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8)
제국군 총동원
저 먼 하늘에서 번쩍거리는 검은 벼락.
쉴 새 없이 명멸하는 게 눈이 부실 지경이다.
“저게 칠죄신의 본체라고?”
“정확히는 카라카스의 근방에서 갇혔는데 에너지가 새어 나오는 거다.”
하시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칠죄신은 사도를 통해서 귀환하려고 했지. 하지만 너도 알겠지만…….”
“칠죄신의 지배력은 약해졌다. 아니, 애당초 남의 육체를 강탈하는 게 흑마력의 성질을 이용하던 거였나?”
“그래, 칠죄신은 아무 육체나 갈아타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영혼을 바친 상대에게만 가능하고.”
“영혼을 바쳤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건 눈속임이었지. 흑마력에 오염되어서 타락한 영혼만 임할 수 있는 거였어.”
우리 둘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정보를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하시아와 나는 이게 익숙했다.
“하지만 칠죄신이 흑마력에 대한 지배력, 통제가 낮아지면서…….”
“심지어 키릭 같은 인간 떨거지의 몸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됐다.”
우리 둘은 서로 합을 맞춘 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뛰어 들어온 세탄과 하인켈은 멍하니 보건 말건.
내가 물었다.
“즉, 칠죄신은 자기 계획대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누구의 몸도 강탈하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왔다?”
“그래, 아주 불완전한 재림이지. 칠죄신은 이제까지 남의 육체를 쓰면서 무수한 악행을 저질러 왔고 툭하면 몸을 갈아탔지. 하지만…….”
“이젠 그렇게 피할 수도 없다. 저 검은 벼락 덩어리를 없애 버리면 끝이다?”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을 살피는 눈빛이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물었다.
“네가 원래 계획하던 봉인이 저거였나?”
“애초에 계획은 그랬지만 여전히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안 됐다. 봉인이 불완전해.”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칠죄신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저력을 숨기고 있었을지 모르겠네. 저 봉인은 머지않아 깨지겠지.”
“…….”
“하지만 시릭, 그래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승리의 기회는 없을 거다.”
하시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칠죄신은 네가 카라카스에 묶여서 계속 윤회전생을 하게 된다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지. 최종 결전에 추방당하기 전부터.”
“…….”
그래, 돌이켜 보니 당시에 그런 뉘앙스로 말했다.
하시아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서 미리 토구로나 다른 사도들을 감춰두고, 세상의 혼란을 유도해서 보다 빠르게 돌아오려고 했다. 그렇게 돌아와서 계속 윤회전생을 하는 너를…….”
“찾아내서 매번 죽이려고 했다?”
“……그래.”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흑마력에 오염되었지만 다른 이들보다 이성이 남아 있었다. 그건 내가 초능력자, 정신을 다루는 마녀이기 때문이지.”
“…….”
“그래서 정신 오염에도 어느 정도 버텼고. 하지만…… 칠죄신의 사악한 계획을 알고는 전율했다. 어찌 이런 미친 짓을 하려고 할까?”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원히 윤회하는 너를 짓밟으려는 신이라니. 나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적어도…….”
“…….”
“다시 태어날 네가 평화롭게 살아 줬으면 했다.”
“이게 평화로우면 전쟁터는 대체 뭐 하는 곳이래?”
나는 저 멀리서 떨어지는 번개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러니하다.
하시아는 내가 칠죄신과 관련 없게,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면서 영원히 봉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 바람에 내가 시릭의 기억을 각성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알았다. 됐다. 일단 따지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
“어차피 저렇게 나온 놈이고 봉인이 불완전하다면 잡을 방법부터 생각하자. 봉인이 언제까지 버티지?”
“다시 계산해 봐야겠지만 빠르면 1주일이다.”
하시아의 말본새가 묘한데.
이 여자, 내 눈을 보고 말 못하는 걸 보니 켕기는 게 있나 보다.
일단 나중에 추궁하고.
나는 이마를 누르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제국군 총동원령을 내린다. 장병들을 잔뜩 모아서 칠죄신과 자웅을 가려야지. 문제는 이동 시간인데.”
“아, 그게…….”
하시아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정신력을 좀 지원해 주면 내가 포탈을 열겠다.”
“예렌이나 엔라가 공간이동으로 도망가던 그거?”
그때야 칠죄신이 새로 익힌 재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시아가 부린 술수였던 거다.
“응, 나 혼자서는 오래 문을 열어 두는 게 힘들다. 하지만 네가 정신력을 지원해 주면 가능하겠지.”
“얼마나?”
“거리는 관계없고 유지 시간은 5시간 안팎, 동시 개방은 10개 안팎이지.”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제국군 전부를 여기로 부르는 게 가능하겠군.”
“서부군은 이미 근방에서 대기 중이니까 더 수고가 줄어들겠지.”
“…….”
고민할 것 없다.
칠죄신이 돌아오면 제국은 존망을 건 전쟁을 치러야 하니까.
“좋아, 그건 채택하지.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을 이용해서 각지의 제국군과 사전 연락을 하고 준비된 직후에 포탈을 연다. 그럼 빨라도 12시간 안이겠군.”
“황후들도 불러 모으지?”
하시아가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면서 제안했다.
“어차피 이번 전쟁에서 지면 미래가 없어. 제국의 모든 인적 자원을 끌어 모아라.”
“본심은?”
“……으음, 모두의 얼굴을 보고 사과하려고.”
서큐버스의 외양을 한 하시아가 머뭇거리는 게 진짜…… 안 어울린다.
나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잘못한 걸 알긴 알아? 엔라를 부추긴 것도 너지?”
“……아니, 당시에는 나도 타락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금 사과하겠다고 한 사람이 변명하는 거 봐라. 장난해?”
내가 으르렁거리자 하시아는 밝게 웃었다.
“하하하, 너는 그래도 여전하네.”
“웃어? 즐겁고 신이 나고 그래?”
“응, 변치 않는 너를 보니까…… 그냥 행복하네.”
하시아는 내 옆에 서서 창턱을 짚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미안, 몇 번이고 말을 고민해 봤지만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에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가족에게 사과해.”
“……그렇지. 그래야지.”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돌아보았다.
세탄과 하인켈은 침묵한 채로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인켈, 지금 당장 이셀렌 오라고 해라.”
제국의 인적, 물적 자원.
총동원이다.
당연하지만 군대라는 게 부르면 척척 오는 게 아니다.
보급부터 시작해서 이동 계획까지, 전부 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것도 일부 치안 유지 병력을 제외한 제국군 총집결이라니.
당장 먹을 것만 싸 들고 오고.
기타 필요한 보급품이 생기면 다시 포탈을 통해서 전달받는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아직 나, 리젠의 얼굴도 보지 못한 동부와 남부, 북부의 대장군이라면 무시할 소리다.
하지만 다시 칠죄신이 돌아온다고 하니 아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다들 반신반의하면서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
덕분에 워길드 근방에는 제국군 180만이 모여서 전개하고 있었다.
“말이 180만이지…….”
워길드의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기가 막힌다.
이 병력이 단 3일 만에 모이다니.
포탈이 아니었다면 무리였다.
내 옆에 선 렌시엘이 한숨을 쉬었다.
본래 렌시엘은 후방에서 지원하고 보급을 담당했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대군이 모이게 되면서 그녀의 능력이 절실했다.
렌시엘은 지금 군수물자 배분부터 온갖 노역을 다 하고 겨우 짬이 났다.
“이길 수…… 있을까요?”
“모르겠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먼 하늘에서 쉬지 않고 번쩍, 번쩍거리는 저 검은 번개.
척 봐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뭉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건 사실 자연적인 번개가 아니야. 너무나 압도적인 질량에 차원에 균열이 가서는 불꽃이 튀는 거다.”
“…….”
“이제까지 내가, 제국이 상대한 칠죄신은 사람의 육체를 쓰는 놈이었지. 한데 사람의 육체에서 벗어난 놈이…… 저 정도 저력일지는 몰랐네.”
렌시엘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성벽을 잡은 내 손등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지더라도 함께 질 테니까.”
“아니, 이겨야지.”
100년의 시간을 넘어서 다시 마주한 숙적.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야 한다.
내가 결심을 다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국 만세! 좀 와 보셔야겠습니다, 폐하!”
내 누나, 칼비나였다.
나는 멋쩍게 대꾸했다.
“아,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격식 차리지 마요. 그리고 아직 나 폐하 아닌데.”
“하지만 지금부터는 폐하인 게 나을걸?”
칼비나가 싱긋 웃었다.
“대장군들끼리 싸워.”
“…….”
미치겠다, 증말.
제국대장군.
중앙대장군 레릭을 비롯해서 동, 서, 남, 북의 군을 통솔하는 다섯 명의 대장군이다.
제국군의 총수였던 나, 시릭 카라카스의 바로 아래였다.
그 세 녀석이 지금 백만이 넘은 제국군 진영 한복판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는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세상 다 산 줄 아나 봐? 어디서 지랄이야? 꼬리를 잘라서 입에 쑤셔 넣어야 정신 차릴래?”
“말버릇 봐라. 네년 남은 눈 하나를 뽑아서 똥구멍에 쑤셔 넣어 줄까? 넌 앞으로 윙크할 때마다 엉덩이를 흔들어야 할 거다.”
“싸울 거라면 그냥 말로 하지 말고 서로 얼른 쑤셔 버리고 끝냅시다. 시끄러워서 원.”
세 남녀.
동방대장군, 마녀 세오닌.
북방대장군, 용족 라카드.
남방대장군, 천족 토라벨.
그리고 그 앞에서 중앙대장군 레릭이 당황하고 있었다.
“이 미친놈들아, 제발 그만 좀 해. 너희들 이러는 거 폐하가 보시면…….”
“이미 봤다.”
내 말에 레릭이 딱 얼어붙었다.
천천히 나를 돌아본 레릭이 애써 웃어 보였다.
“으, 으음, 폐하. 여긴 아무 문제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는데? 너희 셋 생각은 어떠냐?”
“…….”
마녀 세오닌이 험악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애꾸라서 눈이 하나뿐인데도 안광이 장난 아니다.
라카드와 토라벨도 나를 경계 어린 눈으로 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서로 금방이라도 멱살 잡으려던 놈들이 내가 등장하니 딱 멈추고는 눈치만 보네? 옛날하고 똑같다, 똑같아.”
“저게 폐하라고?”
“다들 폐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믿나.”
“전 천족이고 당연히 환생을 부정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릭.”
“예! 죄송합니다!”
레릭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천하의 대장군, 그중에서도 권위가 가장 높은 중앙대장군이 알아서 머리를 박는 것이다.
남은 셋도 멈칫하고는 나를 보았다.
왜냐면 많이 본 광경이거든.
“……레릭이 저러는데? 폐하에게만 저러잖아?”
세오닌의 말, 다른 두 놈도 나를 의심과 불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너희들의 개인정보며 이런저런 일 다 말해 줄 수 있거든? 근데 안 하련다.”
“……뭐?”
“말보다는 몸으로 믿게 해야지. 어차피 병사들 다 보는 데서 서로 신나게 싸웠지?”
나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100만이 넘는 대군이 모인 한복판에서, 대장군들이 서로 소리를 질러대며 싸웠다.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도 떨어져서는 추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저거 봐라, 저거. 구경하는데도 남방 애들은 남방끼리, 동방 애들은 동방끼리 뭉쳐 있네.”
“그, 그게 뭐가…… 요?”
세오닌이 긴가민가하면서 존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하려면 다 같이 뭉쳐서 팀웍을 다져야지. 셋 다 한꺼번에 덤벼라.”
“뭐?”
“……예?”
세 명의 대장군이 신음을 흘렸다.
나는 코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바로 제국 최강 시릭 카라카스인데.”
“…….”
“못 믿겠다니 지금부터 증명해 주마.”
무장은 말로 설득하는 게 아니지.
칼로 따르게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