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90화 (18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90)

기적이란

새하얀 공간.

나는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여기 오는 것도 3번째인데…….”

눈앞에 보이는 건 남자.

꽉 짜인 몸, 남자다운 얼굴.

바로 나, 시릭 카라카스가 앉아 있었다.

“내 얼굴이 좀 괜찮긴 하지. 그렇다고 표절하진 마라. 할 거면 저작권료 내 놔.”

―너는 죽었다, 황제.

“알고 있어. 이제 뭐 하면 되냐?”

시릭의 얼굴을 한 상대, 내 마음의 불안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살고 싶다거나, 돌려보내달라고는 안 하나?

“할 일 다 하고 죽었으면 됐지.”

나는 앉은 채로 무릎을 쳤다.

“가족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놈의 칠죄신도 끝장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정말이냐? 아직 할 일이 태산처럼 남았을 텐데?

“아, 됐어. 돌아가면 오드벨이 어마어마한 일거리를 안겨 줄 거다. 나 보고 또 일하라고? 나, 이제 죽었고 은퇴할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다 끝났다! 난 쉴 거다!”

―애들 결혼식은 가야지.

“…….”

이 새끼가.

나는 순간 고개를 기울여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지만 재수가 없네!

시릭의 얼굴을 한 놈이 씩 웃었다.

―딸아이의 결혼식에 아버지가 손잡아 줘야지. 설마 빼놓을 거야?

“너 지금 뭐랬어? 누가 결혼을 해? 내 허락도 안 받고 뭐가 어쩌고 어째!!”

말하다 보니 열 받네!

목이 터져라 쩌렁쩌렁하게 외친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생각만 해도 빡치네!

그러자 마주 앉은 상대 역시 턱을 괴고는 실실 웃었다.

―뭘 그렇게 화를 내? 애들도 다 컸는데. 그러고 보니 너 장녀랑 막내딸은 만나지도 않고 죽었지?

“……으, 음. 음.”

순간 나는 입을 덮고는 신음만 흘렸다.

갑자기 속이 콕콕 찔린다.

“……아니, 뭐야. 이거.”

―음? 뭐가?

“너 뭐야?”

나는 정색하고는 바라보았다.

“너 정말로 내 마음의 불안이 형상화된 게 맞냐?”

―…….

가만히 생각하니 이상하다.

처음에 이놈을 만났을 때, 나는 그렇게 파악하고는 몰아붙였다.

하지만 2번, 3번을 만나고.

또 지금 대화를 보면 뭔가 이상했다.

“내가 이제 와서 뭐가 불안한 거지? 아니, 이거…… 정신 오염이잖아? 전에는 꿈에서 만났지? 그게 어떻게 된 거야? 자각몽? 난 일반적인 사람도 아닌 초능력자고 기본적인 정신 방어 능력이 뛰어난데? 너 그때도 얼버무렸지?”

―…….

“너는 내 기억과 감정, 인격을 토대로 만들어 낸 뭔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누가 만들었지?”

처음에는 당연히 나, 이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듭 만나고 있자니 수상쩍다.

시릭의 모습을 한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속이 좀 찔려?

“……누구냐?”

―당신이 버리고 찾지도 않은 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내가 그런 끔찍한 일을 했단 말인가?

나는 망연하게 상대를 보다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어, 으. 음. 호, 혹시…….”

―이름도 모르잖아.

“……아니, 저기 좀 미안한데 얼굴 좀 보여 줄 수 없겠니?

―싫어.

상대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포즈만 보면 심통이 난 가련한 소녀지만 모습은 외형은 전생의 나다.

단단하고 각진 사내놈이 어린애처럼 뺨에 공기를 넣고 있으니 정말 보기 싫군!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스승님의 딸이니?”

―……당신 딸은 아니라 이거야?

“아, 아냐! 그게 아니라, 아니, 이게…….

내 모습을 흉내 낸 상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처음 열반에 들었을 때는 정말로 당신의 불안이 맞았어. 하지만 두 번째, 지금은 내가 하는 거야. 나는 차원의 가장자리, 계면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어서 물질계로 나오지 못해. 그러니까 의식이 부유하는 꿈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만나러 온 거야.

“……어. 응.”

―그래서 당신, 승천할 거야?

내 딸아이가 나직하게 물었다.

비록 모습은 나지만, 목소리의 저변에 불안과 불만이 가득했다.

나는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어, 저기 정말로 미안한데. 이름이 뭐지?”

―아직 없어. 엄마가 당신하고 의논해서 지어야 한대.

“…….”

하시아.

대체 어쩌자고 그런 거야…….

나는 눈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아직 이름도 없다면, 애가 나한테 화낼 만하다.

―당신 기억을 좀 들여다봤어. 오해하지 마. 나도 당신을 알고 싶어서 안 게 아니거든. 단지 이렇게 의식만으로 만나면 강제적으로 어느 정도는 알게 돼.

“아니, 난 너를 바로 못 알아봤는데.”

―…….

치이이익.

갑자기 시릭의 그림자가 흐릿해지더니만 불분명한 실루엣으로 변해 버렸다.

아직 잘 모르는 자식이지만 화났다는 건 바로 알겠다.

“아, 미안하다. 지금은 말실수다. 네가 그러니까…….”

―텔레파시.

“……그, 그래. 텔레파시에 아주 뛰어나서 내 생각과 기억까지 읽나 보구나.”

극에 달한 텔레파시는 상대의 기억까지 읽어 내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나도, 스승님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그랬지.

초능력자인 우리 두 사람의 딸은, 태어날 때부터 초능력자라고.

태아 상태에서도 하시아에게 말했다고.

“…….”

그러면 역사상 최강의 초능력자 아닌가?

카라카스와 근접하지만 다른 차원에 머무르는 아이가 의식만으로 나에게 이렇게 접촉하다니.

대단한 재능이다.

―……왜 혼자 웃어?

“아, 아니. 음. 자, 잘 자랐구나 싶어서?”

―다른 아이들은 그런 소리 하면 좋아했나 보다. 그래서 똑같이 말하는 거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으면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좀 전까지 100만이 넘는 군대를 호령하면서 사악한 신까지 말살해 버린 제국 제일의 영웅이지만.

지금은 그저 딸아이 앞에서 고개 숙인 죄인이옵니다.

아버지는 슬프구나.

―엄마 미워해?

“아, 아니. 아니지. 스승님을 내가 어찌 원망하고 미워할까? 그 사람이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다는 마음만 가득하지, 내가 어찌 감히 그분을 미워하고…….”

―엄마는 당신이 그러는 게 섭섭하다는데?

“…….”

이거 그거 아니야?

헤어진 애인이 사실 내 자식을 데리고 있었고, 얼굴도 모르는 친자식과 만나서 어색해지는 그거.

내가 왜 이런 걸 겪어야 하지.

“……방금 말은 취소하마. 하시아의 덜 떨어진 생활력에 대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동감. 너무 대강대강이지?

“으음.”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튼 딸아. 그게…… 지금 어디에 있니?”

―잘 있어.

“……아니, 음, 만나고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할 일 다 했다면서?

아, 죄책감 느껴.

애가 단단히 토라졌네.

딸아이가 꼭 사 달라고 부탁한 선물 잊어버리고 집에 돌아온 기분이야.

―엄마가 내가 있다고 말한 것도 잊어버렸지?

“아, 아니야. 잊어버릴 리가 있…….”

나는 한숨을 쉬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아빠가 너무 정신이 없었다. 진짜 면목이 없다.”

칠죄신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고.

불분명한 실루엣 상태인 딸아이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100년 동안 잊어버렸으니까.

“……아니, 음.”

―가족들 다 슬퍼할 걸 알면서도 아빠는 또 윤회전생을 하려고 하잖아. 가, 얼른 가 버려.

“아니, 세상의 법칙이라는 게…….”

말하던 나는 멈칫했다.

“혹시 내가 정신 오염에서 그럭저럭 버틴 거, 네가 도와줬었냐? 원탁결전에서 싸우고 무사했던 것도?”

―…….

“네가 이렇게 해 주려고 나에게 정신 오염에 대해서 넌지시 말했던 거고?”

나는 절망이나 좌절 같은 감정은 흡수해도 뒤탈이 없다.

하지만 방금, 신검 천지신명을 다루면서 느낀 건…… 결국 나도 정신 오염에 면역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데 무사히 깨어났다.

기적? 그럴 리가.

이유가 있었다.

―맞아, 내가 당신이 잠든 사이에 오염되는 걸 막았어. 나는 흑마력을 걷어 내는 것도 할 줄 알거든.

“고맙다.”

―오해하지 마, 당신을 위해서 한 게 아니니까.

딸아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을 엄마랑 꼭 만나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엄마는 이거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

그야 그렇겠지.

나와 하시아의 딸아이는 굉장히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초능력은 양날의 검, 더욱이 타인의 정신과 접촉하면 더 위험해진다.

나라도 막았을 거다.

“고맙다, 하지만 아빠를 위해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안 했으면 당신 영혼이 잠들어서 다시 윤회전생을 거치게 됐을걸? 그래도 좋아?

사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좀 전까지는.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절실한 사명이 생겼다.

이 아이를 만나야겠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니?”

―지금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신의 반열에 올랐어. 신명으로 거듭난 거지. 칠죄신이 사라진 카라카스에 군림하는 제황신, 칠죄신이 세상을 포악하게 지배한다면 제황신은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신이지.

“…….”

―아, 제황신이라는 이름은 내가 임시로 붙인 거야. 황제신은 발음이 별로라서.

딸아이가 되바라지게 말했다.

―방법은 간단해. 당신이 신의 사명, 신명을 포기하면 돼. 다만…….

“응, 포기하련다.”

―……정말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황제신이라는 거, 결국 나보고 영원히 윤회전생하면서 문제 생길 때마다 재림해서 해결해 달라는 거 아냐? 이제 지겹다. 할 만큼 해 줬잖아.”

―황제신이 아니라 제황신.

“아무튼……”

―제황신이라니까.

딸아이가 뾰족한 목소리로 주장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웃으면 토라질 것 같아.

딸아이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여하튼 당신 대신에 신검을 놔주면 돼. 신검 천지신명, 이 세상을 수호하는 검이니까. 물론 당신이 신명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은퇴한 신 정도로 취급되고, 여차하면 다시 검을 쥐고 신이 되어야겠지.

“그러니까 일단 신검을 내려놓으라는 건가?”

―그렇게 해라, 시릭.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에 어느새 신검, 천지신명이 쥐여져 있었다.

전우가 말했다.

―나는 사악한 신을 물리치는 사명을 다했다. 이제 좀 쉬면서 다음 사명을 기다리겠다.

“으음.”

―신경 쓰지 마라. 너와 함께한 여행도 이제 끝날 때가 온 거지. 나는 이제 슬슬 다시 잠들 때가 온 거고.

신검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금 환란이 닥치면 그때 서로 만나면 된다.

“……그래.”

담백한 말이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칠성칠요 시절부터, 이 녀석은 일관되게 이랬다.

우리는 사명을 함께하는 전우고, 그게 끝나면 헤어져야 한다고.

그게 지금이었다.

“고마웠다, 칠성.”

―나도 고맙다, 친구여.

스르륵.

신검은 나타났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딸아이의 실루엣이 말했다.

―이제 됐어, 돌아가.

“그러니까 난 죽은 게 아닌가?”

―당신은 너무 많은 정신력을 받아들여서 소화불량, 거기다가 신명의 반열에 올라 천상의 부름을 받은 거지. 하지만 정신 오염은 내가 정리했고, 신은 은퇴했잖아.

딸아이는 문득 짓궂게 웃었다.

―신을 은퇴했으니까 황제로 돌아갈 시간이야.

“……세상에.”

신 할래, 황제 할래?

양자택일이라니.

뭘 하건 죽도록 야근이잖아!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웃어 버렸다.

“어차피 죽어라 일할 거라면 가족들 얼굴 보고 사는 게 훨씬 더 낫지.”

―응, 엄마를 잘 부탁해.

“아니, 너도 금방 데리러 가마.”

내가 정색하자 딸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사실 이렇게 만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니까.

“카라카스에 제대로 된 신은 없고, 당연히 기적도 없었지. 하지만 만약 기적이 있다면…….”

나는 후련하게 웃었다.

“자식이 무사히 태어나고, 무사히 자라는 게 바로 기적이다.”

―…….

“약속한다. 반드시 데리러 가마.”

아이들의 행복이.

곧 아빠의 행복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