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2)
감사합니다
동궁전.
황성의 북쪽이 황후들이 쓰는 곳이라면 북서쪽에는 동궁전이 있다.
바로 내 자식들이 지내는 곳이다.
어린 시절에야 어머니들과 같이 자랐지만 다들 큰 다음에는 저기서 지내게 되어 있다.
지금 리세라도 저기서 먹고 잔다.
나는 변장해서 황성에 잠입했다.
도구도 필요 없다.
초능력 비전.
머릿속의 상념을 꺼내서 영상으로 보여 주는 능력이다.
이걸 응용하면 내 외모도 덮어서 시각적으로 위장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흔해 빠진 아저씨 얼굴이었다.
“왜 굳이 변장하세요?”
내 옆에서 걷는 건 미레이다.
나는 혀를 차고는 물었다.
“너야말로 대체 뭔 재주를 부렸는데 싹 다 프리패스인데?”
황성의 경비부터 시작해서, 미레이를 알아보면 그냥 가타부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완전히 자기 집 안방이야.
미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는데요?”
“……너 혹시 오드벨이라고 아냐?”
“아, 그 막말하는 아저씨요?”
“…….”
오드벨이 아저씨인가?
생각해 보니 그놈은 젊은 청년 축에 속하는 미남자이지만 엘프들의 기준은 또 다르겠지.
미레이는 엘프들 중에서는 어린 축일 테고.
미레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상한 소리만 잔뜩 하고 돌아갔어요. 뭐라더라? 저보고 기풍을 좀 기르라고 하는 거 있죠.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사람 이상하게 보던데요.”
“잘못 들은 거다. 기품이겠지.”
“특관님, 저 엘프거든요? 설마 제가 말을 잘못 듣겠어요?”
미레이는 뾰로통해져서는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도 지나가는 황성의 시녀들에게 손을 흔들어서 인사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다.
시녀들 몇몇은 당황해서, 또 몇몇은 알아보고는 맞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아니, 너 진짜 왜 이렇게 친화력이 좋아?”
“서로 얼굴 보면 인사하는 건 기본이에요, 기본.”
미레이가 나를 한심하게 보았다.
“특관님 예의범절이 부족…… 아야야!?”
“…….”
나는 미레이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미레이 주제에 건방지다!
한데 미레이는 아파하면서도 투정 부리지 않았다.
“안 아프냐?”
“아프지만 참는 건데요. 특관님은 제 상관이시잖아요.”
“……그래, 그건 기억하네.”
나는 혀를 차고는 미레이를 흘겨보았다.
방금 잡아당겨서 아픈지, 미레이는 뺨을 누르고는 걷고 있었다.
예쁘다.
객관적으로 얼굴 하나는 예뻤다.
잠깐, 얘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었지?
너무 황당한 소리라서 넘겼는데.
“……또 꼬집으시려고요?”
미레이는 한숨을 푹 쉬더니, 뺨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고는 눈을 감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왜 베푸는 얼굴이야? 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얼굴로 그러는데?”
“특관님이 혼자 가기 무섭다고 해서 같이 가고 있잖아요.”
“…….”
아니다.
그냥 남들 시선 피해서, 일단 리세라부터 만나보려고 한 건데.
아르센의 조언에 따라서 미레이를 앞세우는 것뿐이다.
한데 미레이는 내가 자식 볼 면목이 없어서 자길 대동한다고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미레이는 가슴을 펴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세라도 특관님 사정을 알면 다 이해해 줄 거예요. 얼마나 슬퍼했다고요. 어제까지는 뭐 먹지도 않았어요.”
“……어, 음. 그래?”
“미리랑 호야가 사정, 사정해서 겨우 수프에 입만 댄 걸요.”
“…….”
음, 가슴이 콕콕 쑤신다.
객관적으로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나는 승천했다가 이제 막 돌아온 거라고.
내 생존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거나, 그런 게 전혀 아닌데.
“아, 진짜.”
아버지가 자식 앞에서 떳떳하기는 힘든 법이구나.
자식이 슬퍼서 쓰러졌다니 그냥 다 내 잘못이고, 다 내가 죄인이다.
내가 한숨을 푹푹 쉬자, 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특관님. 제가 옆에 있잖…… 아야야야?!”
“왜 아까부터 잘난 척이야, 이것아.”
더 꼬집어 줬다.
동궁전.
여기서부터는 미레이도 태도가 달라졌다.
“여기 모퉁이를 돌면 세라의 침실이에요. 그리고, 자요.”
미레이는 들고 온 쇼핑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델러웨이의 슈크림 빵이고요. 하모니의 특제 다쿠아즈, 럭셜의 수제 마카롱이에요. 황도의 유명한 디저트 3종 세트! 이거 주면 좋아할 거예요.”
“……음, 진짜 괜찮을까?”
미레이가 이건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구해 오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반신반의였다.
“아니, 그래도 애가 황녀잖아. 이제까지 못 먹고 자란 게 아닐 텐데?”
“특관님…….”
미레이가 나를 한심하게 보았다.
“싸고 비싸고가 아니라 정성이 문제라고요. 정성이! 그러니까 제가 구해 왔다는 건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 특관님이 어렵게 구매하셨다고 하시는 거예요.”
“으으음.”
“세라도 황녀고, 이깟 거 산처럼 쌓아 놓고 먹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아빠가 딸 생각해서! 이런 거 하나도 모르면서 주변에 물어 가면서까지 힘들게 구해 왔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 시그널! 충분히 전달해 주세요!”
미레이는 마침 좋은 기회라는 듯이 쏘아붙였다.
“오다가 주운 건데 필요 없으면 버리란 소리 같은 거 하지 마시고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내가 그러겠냐?”
“나비 씨에게는 그러신다면서요?”
그게 누구야?
……설마 6황후 나비린 이야기하는 거야?
나는 이젠 입을 떡 벌리고 미레이를 보았다.
나비린은 내 앞에서야 가련한 척을 하지만, 사실은 수단을 방법을 안 가리고 가차 없는 데가 있었다.
그런 나비린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해졌다고?
내가 정치와 군사 활동, 힘을 기르고 칠죄신을 쓰러트릴 방법을 모색하는 동안 얘는 내 가족하고 친목질하고 있었네?
“아셨어요?”
“……어, 그래. 음.”
툭.
미레이는 내 등을 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히 얼굴 드시고요. 이제 수염 떼시고 선글라스랑 모자 벗으시고요. 웃는 얼굴로! 특관님이 뭐 겁먹을 게 있어요? 그냥 얼른 가서 어렵게 돌아왔다고 하면 다 이해 줄 건데요! 세라 착한 애잖아요!”
“……그, 그래.”
내가 비전을 풀자 미레이가 나를 불쌍하게 보았다.
“무서우세요? 진짜로 제가 같이 가드려요?”
“……됐다, 이것아.”
나는 한숨을 쉬고는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그래, 겁먹을 게 뭐가 있냐.
그냥 당당하게 가서 아빠 안 죽었다, 오보였다고 하면 되지.
“고맙다, 레이. 아니, 미레이.”
“아?! 방금 애칭으로 불러놓고 왜 취소하시는데요!?”
미레이가 발을 동동 구르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꾹 눌러 주고는 걸음을 떼었다.
정말 의외지만 도움이 됐고,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줬으니까.
고맙다는 의미로.
모퉁이를 돌아서 고요한 복도.
나는 신중하게, 발소리를 죽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리세라가 지내는 침실의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왔다.
메이드복.
은회색 머리카락.
쫑긋 솟아있는 늑대 귀.
아멜리아였다.
“…….”
나는 즉시 180도를 돌아서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최종 보스가 나오잖아.
이건 아니야.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반사적으로 도주하던 나는 뒤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걸 알고는 멈춰 섰다.
복도로 나온 아멜리아가 움직이는 소리가 안 들린다.
원래 이럴 때 돌아보면 끝장인데.
안 볼 수가 없네.
“…….”
아멜리아는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멍하니.
“……으으음.”
시선에 못 박힌 기분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아멜리아.”
“…….”
아멜리아는 내 얼굴, 그리고 가슴팍을 보다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억누르는데.
손의 틈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당황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도 팽개치고는 아멜리아를 끌어안았다.
“미안, 나 안 죽었고 이제 돌아왔어.”
“…….”
아멜리아는 우는 목소리를 안 내려고 하는지 대꾸도 안 했다.
나는 아멜리아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걸 소리 안 내려고 하는 게 너무 가슴이 먹먹하다.
“괜찮아, 괜찮아. 나 멀쩡해.”
나는 아멜리아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등을 두드리고 어깨를 두드렸다.
안절부절못하면서.
“…….”
아멜리아는 그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우는 소리를 꾹 참았다.
“미안, 미안해. 아무튼 나 리젠이고, 무사히 돌아왔어. 자, 만져 보라니까. 유령이고 뭣도 아니고.”
“…….”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뭐라도 말해 봐.”
“……감사합니다.”
아멜리아가 처음으로 낸 목소리.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문장.
하지만 아멜리아가 양손으로 나를 끌어안아 주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한 걸.
“으, 응.”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애써 고개만 끄덕였다.
아멜리아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끌어안았다.
긴 포옹.
그러고는 나를 놔주고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손을 풀어 주자 아멜리아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친 그녀는 정갈하게 말했다.
“리세라 님을 만나러 오신 거죠?”
“……으음, 일단 애가 쓰러졌다니까 부랴부랴 왔지. 만나서 안심시켜 주려고.”
“지금 황족분들의 사정이 복잡해졌다는 건 알고 계시나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리지?
생각해 보니 내가 시릭의 환생이라는 거, 아멜리아에게 제대로 말할 기회가 없었네.
아멜리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아멜리아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제가 함부로 말씀드릴 게 아닐 것 같아요. 도련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긴한 말씀을 나누세요. 마음이 결정되실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음, 알았어.”
아무래도 애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아멜리아는 보통 내 건강과 식사만 걱정하지, 이렇게 주변 상황에 대해서 거론하질 않았는데.
반대로, 아멜리아가 나서서 먼저 입에 올릴 정도면 좀 사태가 심각하단 의미였다.
아멜리아는 정갈하게 말했다.
“저도 도련님이 무사하시다는 걸 알았으니 됐습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전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으음, 알았어. 내가 다 정리하고 금방 찾아갈게.”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중에 듣자.
나는 좀 망설이면서 물었다.
“……리세라는 좀 어때?”
아멜리아는 붉어진 눈가를 훔치면서 말했다.
“많이 우셨지만 그래도 좀 정신을 차리셨어요. 이제는 웃어 주신답니다. 자매분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요.”
“…….”
더 마음이 찢어지는군.
아멜리아는 내가 떨어트렸던 선물들을 주워서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도련님.”
“응?”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젠 어디 가지 않으시는 거죠?”
절절한 물음이었다.
둥지 밖으로 뛰쳐나갔던 어린 새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돌아온 걸 보면서 안도하면서도 다시 불안해하는 복합적인 마음.
나는 아멜리아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아멜리아랑 앞으로 계속 행복하게 살 거야.”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멜리아는 비로소 활짝 웃었다.
이제 아무런 근심도 없다고.
“그럼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라도 찾아 주세요.”
“용무가 없어도 언제라도 보고 싶어.”
내가 진심으로 말하자 아멜리아는 뺨을 붉히면서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허리를 한 번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나 혼자.
아멜리아가 남긴 말, 뭔가 문제가 있단 투였는데.
직접 들어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삐걱.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 그래도 다 큰 딸인데 들어가기 전에 노크도 안 했네.
“…….”
리세라의 침실.
리세라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 의자를 두고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라야.”
“…….”
“아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