는 정원이 내려다보인다.
정령무희 나비린이 가꾸는 꽃밭.
정령계와 통해 있다는 이곳은 계절에 관계없이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진다.
딸아이, 리세라가 적적하지 말라고 선물한 공간이다.
나비린도 딸에게는 각별한 어머니니까.
“…….”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고작 10일밖에 안 지났는데, 리세라가 말라보였다.
어깨를 두드려 주고, 팔로 안아 주고 싶지만 지금 딸아이의 심경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또 죽은 줄 알았던 이 아이는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아버지.”
“……으응?”
“아버지가 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 생각해 봤어요.”
“음, 그게 사실…….”
“어차피 100년 안에 벌어졌을 일이라는 걸요.”
리세라는 내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반대로 나는 애써 목소리에 기운을 넣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이렇게 무사히 살아 돌아왔잖니? 이제는 계속 함께 살자.”
“오래 살아 주셨으면 해요.”
“……응?”
“부탁드릴게요. 제발 오래 살아 주세요. 우리들이 아빠에게 효도할 수 있게요.”
리세라의 목소리에 서서히 감정이 실렸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효도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오래 살아 주시면 안 돼요?”
“음,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아빠 튼튼해! 뭐 그런 걱정을…….”
“미리엘 언니가 울음을 터트렸어요. 죄송해요, 제가 쓰러지는 바람에 아빠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감출 수가 없었어요.”
“…….”
듣던 나는 멈칫했다.
아무래도 리세라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이러는 게 아닌 것 같다.
“저도 슬픔에 멍해지면서도 생각했어요. 아, 어차피 아버지는 50년 안에 돌아가실 분이었구나.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가 없었구나.”
“……으음.”
조용히 듣자.
내가 눈치를 보자 리세라는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들과 아직 연락하지 않았지만 몹시 낙담하고 계시겠죠. 이래서는 안 돼요. 또 이럴 수는 없어요. 아빠가 또 떠나가시게 만들 수는 없어요.”
“……음, 세라야. 하지만 사람 산다는 게 다 그런 건데.”
“오래 살아 주셔야 해요, 제발요.”
리세라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올려다보는 시선.
눈가에 서서히 눈물이 고인다.
가슴이 아려서 안아 주려고 하자, 리세라가 내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
헉?!
충격에 내가 굳어 있자 리세라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약속해 주세요.”
“그래, 그래. 알겠다. 아빠 이제 위험한 일 절대 안 할게. 약속, 약속한다.”
“오래 살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이것만 들어주시면 아빠가 하는 말 뭐든지 들어드릴게요.”
“…….”
어.
이거 그저 감정적인 탄원이 아닌가?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물었다.
“……지금 말하는 게 엘프 기준이지? 아니, 다른 이종족 기준?”
“최소한 미리엘 언니가 다 클 때까지요.”
“…….”
그거 넉넉잡아 천 년 이상인데?
내 머릿속에 문득 경종이 울렸다.
……이거 혹시 그거 아냐?
오드벨이나 다른 신하 놈들이 나보고 천년, 만년 황제 해 달라고 하던 그거 아냐?
이성은 경고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애가 울잖아!
“응, 물론이다. 아빠 오래 살게. 오래 살아서 우리 세라랑 다른 애들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맛있는 것도 먹고, 재미있는 공연도 보고. 책도 읽고.”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우리 세라가 이렇게 슬퍼하는데 아빠가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할까. 자, 자. 그러지 말고…….”
내가 달래려는데 리세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얼른 부축하려고 하는데, 리세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용케도 걸어갔다.
의도인지, 아닌지 나를 절묘하게 피해서는 서랍장으로 다가간 리세라.
서랍을 열고는 뭔가를 꺼내더니 돌아와서는 내게 내밀었다.
“그럼 사인해 주세요.”
“…….”
반사적으로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대략 내용이…….
「시릭 카라카스이자 리젠 리브라타인 나는 수명 연장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합니다.」
공증인 자리에 오르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말로 쪼아서 분위기 휘어잡고는 바로 계약서 내미는 거, 물론 공증인은 다크엘프로.
……내가 하기만 하다가 당하니까 참 말이 안 나오는군.
나는 펜을 잡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세라야. 장난이 심하…….”
“…….”
뚝.
리세라의 뺨이 그 순간 괴롭게 일그러졌다.
겨우겨우 막아 놨던 둑이 터지는 것처럼, 눈물이 뚝 떨어지는데 나는 순간 대경실색했다.
“아, 아, 아! 아빠가 사인할게! 당장 사인한다! 사인해!!”
이게 바로 인과응보인가 뭐 그건가?
나는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수법 그대로 얼른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딸이 울잖아!
이거 좀 사인해서 애가 진정하면 백 번이라도 해야지!
“자, 아빠 사인했다! 사인했어! 지킬게! 됐지?”
“……왜 이런 거 준비했는지 안 물어보세요?”
“응? 아냐, 아냐. 아빠도 자주 이랬거든? 우리 세라는 참 나를 닮아서 똑똑하고 영민하구나. 그래, 사람을 후려칠 때는 일단 말로 기선 제압을 한 다음에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내미는 거야. 거기다가 공증인은 다크엘프! 아, 이셀렌의 아들인 오르카라면 누가 감히 어기겠어.”
“제가 오르카에게 부탁했어요.”
“그래! 남매 간에 사이가 좋으니 아빠도 참 기쁘다! 이래야지! 과연 내 자식들이지!”
나는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딸의 기분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응, 응! 철두철미! 그게 얼마나…….”
“아빠가 환생하시면 이번에야말로 찾아내서 꼭 이거 도장 찍게 하려고요.”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리세라는 10분 전까지 내 생존을 몰랐다.
내가 다시 환생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고 이런 걸 준비한 거다.
리세라는 착잡하게 말했다.
“오르카는…… 절 생각해 줘서 군말 없이 해 줬어요. 이걸로 제가 기운을 차린다면 얼마든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요.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런 티가 났어요.”
“으음, 오르카가 요원치고는 감정적이기는 하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빠를 또 떠나보냈다는 게 얼마나,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달래는 것도 소용없이.
리세라의 뺨을 타고 눈물이 서럽게도 떨어졌다.
“세라야. 미안, 미안하다. 아빠가…….”
내가 끌어안으려고 하자 리세라가 손으로 밀쳐 버렸다.
다른 아이도 아니고 리세라가 거부했단 사실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빠, 미워요. 미워요. 또, 또 그렇게 훌쩍 가 버리려고, 좀, 그냥 좀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세라는 늘 착한 아이였는데. 아빠 칭찬 듣고 싶어서 참고 힘냈는데 왜 자꾸, 왜 자꾸 가 버리려는 거예요.”
“…….”
“알아요. 아빠가 잘못한 거 없다는 거. 그래도, 그래도…….”
“미안, 미안하다.”
리세라가 떨면서 울자 나는 진지하게 끌어안았다.
리세라가 하지 말란 듯이 몇 번 밀치려고 했지만 힘으로 막았다.
“알았다. 아빠가 오래 살 수 있을 방법 찾아볼게. 세라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너희들 자라는 것도 봐야지. 응?”
“……약속하신 거예요?”
“그럼! 우리 세라는 아빠 못 믿어? 아빠는 나라도 세우고, 나쁜 신도 없애 버리고 또……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라고.”
남들이 위대한 황제니 뭐니 해도, 자식의 눈물 앞에서는 그저 아버지다.
나는 손이 발이 되는 심정으로, 착잡하면서도 애달픈 마음으로 리세라를 달랬다.
“아빠, 앞으로는 절대 위험한 짓 안 하고 살아남을게. 지금도 이렇게 돌아왔잖아? 걱정하지 마라.”
“……심한 말해서 죄송해요.”
리세라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딸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아니, 아니야. 우리 딸 마음을 아프게 한 아빠가 나쁜 놈이지. 괜찮아, 괜찮아. 다 잘 될 거다. 걱정하지 마라.”
“……아빠.”
리세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딸아이의 등을 두드리면서 앞을 보았다.
창문 너머, 저 먼 하늘을.
……큰일이네.
내가 진시황도 아니고 어떻게 천 년을 살아.
“아빠, 아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그래.”
하지만 자식이 우는데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지.
리세라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애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일단 침대에 눕혔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나는 가져온 선물들을 침대 옆에 놓았다.
“저런 거 좋아하나 싶어서 하나 사 왔다. 보관했다가 밥 먹고 나서 애들하고 나눠 먹어.”
“디저트네요. 레이 씨랑 고르셨어요?”
“…….”
아니, 리세라도 미레이를 애칭으로 부르네?
나는 그 사실에 당황함과 동시에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응? 아닌데? 아빠는 돌아오자마자 세라부터 보고 싶어서 바로 달려온 건데?”
“화내는 거 아니에요. 레이 씨도 아버지 걱정 많이 하셨어요. 힘들어하는 우리들 든든하게 지탱해 주셨고요.”
“……왜 자꾸 미레이를 좋게 말해?”
“미리엘 언니도 레이 씨를 좋아하는데요. 렌시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잘 따라요.”
“하하하하.”
내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하자 리세라가 조용히 물었다.
“결혼 안 하시게요?”
“……무슨 오해인지 몰라도 나는 미레이와 손도 안 잡았다. 내가 걔한테 한 가장 큰 스킨십은 수영장 물에다가 머리 처박게 하는 거였어.”
나는 일반론을 펼쳤다.
“세라야, 지금 아빠한테는 결혼보다 너희들이 더 중요해. 물론…….”
잠깐, 어느새 미레이가 내 딸들하고 서로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해졌잖아?
일반적으로 애 딸린 돌싱이 재혼을 한다면, 자식이 반대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자식이 지지한다면?
부모 마음도 약해질 수밖에.
……미레이, 이것이.
내가 죽도록 일하는 동안 내 자식들을 함락시켰구나!
내가 속으로 이를 가는데, 리세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 결혼 생각 없으세요?”
“……나한테는 너희 어머니들이 있잖니.”
“재혼은 복잡한 문제잖아요. 다들 걱정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정리할 거다. 너희들은 아무 걱정하지 마라.”
리세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메이호 언니는요?”
“응? 메이호는 왜? 걘 무슨 일인데?”
“제국 정부의 사람들이 언니를 압박하고 있어요.”
“……뭐라고?”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물론 리세라에게 화내는 게 아니다.
리세라도 그걸 알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이제 세상에 안 계시니 언니가 황제 해야 한다고, 억지로 시키려고요.”
“……하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이 나오네.
나는 이를 악물고 애써 웃었다.
“그래, 돌아오길 정말, 정말 잘했구나.”
이 미친놈들이.
하다 하다 내 딸에게 야근을 시키려고 하네.
차라리 내가 천년황제 하면서 이놈들 대가리 깨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