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83화 (18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83)

전설 이상으로

신검 천지신명.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도 몰랐을 거다. 하지만 의문점은 하나 있었지. 시릭, 칠죄신은 어떻지?”

“사악하고 집요하고 교활하죠.”

“그런데 왜 칠성칠요를 가만히 놔두었을까? 파괴할 방법을 몰라서?”

“스승님도 연구하다가 알게 된 거 아닙니까? 아, 하지만 몰랐다고 하더라도 당시에 놈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칠성칠요를 찾아내서 봉인하거나, 어디 바다 깊은 곳에 숨기고도 남았겠죠.”

나는 각 이종족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갖 험한 일을 겪고 나서야 칠성칠요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칠죄신의 종복들이 지키고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면…… 어라.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일곱 자루의 검인데 나는 이제까지 한 명하고만 대화를 했어요. 애당초 칠성칠요라는 이름부터가 7자루가 한 세트라는 이야기고요.”

“후후, 옳지.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 봐라.”

하시아가 무릎을 치고는 즐겁게 나를 보았다.

옛날, 내가 논리를 세우고 주장을 펼치면 지켜보던 스승의 모습 그대로.

“칠성칠요가 어디서 왔는지는 누구도 몰라요. 하지만 칠죄신이 만들었을 리는 없고, 칠죄신을 상대하면서도 무기는 멀쩡했죠. 즉, 같은 반열에 오른 검이라는 건데…….”

“생명을 먹는 탐랑, 태초의 불꽃을 불러내는 거문, 마력을 삼키는 녹존, 능력의 소비를 크게 줄여 주는 문곡, 자연치유력을 올려 주는 염정, 능력의 범위를 넓혀 주는 무곡. 그리고 능력을 공유하는 파군. 하나같이 대단한 검이지.”

“그런데 그것도 쪼개진 거다? 쪼갠 녀석이 칠죄신이고요?”

하시아가 짓궂게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놈이 아니라면 그런 능력자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정말로 신검이라면 가짜 신이라는 칠죄신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칠죄신이 쪼갠 게 아니다.

갑자기 칠성칠요가 말했다.

하시아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음? 칠죄신이 아니야?”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을 듣고 떠올려 보니…… 본래 그건 사람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다룰 수 있게 스스로 쪼개져서 흩어진 것이겠지.

“아무리 강력한 검도 휘두르지 못하면 장식이다?”

―그래, 하지만 시릭, 너는 이미 카라카스의 한계인 7계위를 초월하고 있다. 아니, 애당초 너는 카라카스에 얽매인 혼이 되어 버렸다. 그건 네가 지구에서 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칠성칠요가 말이 많아졌다.

나는 홀린 듯이 들었다.

―차원과 우주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보통 영혼이라는 건 자기 세상에서만 순환하기 마련이다. 본래 지구인인 네가 카라카스에 환생한 것도 비상식적이지만, 네가 카라카스에 묶여 버렸다는 것도 그렇다. 칠죄신이 추방당했다고는 하나 시간이 흘러서 다시 카라카스로 돌아온 것처럼…… 너도 본래면 지구에서 죽고 지구에서 태어나는 혼이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카라카스에 묶였다며?”

―이 세상이 네가 머물러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언젠가 돌아올 신에게 대항하는 재림 황제, 너는 이미 전설이지. 전설적인 영웅은 사람들에게 숭배되고 묶여 버리게 된다.

칠성칠요가 말했다.

―하지만 전설로는 칠죄신을 끝내 버릴 수 없다. 전설을 넘은 신화,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라. 시릭. 그래야만 이 모든 운명의 굴레를 끊어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

“평소에는 과묵한 놈이 왜 갑자기 달변가가 됐어?”

내가 웃으며 말하자 칠성칠요는 한참 말이 없었다.

―……모른다. 천지신명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갑자기 기억이 났다. 아마도 그게 내 사명이었던 모양이다.

“알았다. 고맙다.”

―힘내라.

짧은 말이 고마웠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는 하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 어떻습니까? 방금 말이 맞습니까?”

“음, 이치에는 맞다. 하지만 가장 문제는…… 나는 7계위를 넘어선 힘을 모른다.”

“이거 말이에요?”

나는 손에다가 마력을 응축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순서대로 올라가는 7계위.

그리고 보라색의 마력을 한껏 응축하고 있으니 금색으로 물들어간다.

“이거야 시간이 걸리지만 강력한 힘이죠.”

“그래, 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천지신명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시아는 한숨을 흘렸다.

“본래 칠죄신을 봉인하고 길게 연구해 볼 생각이었지. 하지만 늘 그렇듯 계획은 어그러졌고 이제는 연구할 시간이 없구나. 아니, 애당초 연구한다고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

“칠죄신이 쪼갠 게 아니라면 세상 누구도 모를 겁니다. 아니, 애당초…… 사람이 다룰 수 없어서 스스로 쪼개졌다고 했어요. 내가 자격을 갖추면 알아서 돌아올 겁니다.”

하시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는 짐짓 웃어 보이면서 손을 잡았다.

“내일이 오기 전까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기나 하죠.”

“아, 잠깐.”

하시아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머리의 뿔과 허리의 날개가 사라지고.

몸에 딱 붙는 하얀 로브 차림.

마녀의 모습이었다.

삼각뿔 모자를 눌러 써서 얼굴을 감춘 하시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역시 이 모습이 익숙하지?”

“그래요. 속아 넘어가드리지.”

나도 마주 웃으면서 그녀를 일으켰다.

나와 하시아는 정말로 진중을 돌아보았다.

아직 초저녁이라서 그런지, 병사들은 각자 쉬면서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편지를 쓰는 이들, 노름하는 이들.

몰래 숨어서 술을 마시는 이들.

나와 하시아는 그들과 어울려서 웃고 떠들고, 술까지 얻어 마셨다.

손에 술잔을 쥔 나와 하시아는 취해서 걸었다.

“하하하.”

의미 없는 말, 의미 없는 웃음을 터트리지만 즐거웠다.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걸음이지만 서로를 지탱하면서.

하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세상이야. 고작 100년 만에…… 너무 좋은 세상이 왔구나.”

“……스승님 덕분이에요.”

취한 내 말에 하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지. 네 나이 스물, 칠죄신을 몰아내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은 순간부터 이 모든 운명의 주역은 너였다. 나는 그저, 네가 가는 길이 보다 밝기를 바라며 뒤따르는 도우미에 불과했다.”

“뭔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요.”

“내가 한 일이 있고, 미안한 마음뿐이니까.”

“아, 진짜. 사람 서운하게 만들래요?”

나는 술에 취한 채로도 하시아를 노려보았다.

“이제 다 왔잖아요. 칠죄신 때려잡고. 아니, 잠깐만.”

“…….”

“……당신 설마 아니지?”

나는 마력을 불러일으켜서 얼른 술기운을 몰아내었다.

하시아는 은근히 능구렁이 같은 데가 있었다.

나에게 말도 안 하고 사고치고, 모른 척 입 다무는 거.

사후 보고도 안 한다는 점에서 오드벨보다 질이 나쁘다.

“아까 질문은 흘려 버렸네? 정신 오염으로 칠죄신을 끝장낼 수 있냐는 거.”

“……으음.”

“당신이 쓸 거 아니지?”

“이 녀석, 스승님에게 갑자기 반말을 하는구나. 떽.”

하시아가 어설프게 내게 손가락질을 하자, 나는 그 손가락을 확 잡아챘다.

“당신이 아멜리아도 아닌데 그게 통하겠어? 아니, 지금 뭔 미친 생각을 하는 거야?”

“초능력은 일자전승이다. 하지만 지금은 둘이…… 꺅!?”

취해서 말하던 하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손가락을 부러트릴 듯이 힘을 주었으니까.

“한 번만 더 내 속 썩이면 손모가지 날아갑니다? 어디서 허락도 안 받고 미친 짓을 하려고 해?”

“으음, 그럼 작전 개요를 설명하겠다. 칠죄신은 정신체라서 정신 오염에 취약…….”

“닥쳐, 좀.”

술기운이 싹 달아난 나는 험하게 윽박질렀다.

“칠죄신을 봉인하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정신 오염으로 파괴한다? 그게 당신의 진짜 계획이었군.”

“물론 최후의 방법이다. 성공확률이 너무 낮지.”

당연하다.

지금 내 정신력이 하시아를 웃돌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결국 범람하는 강물, 바다처럼 거대한 칠죄신의 정신에 홀로 맞설 수는 없었다.

나는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의외로 미안한 걸 아는 사람이 웬일로 뻔뻔하게 구나 싶었네. 여차하면 자폭할 생각이었어. 아, 하긴 그래서 엔라가 협조한 거군? 둘이 아주 똑같아. 일 저질러 놓고 자살하면 그만이라는 게.”

하시아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좋은 표현이 있는데.”

“그게 좋은 표현? 미쳤어? 진짜 나 하나 살리겠다고 죽어 간 전우들의 시신에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제 당신 시체도 보라고?”

“……시릭.”

하시아가 안타깝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족끼리 같이 좀 살자. 그게 뭐 그렇게 어려워?”

“……아, 음.”

하시아의 눈 끝에 눈물이 맺혔다.

슬픔을 몰랐던 마녀지만 이제는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슴에 손을 댄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너무 많은 잘못을…….”

“황제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노라.”

“아니, 제국 말고도 너 개인에게…….”

“죄인에게 200년간 육아형을 내린다.”

하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벌이 아니라 상이지.”

“뭔 소리야. 애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든데. 거기다가 사실 칠죄신과 전쟁 치르는데 애까지 낳아서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사실 전쟁통에 아이를 낳는 건 미친 짓 아닌가?

일견 이런 생각도 했지만 아니었다.

당시,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인구수가 너무 줄어서 출산이 권장되기도 했고.

그런 실리적인 부분을 빼놓고, 정신적인 측면으로도 생명의 탄생은 중요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승률이 암울한 싸움을 10년 이상 수행하고 있으면 희망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생명을 낳을 수 있단 희망이.

“바라메가 내 딸을 낳았을 때, 엔라가 내 아들을 가졌을 때…… 그 감동은 아직도 잊지 못해. 몇 번을 거듭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잊지 못하겠지.”

“…….”

“아이를 기르는 건 힘들어. 힘들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 나를 믿고 죽어 간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왔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하시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먼저 말을 안 해서 물어보는 걸 미뤘지만, 우리 애는 어떻게 됐습니까? 잘 있어요?”

“계면 차원에서 잘 지내고 있다. 애가 많이 어려.”

“그래요, 그러면 다 끝내고 애나 데리러 갑시다.”

“시릭, 나는…….”

“칠죄신을 무찌르면 당신도 죽을지 모른다고 예렌이 걱정하던데요. 그런 일 없게 할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내 사람 죽는 건 질렸어요. 가족끼리 서로 찢어져서 못 보는 것도 지겹고.”

“…….”

“일 다 끝내고 같이 얼굴 보고 저녁 먹으면서 삽시다. 내가 뭐 어려운 요구하나?”

하시아는 멍하니 나를 보았다.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

“이리 와요.”

“…….”

나는 팔을 벌려서 내 사람을 안아 주었다.

굳어 버린 하시아는 가만히 내 품에 안겼다.

툭, 툭.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거 서로 이런저런 일이 많았습니다만. 이제 당신도 슬프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한테 눈물 나는 일은 그만 좀 합시다. 약속해요.”

“응, 으응.”

“스승님은 울 때는 애처럼 우네요.”

나는 지나가는 투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하시아를 토닥여 주었다.

“으, 으, 음.”

툭.

내 가슴을 쳐서 밀어낸 하시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우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는 것처럼.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하자, 나는 그 손을 붙들었다.

“왜요, 예쁜데.”

“……이 녀석이.”

하시아가 꾸중하면서 손을 빼려고 해도 내가 놔주지 않았다.

내가 빤히 보자 하시아는 한숨을 쉬면서 턱 끝만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만해라. 스승을 이리도 부끄럽게 만드니 즐거우냐?”

“사랑해, 하시아.”

“…….”

움찔.

크게 동요한 하시아가 쩔쩔매다가 내 가슴을 때렸다.

“이, 이 녀석이 스승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내가 목소리 깔고 반말하면 좋아하잖아. 아, 특히 같이 잘 때 좋아하던가.”

“…….”

한참의 침묵 끝에.

하시아도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나도, 나도 너를…….”

우르르릉!!

그때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두 사람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쩌저저저적.

너무나 먼 거리인데도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

계속 번개가 몰아치던 저 먼 평원의 밤하늘.

금이라도 간 것처럼 깨져 나가고 있었다.

“……거의 다 왔구나.”

하시아의 말.

그리고 깨져 버린 밤하늘 사이로 일렁거리는 검은 그림자.

손가락으로 벽에 그림자 장난으로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번개들 사이에서 시커먼 암흑이 드리워졌다.

바로 저게 칠죄신의 본체라는 건가?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는 하시아를 돌아보았다.

“저딴 놈은 어차피 내일 끝날 테니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합시다.”

“……그래.”

하시아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시릭. 그 옛날, 너를 어린 시절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말하려는 순간, 나는 하시아에게 입술을 겹쳤다.

얼마나 오랜만인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서로 엇갈리고,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타락하고, 100년이 지나고.

그래도 겨우 다시 하나가 되었다.

“…….”

입술이 떨어진다.

하시아는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돌아보았다.

저 먼 밤하늘.

검은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치는 그 너머의 밤하늘.

이 사람하고 얼마나 많이도 밤하늘을 천장 삼아 잠들었던가.

그 전란의 시절.

모든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결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