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1)
돌아오고 보니
빛.
빛이 있었다.
“으허어엉! 흐어어어엉! 폐하! 폐하!!”
“…….”
아, 귀 따가워.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산 만한 덩치가 보였다.
“어찌 저를 버리고 가십니까! 폐하아아! 폐하아아!!”
마족 남자 놈이 주저앉아서 서럽게도 울고 있었다.
익숙한 방.
철도헌병대 중앙본부 대장실이다.
우는 놈의 앞, 벽에 걸린 건 족자.
나, 리젠 리브라타가 그려져 있었다.
제대로 된 화가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그린 게 아니라, 적당히 내 이목구비의 특징만 잡아서 급하게 그린 거다.
“폐하아아아!!”
“아, 시끄러워. 아르센.”
“…….”
뚝.
질질 짜던 놈이 움찔 굳어 버렸다.
놈은 슬그머니 옆으로 손을 뻗어서는 검을 잡았다.
지켜보던 나는 어쩌나 싶어서 그냥 놔뒀다.
창!
아르센은 날렵하게 돌아 일어나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마력검을 발휘해서 나를 겨누는 솜씨가 날랬다.
하긴, 이놈도 폼으로 철도헌병대의 톱을 먹은 건 아니지.
아르센이 이를 악물고는 나를 노려본다.
“……귀, 귀신이냐, 사람이냐!!”
“너한테 월급 주는 사장님이다, 이놈아.”
나는 신발을 벗어서 놈의 머리에 던져 버렸다.
아르센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려다가 얼른 머리를 숙여서 피했다.
얼굴에는 반신반의.
정말 내가 맞다면 내 물건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겠지.
아르센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폐, 폐하? 리젠 폐하…… 가 맞으십니까?”
“시릭 카라카스이자 리젠 리브라타가 맞다. 야, 우리 예전에도 이러지 않았냐? 내가 새삼스럽게 또 이래야 해?”
“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아르센은 쭈뼛거리면서 검을 내렸다.
내가 진짜인지, 혹은 칠죄신의 수작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나도 죽을 줄 알았는데 용케 아직 안 죽었다. 너야말로 내가 어떻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폐하께서 칠죄신을 쓰러트리고 승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구체적으로는 빛무리에 휩싸여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군요.”
“그거 공식 발표는 아니지?”
“예?”
“리젠 리브라타의 전사가 아직 공식 발표된 건 아니지?”
아르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추가로 물었다.
“칠죄신과의 최종 결전에서 시간은 얼마나 지났고?”
“오, 오늘로 열흘입니다. 하지만 이미 폐하의 전사 소식은 은근히 퍼지고 있습니다. 제국 정부와 황실은 입장을 유보하고 있지만 곧 발표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아, 돌겠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제국군이 보는 앞에서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언론 통제는 불가능하지.
갑자기 내가 사라졌다니 또 황좌의 공백, 다시 야심가들이 준동하고 있을 테고.
전후 처리도 아주 복잡하고, 태산 같을 거다.
아, 돌아오니까 또 일감이 가득 쌓여 있어.
이제 정치와 군사, 경제 재정비해야 해?
또? 내가? 또?
아르센이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폐하, 살아계신 게 맞죠?”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죽은 척할까? 생각해 보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예?”
“한 1년 정도 죽은 척하면 애들이 알아서 다음 황제 뽑고 하지 않을까? 내가 그때쯤 사실 살아 있었다고 슬그머니 돌아가면 될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쯤이면 그냥 내가 적당히 선황제로 눌러앉아서 애들 재롱 보고 사는 거지. 이거 완벽한 계획 아니냐?”
“……폐하, 황실에서 다음 황제를 내놓긴 하겠습니까? 100년이나 없었는데요?”
“아, 그러네. 생각해 보니 출진 전에 유언장을 써 놓고 왔어야 됐는데. 젠장.”
아르센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무작정 황제를 뽑는다고 황실이며, 신하들이 따르겠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제 칠죄신이 완전히 사라졌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어찌 폐하가 자리를 비우려고 하십니까?”
“…….”
“폐하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따르겠지만 저는 그것만큼은 협조할 수 없습니다.”
아르센이 단호하게 말하자 나는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지금 당장 황실로 달려가서 내 생존 사실을 알리겠다고?”
“폐하, 황후분들이 어찌나 상심하신지 모르십니까?”
“그야 모르지. 나 지금 막 돌아왔다.”
“리세라 황녀님이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어질하고 핏기가 싹 가시는 게 나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아르센이 힘주어 말했다.
“폐하가 전사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리세라 황녀님이 쓰러지셨다는 소문은 이미 시중에 다 퍼져있습니다.”
“아, 아니. 야. 그게 왜 퍼져? 당연히 통제 들어가야지.”
“황도의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소식을 듣고 그리되셨으니까요.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르센이 강하게 말했다.
이래도 황제 관둘 거냐고.
나는 이마를 누르고는 의심스럽게 보았다.
“너 지금 나 속이는 거 아니냐?”
“제가 어찌 그런 불충을 저지르겠습니까?”
“아니, 내가 자식 일에 끔뻑 죽는 거 너도 아니까. 그런 거짓말로 날 꾀려고 하는 거 아닐까? 당연히 의심할 수순이잖아?”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황성으로 달려가서 리세라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한편으로는 이게 지금 아르센이 급하게 꾸며 낸 거짓말 아닌가 싶다.
“제국군은 아직 황도로 안 돌아왔지? 하긴 거기서 사후 수습하는데 엄청 시간이 걸릴 테니까.”
“랑에이 전하께서 앞장서서 정리 중이라고 합니다. 다만 진척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엔라는 반란군의 수장이었으니까. 아, 젠장. 원래 그런 일은 엔라가 잘하는데 내가 없으니까 맡길 수가 없네.”
엔라는 본래 재판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제국군의 총지휘관인 내가 일시적으로 면책해서, 군대 지휘를 맡긴 거고.
그 내가 사라졌으니 엔라도 지휘권을 내려놓고 죄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레릭 혼자서는 힘에 부치고.
“……내가 없으니 일이 안 돌아가네. 아, 짜증나.”
“…….”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군대를 추스르는 빽빽한 일정.
지금 엔라가 누구보다도 잘할 텐데, 그걸 허락할 수 있는 게 세상에 나밖에 없잖는가.
내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고 있자 아르센이 전전긍긍하면서 눈치만 살폈다.
내가 복귀하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여기서 그냥 나가 버리면 어쩔 건데? 그냥 나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게 신하된 도리 아니냐?”
“폐하, 신하의 도리로서는 폐하가 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는…….”
“너도 유부남이면 내 마음 알잖아. 아버지도 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는 쏘아붙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르센의 말이 옳다.
리세라가 쓰러졌다면,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
아니, 생각해 보니 메이호나 오르카, 다른 애들도 날 걱정할 거다.
거기다가 아멜리아는?
하나, 하나 떠올리니 가슴이 콱 메어 온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러면 최소한 가족들에게만 내 생존을 알리도록 하자. 문제는 오드벨인데…….”
벌컥.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제국 헌병대의 정점, 헌병대장 아르센의 집무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다고?
너무 예상 밖이라서 나도 대비를 못 했다.
안으로 들어온 건 손에 선물 상자를 든 엘프였다.
제복을 입은 미레이.
“대장님, 이거 드시고 그만 우시…… 특관님!”
탕!
나는 염동력으로 대장실 문을 닫아 버렸다.
미레이가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보았다.
나는 아르센에게 눈을 흘겼다.
“야, 쟤가 여길 왜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어? 뭔데?”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저와 미레이 이관은 어떤 사적인 관계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가끔 불러서 폐하를 잘 모시라고 말을 건넸을 뿐입니다.”
“잘 모신 게 이거야? 나 고혈압으로 죽이려고?”
“으음, 폐하도 사실 귀여워하시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댔다.
“미레이 이관이 좀 모자란 데가 있지만 애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까? 폐하가 좋아하시는 타입이죠.”
“좀이 아니라 굉장히 모자라거든. 철도헌병대도 주기적으로 자격 검증 시험 같은 거 치러야 하지 않나?”
“특관니이이이임!!”
손에 들고 온 상자도 팽개친 미레이가 점프.
양팔을 벌리고는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러자 나는 손으로 미레이의 얼굴을 잡아서 막아 버렸다.
이대로라면 떨어지니까, 미레이의 얼굴을 잡고 살짝 띄워 올린 다음에 어깨를 잡아서 캐치.
“…….”
아르센이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보았다.
얼굴 예쁜 애를 너무 험하게 다룬다고?
미레이는 이래도 돼.
“으아아앙!! 걱정했잖아요! 무사하셨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미레이는 펑펑 울면서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아무래도 나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어깨를 좌우로 흔들어서 싹 다 피해 버렸다.
“다들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특히 세라가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어요! 얼른 가 보셔야죠!! 예?”
미레이가 눈물을 쏟으면서 하소연하자 나는 녀석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아르센의 말은 나를 회유하려는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황성에 누가 있지? 리세라와 메이호, 미리엘이 끝인가?”
“오르카 황자님이 돌아와 계실 겁니다.”
“으음.”
나는 생각하고는 머리를 굴렸다.
“아르센, 지금 법원하고 제국 정부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 내부 여론이 어떻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후계자 자리까지 섣불리 말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래도 전후 처리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올 거 아냐. 가령…….”
나는 말끝을 흐렸다.
“엔라의 처벌이나, 다시 돌아온 하시아의 행적에 대한 논의 말이지.”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폐하께서 불호령 한 번 내리시면 될 일 아닙니까.”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지.”
내가 눈치를 주자 아르센은 그제야 알아챘다.
“아, 여론 조성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오드벨 재상에게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젠장.”
“예? 왜 그러십니까? 폐하의 생존 사실은 일단 숨기고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드벨은 네가 그러기만 해도 눈치를 챌 거다. 네가 뭔가를 쥐었다고, 내가 사실 살아 있었다는 것까지 알아차려 버릴걸.”
“……그렇습니까?”
“그런 놈이야.”
나는 생각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그냥 말해. 혹시 놈이 눈치챈 것 같으면 내 명령이니까 시킨 일만 하고 선 넘지 말라고 해.”
“예.”
“특관님? 왜 굳이 그러시는데요?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되시잖아요.”
미레이가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도 물었다.
펑펑 울긴 우는데 평소처럼 물어보는 것도 재주는 재주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 가족이라고 해도 이건 나랏일이다. 내 마음대로 용서해 주면 국가 기강이 어떻게 되겠냐?”
“하지만 나쁜 신하고 다들 함께 싸웠잖아요. 특별히 용서해 주면 되잖아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더라도 과정을 거쳐야 해. 남들이 납득하게 만드는 과정이…….”
자기가 물어봐 놓고 미레이는 팽개쳤던 상자를 잡아 들었다.
상자 안을 살핀 미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어렵게 산 건데요…….”
어깨를 축 늘어트린 미레이가 내게 상자를 안겨 주었다.
얼결에 받은 내가 내용물을 살피니…… 생크림 케이크가 볼썽사납게 찌그러져 있었다.
“특관님이 가지세요.”
“멀쩡한 걸 줘도 안 먹는데 박살 난 걸 주냐?”
“무슨 소리세요? 세라가 얼마나 울었는데요.”
“…………어?”
“세라랑 미리랑, 호야가 엄청 울었는데요. 저도 달래 주느라고 힘들었어요.”
나는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아, 아니. 너는 뭔데 내 딸들하고 그렇게 잘 어울려? 뭔데? 왜 니가 천연덕스럽게 우리 집 식구처럼 끼어들어서 위로해 주고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하세요?”
“…….”
미레이가 한 말인데 너무 정상적이다.
내가 얼어붙어 있자 미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도 특관님 무사하신 거 보고 놀랐는데요. 그러니까 그거 드리고 미안하다고 하세요.”
“…….”
“괜찮아요, 여자는 다들 디저트를 좋아하니까.”
나는 내 손에 들린 찌그러진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에 리세라가 기절했다고?
“아르센.”
“예, 폐하.”
“……시내의 유명한 제과점 좀 알아봐라.”
큰일 났다.
아빠가 사실 살아 있었다고 고백하는 거.
생각보다 힘들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