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80화 (17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80)

전장의 밤

진영의 밤.

나는 병사들 사이에 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을 아는 장교들을 찾아보았다.

대장군만이 전투의 핵심이 아니다.

백검장, 백부장, 이런 이들이 일선에서 목청을 떨쳐 울리고 지휘한다.

내가 훈장을 달아 줬던 이들.

나와 함께 싸우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

나는 환생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의식하지 않고 말을 걸었고…… 그들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받아 주었다.

전투를 앞둔 장병들은 달라지는 법이니까.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적은 칠죄신.

그 사실에 다들 낯빛이 달라지고 복잡해졌다.

그래도 아군이 수십만, 아니 물경 백만이 넘는다.

하룻밤에 다 찾아볼 수는 없다.

적당히 둘러본 나는 중앙군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레릭에게 지시를 내릴 생각으로.

한데 중앙대장군의 막사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쉐도우 엘프.

예렌이었다.

“야, 너…….”

“죄송합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

예렌은 제국군의 상장군, 그중에서도 무명이 드높았다.

지금 이 180만 대군들 사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만약 예렌이 사실 타락했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 혼란이 빚어진다.

그래서 예렌과 하시아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라고 단단히 일러뒀는데.

어차피 나온 거 어쩔 수 없지.

“……그래, 말해라.”

“이번 결전에 저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나도 그건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칠죄신과의 결전.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레릭에게 일렀다.

“레릭, 예렌은 네가 옆에 두다가 적당한 때 부대를 붙여 줘라.”

“감사합니다. 폐하, 사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뭔데.”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예렌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때 폐하가 칠죄신을 추방하는 데 성공하신 최종 결전, 그때 저는 칠죄신의 마력영역에 휘말려서 숨이 끊어졌습니다. 한데…… 영혼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

“폐하도 환생하셨으니 아실 겁니다만. 저는 당시에 의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시아 님의 목소리를 듣고…… 흑마력을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하시아가?”

예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만이 아니라 락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시아 님이 칠죄신의 흑마력에 대한 지배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셨습니다.”

“……그래.”

갑자기 마음이 확 놓였다.

예렌이나 락셀이 그냥 목숨이 아까워서, 칠죄신의 꼬임에 넘어가서 타락한 게 아니었구나.

아니, 사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당사자의 입으로 해명을 들으니 마음이 풀어진다.

예렌은 나를 보면서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아마…… 칠죄신이 쓰러지면 저는 사라질 겁니다.”

“뭐?”

“지금 이건 올바르지 못한 형태의 환생이니까요. 그래서 칠죄신의 종복들은 회생이라는 식으로 둘러댄 겁니다.”

예렌은 천천히 말했다.

“실은 칠죄신은 사람의 영혼을 자기 나름대로 환생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타락, 종족이 변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

“아, 죄송합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

예렌은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실은 하시아 님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칠죄신을 쓰러트리면 하시아도 죽음을 맞이한다?”

“……저는 이미 죽었던 몸입니다. 하지만 하시아 님은 어떠실지, 어떻게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차마 묻지는 못했습니다.”

예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사연이 복잡합니다만. 이는 폐하가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해 줘서 고맙다, 예렌.”

“아닙니다. 폐하와 제국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싸울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렌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경례를 바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자랑스럽다.”

“……예?”

“……음, 아니. 그냥 너 같은 부하가 있어서 기쁘다. 뭐 그런 거지.”

사실 예렌은 타락해서 정신을 잃고, 나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뒤에는, 칠죄신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려고 하지 않는가.

잘잘못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죽음을 초월해서까지 다시 한 번 싸워 주겠다는 전우에게 더는 말할 게 없다.

“고맙다.”

“…….”

내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예렌은 고개를 수그렸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지은 죄가 너무나 큰데……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아니, 괜찮다. 다시 같이 싸워 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레릭의 막사에서 나온 나는 내 개인 막사로 돌아갔다.

이셀렌을 통해서 은밀히 부를 생각이었는데…….

막사를 걷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멈칫했다.

황후들이 모여 있었다.

2황후 랑에이, 3황후 이셀렌, 5황후 렌시엘, 6황후 나비린, 7황후 바라메, 8황후 유하.

그리고 수갑을 차고 있는 4황후 엔라, 마찬가지로 수갑을 차고 있는 1황후 하시아.

양측은 서로 명백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를 돌아본 랑에이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시릭.”

“……그래.”

나는 일단 두 진영의 가운데,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엔라의 상태를 살폈다.

워낙 초주검이 되어서 1등급 치료약을 먹어도 위험하지 않나 싶었는데.

엔라가 내 시선에 웃었다.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를 수는 있다.”

“무리하면 안 됩니다, 엔라.”

“렌시엘,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곧 총력전이야. 무리해야지.”

서로 주고받는 대화.

바라메가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이 몸은 이런 텁텁한 분위기는 아주 짜증나느니라. 그냥 서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얼른 하지 그러느냐?”

“일단 다들 잔부터 받으세요.”

렌시엘의 말에 유하가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렸다.

엉겁결에 받아든 나는 렌시엘을 돌아보았다.

렌시엘은 원래 술은 입에도 안 대고, 내가 마시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던 여자였다.

한데 내일 결전을 앞에 두고 술자리라니?

하시아가 빙긋 웃었다.

“아, 렌시도 이제 술맛을 알았나?”

“……예전부터 말했지만 그렇게 부르면 바보 취급 하는 것 같습니다.”

“천족들은 죄다 엘 자 돌림인 게 좀 그래서.”

“뭐가 그렇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이셀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론을 회피하는 건 관둬. 시릭도 왔으니까 이제 정곡을 찔러야지. 하시아, 대체 어떻게 된 거지?”

“…….”

“그 모습은 또 뭐고? 그때 시릭과 우리들 앞에 나타나서 폭로한 사실은? 아니, 무슨 생각이지?”

하시아는 대답 대신에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허락을 구하는 시선.

나는 일단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다들 한 잔씩만 마셔라. 취하면 안 되니까.”

내 말을 따라 다들 술을 입에 가져갔다.

아주 정갈한 태도로 술잔을 입에 가져간 유하는 엔라에게 물었다.

“엔라 씨는 사정을 보다 잘 아시는 거죠?”

“내가 앞에 있는데 왜 엔라에게 묻지? 아, 언니 죽은 틈에 남자를 뺏어 갔다고 미안한가?”

하시아는 웃는 얼굴로, 한 점 거리낌도 없이 말했다.

누가 반응하기도 전에 하시아는 다른 황후들을 쓱 둘러보았다.

“아니면 너희들이 공모해서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같잖은 질투심으로?”

“그…….”

랑에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나는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거, 이상한 흉내 내지 마라. 다들 놀란다.”

“지금은 진심이다. 설마 나라고 좋아서 타락했을까?”

하시아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빼앗겼지. 거기에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게 만들었고.”

“…….”

“너에게 그런 일을 시켜 버린 게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시릭.”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지금 이렇게 얼굴 봤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유하, 파군의 복원은 다 됐나?”

하시아가 이야기를 돌렸다.

유하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다 끝났어요. 내일 아침에 마무리만 하면 돼요.”

“그럼 칠성칠요의 완전 부활이다. 시릭, 정신체인 칠죄신에게 칠성칠요가 타격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힘든 싸움이 되겠지.”

나와 하시아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나는 다른 황후들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이래서 다른 황후들이 하시아를 특별하게 여긴 거다.

“하시아, 이야기 돌리지 말고, 네가 타락하게 된 진짜 사정을 털어놔.”

“그때 비전으로 보여 준 영상은 상당 부분이 사실이다. 단, 황후들이 나를 그렇게 흉보진 않았지.”

하시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내가 미움 살 만한 일을 여러 차례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언니!”

유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쳤다.

“언니가 늘 그런 식으로 구니까 사람들이 언니를 꺼리는 거예요! 미워하면 미워하는 거라고,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내가 너희들을 좋아하니까 괜찮다.”

“……예?”

하시아는 웃으면서 옆의 엔라, 그리고 시선을 돌려서 다른 황후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너희들을 좋아한다. 늠름한 랑에이도, 요염하지만 사실은 귀여운 이셀렌, 호쾌하고 대범한 것 같지만 책임감이 강한 엔라, 우아함 속에 정열을 감추고 있는 렌시엘도, 가녀린 척하지만 사실 음흉한 나비린도.”

“잠깐, 지금 저만 욕했답니까?”

“세상사를 관조하는 것 같으면서도 축제를 사랑하는 바라메, 그리고 내 동생인 유하를 좋아하지. 아니……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고 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사실 황후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하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시아의 말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없어도 너희들이 시릭을 지탱해 줄 거라고 기대했지. 나는 오래 못 살겠구나 싶었으니까.”

“예?”

렌시엘의 말에 하시아는 웃었다.

“시릭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칠죄신의 주목을 받지.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물론 너희들도 안전한 건 아니지만 너희들은 각자 자기 종족의 비호를 받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것도 없었고. 아니, 이런 건 다 둘째 치고…….”

“…….”

“시릭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할수록, 칠죄신이 나를 각별하게 노릴 거라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결국 걸렸지.”

하시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칠죄신은 나를 타락시키려고 했지. 왜냐고? 본래 칠죄신의 노림수는…… 내 몸을 차지해서 시릭에게 나타나는 거였으니까.”

“아.”

“무, 무, 무슨…….”

다들 새삼스럽게 전율했다.

듣는 나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칠죄신은 타락한 육체에만 갈아탈 수 있다.

만약 당시에 최종 결전 때, 칠죄신이 하시아의 몸으로 나타났다면.

“…….”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나는 절대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칠죄신과의 대화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지.”

“……그게 뭔데요?”

“이제부터는 영상으로 보여 주지.”

하시아가 한숨을 쉬면서 손을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입체영상이 떠올랐다.

110년 전, 나와 황후들이 갈라서게 되었던 장면.

마녀 하시아의 마지막 진실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