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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84화 (18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84)

제국군

새하얀 공간.

나는 익숙한 상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상대는 리젠 리브라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뭐야? 또 너야?”

―얼굴 보자마자 바로 질색하는군.

리젠의 얼굴을 한 놈, 내 마음의 불안이라는 녀석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물어보자. 이게 괜히 만난 건 아닐 테고. 내가 초능력자라서 일어나는 현상인가? 자각몽? 하지만 시릭 시절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애당초 7계위를 넘어선 힘, 8계위는 너만 가능하지. 같은 초능력자인 하시아도 8계위는 꿈도 못 꿔. 왜 그럴까?

리젠의 얼굴을 한 녀석이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야 스승님은 카라카스 출신이고 나는 지구 출신이니까. 이방인인 나로서는 카라카스의 공간을 다루는 초능력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지. 그런 차이 아닌가?”

―아니지, 시릭 카라카스, 너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아. 결국 떨쳐 일어나지.

“…….”

―절망하고 좌절한 적으로부터 검은 아우라를 흡수해서 정신력을 키워 나갔지. 그게 그다지 효율은 안 나왔지만. 보통 초능력자도 그건 못해.

“설마 나보고 타락하라고?”

리젠의 얼굴을 한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권유를 할 리가 없잖아. 어쩌면 너는 정신 오염에 면역되지 않을까? 추측하는 거지.

“…….”

지금까지는 다른 영혼의 기억과 감정에 침식당한 적은 없었다.

스승, 하시아의 신신당부가 있기도 해서 늘 조심하기는 했지만.

“칼에 찔리면 누구나 피를 흘려. 그걸 찔려 봐야 아나?”

―보통 상황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만약의 경우에…….

나는 눈을 떴다.

막사 의자에 앉아서 졸던 중이었다.

밖에서는 분주한 소리들.

그리고 내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8황후 마령화비 유하.

그녀는 양손에 장검을 들고 있었다.

“아, 미안. 깜빡 졸았다. 그냥 깨우지 그랬어?”

“아니요. 깨워서 미안해요, 폐하.”

유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양손으로 내게 검을 바쳤다.

일검 파군.

칠성칠요의 마지막 검이었다.

나는 받아들고는 검을 살폈다.

내가 기억하던 시절과 똑같았다.

“그래, 완벽하다. 잘했다.”

“보통 검의 수선은 원형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거기다 언니가 파손한 검, 너무 늦게 고치게 돼서 송구합니다.”

“아니, 그건 네가 미안해할 게 아니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시아의 잘못과 너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형제자매라고 반드시 잘잘못을 같이 빌어야 하는 건 아니지.”

“…….”

“물론 가족은 함께 하는 거지만, 이 경우에는 너와 나도 가족이잖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내 말에 유하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유하는 하시아와는 정반대, 성실한 성품이라서 이래저래 마음을 쓰던 모양이다.

나는 파군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새삼스럽지만 애들은 잘 있지?”

“예, 위험하지 않게 큰따님과 잘 지내고 있어요.”

내 막내딸과 장녀는 현재 둘이 붙어 다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짬을 내서 볼까 했지만, 내가 하는 일의 위험성을 따지면 굳이 지금 볼 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가 봐라. 조금 있다가 출발하자.”

“예.”

유하는 나를 보다가 난감하게 웃었다.

“꾸벅꾸벅 조시는 모습이 귀여웠어요.”

“좀 더 서비스할 걸 그랬나?”

“아니요. 언제라도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유하는 말끝을 흐리다가 가슴 앞에 꼭 쥔 주먹을 들어 보였다.

“폐하가 해내시리라 믿어요.”

“그래, 나도 너희들을 믿는다.”

유하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나갔다.

나는 정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하고 싶어도 상대가 신이라면 의미가 없나?”

하늘에 기댈 수는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하루 거리.

하지만 180만 대군이 휘슬 한 번 불면 일제히 돌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랑에이를 선봉으로 삼고, 점진적이고 조심스러운 진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본대를 이끌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옆에서 말을 타고 따르는 건 중앙대장군 레릭.

“레릭.”

“예, 폐하.”

“서부대장군은?”

동부와 남부, 북부의 대장군은 나한테 깨지기도 했고.

또 내가 하는 걸 보고는 내가 시릭의 환생인 걸 믿고 충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엔라의 반란에 동조했던 서부대장군.

루가르는 자기 직속 병력을 이끌고 떨어져 있는 중이다.

레릭도 마음에 걸리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사절을 몇 번이고 보냈습니다만…… 지금 합류할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그냥 놔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으로 하시아를 불렀다.

후드를 눌러 써서 얼굴을 감춘 하시아가 말을 타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포탈 말인데. 넘어오는 게 아니라 그냥 비치기만 할 수 있어요?”

“영상과 소리만 전달받는 것? 가능하지. 오히려 그게 텔레포트보다 더 쉽다.”

“제국 전역과 연결할 수 있습니까?”

“……음, 지금 무리인 소리 하는 거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내가 정신력을 지원해 줄게요. 아니, 그래도 모자라겠지만 일단 상황이 터지면 스승님은 그쪽으로 집중해 주세요.”

“미리 가다듬어 두마.”

하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이번에는 텔레파시를 썼다.

―이셀렌.

“…….”

암살여왕 이셀렌이 얼른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눈짓으로 묻자 내가 말했다.

“지금 칠죄신의 재림, 그리고 제국군의 총동원 소식은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지?”

“……소문을 통제하는 건 무리였어. 알다시피 하시아 씨가 출정식에서 선언해 버리기도 했고.”

“어제 내가 더 퍼트리라고 했잖아.”

이셀렌은 의아하게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은 제국 전역에 퍼져 있다.

내가 시릭의 환생, 지금 제국군이 일제히 집결해서 재림하는 칠죄신과 싸우려고 한다는 소식.

“이미 제국 전역에 다 퍼졌다.”

“그럼 좀 더 퍼트려. 최대한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알겠어.”

이셀렌은 가타부타 않고는 말머리를 돌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

좌익을 맡고 있던 엔라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전령을 보내지. 왜?”

“랑에이의 진군이 멈췄다.”

엔라가 은밀하게 속삭이는 소리.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엔라가 추가로 설명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더니만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더군. 아마도…….”

“그래, 우리가 다가가니까 칠죄신이 튀어나올 시기가 빨라졌다 이거군.”

예상하던 대로다.

“랑에이 보고 후퇴하라고 해.”

“이미 했어. 따로 결사대 5천을 준비해 뒀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다고 잡힐 놈이 아니야.”

“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야. 이 싸움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니까.”

“…….”

엔라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엔라는 시선으로 전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작렬하던 검은 번개가 어마어마해져서는…….

콰지지직!!

섬뜩한 소리.

“아.”

“하, 하늘이…….”

“하늘이 부서진다!!”

전진하던 병사들, 내로라하는 장군의 안색이 변했다.

저 먼 하늘이…… 무슨 유리창처럼 금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소리가 들릴 리 없는 거리인데…….

콰가가앙!!

마치 우레가 치듯이…… 수많은 병사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제국군 전체가 동요했다.

공포와 경악으로.

온갖 전장을 거쳐 온 나도 보는 순간 움찔했는데 보통 병사들은 오죽할까?

하늘을 부술 듯이 나타난 검은 것.

시커먼 어둠.

거기서 어마어마한 빗금이 그어졌다.

번쩍!!

금이 아니라 눈꺼풀이었다.

홱 열린 눈꺼풀, 새빨간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누, 눈깔.”

“뭐, 뭐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눈알이 데굴데굴 구르는 광경.

너무 상식 밖이라서 병사들의 기겁하면서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100년간 전쟁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제국군이다.

신과 싸워서 추방해 버린 군대.

그런 제국군의 숙련된 장군, 장교들도 경악할 정도로 지금 현상은 너무 비상식적이었다.

데굴데굴데굴.

이리저리 흔들리던 하늘의 눈동자가 우리들을 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지상을 기는 개미 새끼를 찾아낸 것처럼.

―시릭 카라카스!!!! 그리고 제국군!!!

하늘을 떨쳐 울리는 소리.

“이히이이잉!!”

말들이 놀라서 투레질을 하고, 기병들이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떨어진다.

병사들도 비명을 지르면서 도리질을 친다.

많은 이들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감히 나를 추방했겠다!! 그래 놓고 잘난 듯이 살았겠다!! 내가 놀아 주니 정말로 너희들의 수준일 줄 알았더냐!! 내가 정말로 너희 버러지 같은 생명들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인 줄 알았더냐!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

칠죄신의 협박에 병사들이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으아아아!!”

“살려 줘!!”

병사들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용기가 없다고?

아니, 지금 버티고 있는 이들이 너무 장한 것이다!

저 눈깔의 말이 귀에 들려올 때마다 나조차도 가슴에 불안감, 공포가 밀려온다.

정신 오염.

칠죄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기감정으로 주변의 생명들을 물들일 수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오늘 다 죽이리라!! 오늘 너희들의 씨를 말리고 너희들의 가족들도 가지고 놀아 주마!!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제국군!!!!”

나는 그 순간 목이 터져라 포효했다.

창!

복원한 검.

일검 파군을 빼 들면서 염동결계를 발휘하고는.

칠성칠요의 마지막 검, 파군.

효과는 간단하다.

내가 누리는 모든 효과를 반경 7km의 아군이 받는다.

즉, 내가 염동결계를 치면 아군 전원이 염동결계의 효과를 받는다.

“겁이 나도 참아라! 옆을 봐라! 누가 있는가!”

비명을 지르던 이들, 말에서 떨어진 이들, 주저앉아서 오줌을 싸 버린 이들.

덜덜 떨면서 울음을 터트린 이들.

100만이 넘는 병사들이 한순간에 와해되고 공중분해가 돼 버리기 직전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믿는다.

이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신과 싸우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인류를 지키겠다고 걸음을 옮긴 순간.

이들은 이미 내 전우,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이들이다!

“옆을 봐라! 옆을 봐라! 전우가 있다! 쓰러졌으면 손을 내밀어라! 겁이 나도 전우의 손을 잡아라!!”

덜덜 떨면 병사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인다.

나는 모두가 볼 수 있게. 파군을 번쩍 추켜세웠다.

하늘을 찌를 기세로.

“그리고 앞을 봐라! 내가 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싸운다!”

이어서 저 먼 하늘의 눈깔을 가리켰다.

“겁이 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도망가면 무엇이 남는가? 우리들이 가족에게 돌아간다고,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라는 걸 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 오늘이 마지막 싸움! 우리들이 인류를 지켜 낼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

“전우들이여! 나를 따라라!! 함께 싸우자!”

나는 말 배를 걷어찼다.

탁. 탁.

겁먹었던 말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굳어 버린 병사들.

멈춰 버린 진군들 사이로.

나 혼자서 달리기 시작한다.

“폐하.”

“폐하.”

“폐하!!”

“다들 일어나라!”

“시릭 폐하!! 가자!”

“일어나! 이 병신들아! 앉아서 죽을 거냐!!”

“리젠 폐하! 폐하와 함께 가다가 죽겠다!!”

절규와 비명, 고함.

그리고 함성.

“가자!! 폐하를 따라서 가자!!”

“가자! 제국군! 제국군!”

“폐하 만세!! 천년제국 만세!!”

“아아아아아!!”

비명과 함성, 공포를 떨쳐 내고자 하는 절규.

인간과 엘프, 다크엘프와 수인, 천족과 마족, 마녀와 용족.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약자와 강자.

하지만 이 순간은 우리 모두가 제국군.

모두가 한마음으로 무기를 잡고 앞으로 내달리며 나를 따라서 고함을 지른다.

지상을 떨쳐 울리는 생명의 노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을 쓰러트리려고 모인 인류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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