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74)
부부간담회
나는 암살여왕의 호위로 따라온 다크엘프들을 살폈다.
암살여왕을 설득해 보겠다는 알베르트가 죽었다는 정보는 안 들어왔다.
하인켈, 오르카의 정보망이 막혔다고 해도 상무씩이나 되는 인물이 처형당하면 알게 된다.
즉, 알베르트의 간언은 받아들여졌다.
암살여왕이 방침을 수정했다고 봐야 하는데…….
“그냥 부하만 보내도 되셨을 텐데?”
이 수사본부에 순수하게 힘을 실어 줄 의도였다면 암살여왕이 직접 행차할 이유가 없다.
내 질문에 암살여왕은 차게 웃었다.
“아, 수사 지휘권을 넘볼 생각은 아니니 견제할 필요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제공하고, 또 특관 리젠을 보좌하는 걸로 만족할 테니까. 공을 다툴 생각으로 참여한 것이 결코 아니다.”
“도와주신다니 감사하죠.”
딴 속셈이 있다고 해도 다크엘프의 정보력은 필요하다.
또 나도 암살여왕을 만나서 결판을 낼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접근할 수 없었는데.
자기가 와 주면 나쁠 거 없다.
내가 수락하자 호위로 따라온 다크엘프가 의자를 가져왔다.
나와 나란히, 상좌에 앉은 이셀렌이 설명했다.
“이 자리에 모인 귀관들을 치하하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어울릴 테니 생략하고, 바로 들어가지. 테러범들, 제국해방군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활동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된 겁니까?”
내가 물었다.
설마 내가 통치하던 시기에도 이들이 암약하고 있었나?
이셀렌이 알면서도 황제인 나에게 감췄을 가능성, 있다.
이셀렌은 냉담하게 말했다.
“이번에 족적이 드러난 이들, 사도들은 약 80년 전부터 목격되었다. 그리고 제국해방군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인 건 약 30년 전부터다. 인간이 어린 시절에 접근하여 사상을 주입하고 끌어들이는 방식이지.”
“80년…….”
“30년인 겁니까.”
수사원들 중에서 인간이 새삼 어이없어했다.
너무 긴 시간이니까.
이셀렌이 좌중을 보며 설명했다.
“새삼스럽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건 극비 정보다. 돌아가서 자기 조직에 밝히는 일은 금한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무시하는 녀석이야 있겠다만…….”
이셀렌은 말끝을 애매하게 흐리면서 좌중을 쓱 둘러보았다.
다들 움찔했다.
요염한 미녀이기는 하나 암살여왕이라 불리니까.
그녀가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대상은 어느 순간 의문의 죽음을 맞거나 실종된다.
경고를 새겨 둔 이셀렌이 말했다.
“테러범들이 갖은 소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핵심, 우두머리는 사도다. 지금까지 추정으로는 최소한 셋 이상이 있는 걸로 파악하고 있다.”
“그 사도만 검거하면 된다는 겁니까?”
사도.
비요른의 몸을 마음대로 조종했던 디에르크라는 자.
직접 봤던 중앙경찰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이셀렌이 코웃음을 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너는 이미 봤을 텐데?”
“…….”
이야, 진짜 나를 어지간히 싫어하네?
나는 어이도 없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셀렌이 남들 앞에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낼 여자가 아니라서.
정작 이셀렌은 내가 무시한다고 여겼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 철도 테러 사건의 마지막에 보지 않았나?”
“……그 오크가 사도였다고?”
오르카를 죽이려고 덤벼들었던 놈.
하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았는데?
이셀렌은 살짝 턱을 끄덕였다.
“본래 그 현장은 사도를 잡아서 제거하기 위한 덫이었다. 얼간이가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어서 망쳤지만.”
“자기 아들 미끼로 투척한 재주가 자랑스러우신가 봐요?”
적막.
순간 다들 놀라서 나와 이셀렌을 번갈아 보았다.
아, 나도 좀 실수했단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 사건에 내 아들, 오르카를 내몬 건 나도 참기 힘드니까.
이셀렌은 잠깐 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눈길을 거뒀다.
“다소 관련 없는 이야기였군. 취소하마.”
“저도 실례했습니다.”
제국군, 경찰 할 것 없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 달라졌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으로.
암살여왕에게 저렇게 덤비고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건가 싶어서.
내가 물었다.
“그럼 테러범, 사도의 목적은 뭡니까? 제국을 무너트리려고 한다는 건 알겠고, 실행 방법 말입니다.”
“황자와 황녀들을 노리고 있다. 성공하면 제국에 큰 혼란을 불러올 테니까.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건…….”
암살여왕은 잠깐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2대 황제를 뽑기 위해서 12가문이 한자리에 모이는 상황, 즉 원탁회의를 파괴하는 거다.”
“…….”
다들 술렁거렸다.
암살여왕은 차갑게 말했다.
“귀관들도 알겠지만 원탁회의는 100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제국민은 이번에야말로 2대 황제가 나올지 기대하면서 지켜보았다. 번번하게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올해는 다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제국력 48년, 72년, 111년 때 특히 기대감이 높아졌었고.”
“…….”
“비록 케드릭이 이번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 입장이라고 해도 올해 원탁회의는 취소되지 않는다. 아니, 취소할 수가 없다. 그건…….”
암살여왕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황제가 사라지고 제국을 지탱해 온 근간이니까.”
제국군, 경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들이 제국을 나눠서 통치한다고는 하나 임시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원탁회의에서 2대 황제가 선출된다면 새로운 체제가 설립되리라.
다음 시대가 열린다.
제국민들은 그 기대감을 품고 매년 원탁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100년 내내 결과가 없었으니 제국민들도 실망하고 지쳐 가고 있다. 특히 테러범들에게 협력하는 인간들의 대의명분이 그러하지. 우리 이종족들, 황후들은 2대 황제를 선출할 생각이 없고 시일을 끌고 있을 뿐이라고.”
“…….”
“믿지 아니하겠지만 적어도 난 그럴 마음이 없다. 정말로 훌륭한 황제라면 어찌 그를 추대하지 않을까? 하지만 12가문 사이에서 단 한 차례도 결론이 난 적이 없다. 설사 나더라도 그가 과연 초대 황제를 이을 재목일까?”
갑자기 이야기가 빠지네?
수사 정보에서 2대 황제 이야기로 빠지자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암살여왕이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미소를 띠었다.
아름다운 입술이 요염하게도 웃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안이 너무 급박하다. 나는 이번 원탁회의에서 반드시 2대 황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99년을 기다렸으니까. 시국이 하도 급박하니까.”
“잠깐.”
“이 테러 사건을 해결하는 이가 2대 황제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폭탄선언.
수사본부의 간부들이 놀라서 나를 본다.
제국군들이 특히 더 굳은 표정들이고.
……나를 2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가로 오인하는 것이다.
“하하하.”
나는 일단 웃었다.
사실 한 방 먹었지만 길게 웃으면서 얼른 방책을 생각했다.
암살여왕은 당연히 좋은 의도로 수사 협력을 자처한 게 아니었다.
교묘한 선동으로 나를 고립시키고, 무너트릴 작정이다.
내가 기껏 모은 수사본부, 각자 다른 단체원들이 이제 하나가 되려는 차에 갑자기 2대 황제 운운한다?
테러범을 잡아서 자식과 제국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내 진의가 왜곡된다.
거기다가 이 자리의 제국군 대표는 12가문, 사지타리의 일원들이다.
황후가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면 그들은 나를 의식하고 견제할 수밖에.
이러면 합동 수사가 되겠냐?
아, 좋아. 이렇게 나오면 나도 받아쳐 주지!
“그러는 암살여왕께서는 왜 암살여제가 될 생각을 안 하십니까?”
“……뭐라고?”
이셀렌의 차가운 미모가 일그러졌다.
암살여왕이 대중적으로 통하는 호칭이기는 하나 당사자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불량하게 턱을 괴고는 돌아보면서 쏘아붙였다.
“잠정적으로 쥐고 있는 권력을 영구히 쥐고 싶단 생각 정도는 해 보셨을 텐데요?”
“……어린 인간, 지금 말 다 했나?”
“아뇨.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일단 계속 들어 보실라우, 나이 먹은 다크엘프?”
……음, 내가 시릭이라는 걸 몰라서 다행이야.
이셀렌은 내가 나이 이야기 하면 진짜 상처받거든.
부부 싸움을 파탄 내는 필승 카드 중 하나였지.
“…….”
암살여왕은 냉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 판을 망치려고 나타나셨어?
그럼 나는 너를 이용해서 여길 내 판으로 굳혀 주마.
작정한 나는 몰아쳤다.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다크엘프들은 최소한 수십 년은 제국해방군을 탐지했는데 그 어떤 행동도 안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더욱이 철도헌병대와 경찰, 제국군,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고요.”
“막으려고 했다.”
“오오, 지금 수십 년째 무능했다고 고백하셨네요? 다음 무능하신 분?”
“…….”
암살여왕의 턱이 덜덜 떨렸다.
분노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참고 악무느라.
사실 나도 이런 반응이 좀 신기하긴 했다.
본래 암살여왕은 남들 앞에서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나, 시릭하고 단둘이 있을 때만 드러냈지.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지금의 나, 리젠 리브라타에게는 굉장히 적대감을 표출하고 감정적으로 굴고 있었다.
나는 정리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다크엘프들이 결국 막지 못해서 연쇄 테러 사건이 터지고 우리가 다들 해결하려고 모인 거잖아요? 사실 지금 고압적으로 구실 처지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백배사죄하고 전면 협력해도 모자란 판 아닌가?”
“험, 험…….”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너무 몰아친다고, 판 깨지기 전에 그만하라는 제지겠지만.
아, 하지만 나도 이셀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나와 갈라서게 된 일, 오르카의 일을 뒤로 미루고 생각해도 그렇지.
겨우 테러를 막아 보겠다고 모았는데, 개인감정으로 판을 망치려고 들잖아?
이런 여자가 절대 아니었는데 이러네.
나는 새삼 좌중을 둘러보았다.
“뭐 이렇게까지 보여 드렸으면 다들 아실 겁니다. 제가 2대 황제가 욕심났다면 암살여제라는 분에게 이리도 세게 나가겠습니까? 난 이제 오늘, 내일 언제 죽을지 걱정해야겠는데?”
“으으음.”
제국군, 다르갈 사지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암살여왕을 돌아보고는 가볍게 윙크해 보였다.
“아, 혹시나 제가 그런 오해를 살까 봐 미리 이야기를 꺼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황제 되려고 이 짓 하는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군요! 아~주 감사합니다!”
“…….”
암살여왕은 무표정하게 나를 보았다.
새어 나오려는 격정을 억누르고.
“……그래, 그러하군. 네가 어떤 사심도 없이 이 업무에 착수하고 있다는 건 확인했다.”
내가 비아냥으로 던진 말을 암살여왕은 모르는 척 받았다.
2대 황제라는 폭탄으로 수사본부를 흔들고 나를 몰아치려던 게 실패했다는 걸 바로 인정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자, 그럼 일 이야기를 할까요?”
테러 단체의 규모, 단서, 그리고 업무 분할.
앞으로 보충할 수사원들.
암살여왕은 상세하게 말하고는 끝맺었다.
“마지막으로 사도, 디에르크의 위치 추정이다. 사도들은 황도 안에서 일정한 지원을 받으면서 은거하는 걸로 추정된다. 디에르크의 경우에는…….”
암살여왕은 뜸을 들였다.
“테오도라에서 운영하는 불법 카지노에서 은신하고는 있는 걸로 추정된다.”
“테오도라라면 질 나쁜 놈들이 모인 폭력 조직 아닙니까?”
중앙경찰, 루온이 의아해했다.
다른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면 건수라도 만들어서 모조리 엮어 넣을까요? 워낙 구린 놈들이라서요. 검찰 애들도 협조해 줄 겁니다.”
“대놓고 경찰 병력 끌고 들어가면 도망가겠지. 우리 목적은 테오도라가 아니라 거기 숨어 있는 사도 하나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테오도라의 두목 놈을 을러대서 정보를 얻는 수밖에 없겠군요?”
“놈을 밖으로 불러낼 순 없다. 불러낸다면 디에르크가 알아차리니까. 어디까지나 소수 병력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얻어 낸 다음에 급습한다.”
암살여왕은 그리 말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잠입은 총지휘관인 특관께서 해 주셨으면 한다만?”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범인을 현장에서 잡겠다고 일선에서 뛰는 수사본부장이 있나?
물론 나는 황제 시절에도 자주 그랬지만 보통 뜯어말렸다.
하지만 암살여왕은 매혹적으로 웃었다.
“테오도라의 두목을 설득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또 사도 디에르크가 튀어나온다면 처리하는 것도 아주 큰 문제지. 비요른 청장의 목을 날려 버린 그 솜씨를 다시 발휘할 때 아닌가?”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중앙경찰을 거의 내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이걸 또 재를 뿌리려고 하네.
논리적으로 틀린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암살여왕이 주는 이 정보, 그대로 받으면 바보다.
가짜 정보는 아니겠지만 굉장히 위험할 것이다.
“내 솜씨가 궁금하시다면 따라오시죠?”
“…….”
“카지노에 잠입하는데 남자 혼자 가면 뭣하잖아요? 눈에 띄는 미인 허리라도 끌어안고 가면 아주 프리패스 아니겠어?”
좌중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들 자기 조직에서 한가락 하는 이들만 나온지라, 나와 암살여왕이 시작부터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군, 멍군 하고 있다는 걸.
암살여왕은 나에게만 보이게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를 보는 게 소원이라면 같이 가 주지.”
“아이고, 제가 살다 살다 여왕님 허리도 안아 보게 되겠네요?”
“…….”
암살여왕의 눈길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나도 안 봐준다, 이것아.
남편이 돌아와서 일 좀 하겠다는데 어디서 토를 달아.
한번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