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7)
신을 속이고
우우우웅.
보라색 검강, 아니 이 정도면 검광(劍光)이다!
이건 엔라의 100년 동안 갈고 닦아서 7계위에서 극치에 이른 경지!
나는 손을 뻗어서 예렌을 제압하고 있던 녹존과 문곡까지 불러왔다.
내 주변을 떠다니는 다섯 자루의 검.
“하아아아아아!!!”
엔라가 할 테면 해 보라고, 양손으로 잡은 대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그리고 나는 비검을 순차적으로 내던졌다.
핑! 핑! 핑!!
탐랑이 엔라의 다리를, 문곡이 팔을, 녹존이 어깨를, 염정이 몸통을 가른다.
으드득!!
하지만 엔라는 그 모든 공격을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일격을 휘둘렀다.
10미터짜리 검광이 나를 향해서 날아오는데…… 나는 마지막 남은 거문을 세워서 막았다.
카아아아아앙!!
검강과 검광의 충돌.
하지만 마력을 집약한 엔라의 일격이 훨씬 더 강하다!
염동결계에 마력방어, 거기다가 마력장까지 써서 버티는데도 발끝이 밀려 나간다.
말 그대로 산도 베어 버릴 정도의 압력.
끼기기긱!!
하지만 나는 엔라의 검과 검을 맞댄 그대로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금속이 마찰을 일으키고 불꽃을 튀긴다.
마력질주.
마력의 반응속도가 빨라졌으니 마력질주의 순간 발동 속도도 확 빨라진다!
“……뭐?!”
상식을 뛰어넘은 급습에 엔라가 비명을 질렀다.
엔라는 이를 악물면서 뒤로 몸을 빼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몸을 웅크리고 급소만큼은 막으려는 태세.
그러나…….
“가라!”
이미 내 손을 떠났던 탐랑과 문곡이 엔라를 향해 날아들었다.
본래 비검은 직선 운동, 일단 내 손을 떠나고 선회해서 돌아오는 게 보통이다. 그 거리와 시기는 조절할 수 있어도, 일종의 부메랑처럼 결국 내 손으로 회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탐랑과 문곡, 녹존은 마치 스스로 먹이를 향해서 덤벼드는 것처럼 몸을 날리는 엔라를 추격했다.
스스로 날아서 적을 베는 검술.
어검(御劍).
아니, 염동어검술(念動御劍術)!
“아악!!”
엔라의 팔, 다리, 몸통이 꿰뚫린다.
그리고 나는 착지 지점까지 달려가면서 칼을 휘둘렀다.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도 엔라는 칼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푸아아아악!!
나는 칼을 쥔 엔라의 손목을 베어 버렸다.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
“……헉, 허어억. 허어어억.”
엔라는 비틀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턱 아래는 온통 피투성이.
손목은 너무 심하게 베여서 당장 쓰지 못할 정도다.
엔라는 애처롭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전보다 더 강해졌군.”
“끝났지?”
“…….”
엔라는 과다 출혈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후회와 후련함이 섞인 착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머금은 눈.
“……미안하다, 시릭.”
“그딴 사과할 거면 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그때 하시아를 저버린 게 미안하다.”
“…….”
“그 사실을 네게 먼저 말하고 죄를 청하지 못한 것도…….”
엔라는 나직하게 말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쁜 숨결.
지금 엔라는 너무 출혈이 심해서 초주검이었다.
나는 품을 뒤졌다.
“잔말이 많다. 이거나 먹어라.”
“……뭐?”
내가 던져 준 1급 치료약.
엉겁결에 받은 엔라의 눈동자가 떨렸다.
“지, 지금…….”
“난 안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렌시엘이 가져가라고 성화더라. 혹시나 너 죽을지도 모르니까 먹이라는데?”
“…….”
“나랑 네가 없는 동안 혼자서 제국을 지탱한 분이 넌 꼭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더라. 돌아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든가. 그래도 필요 없으면 버리든가.”
엔라는 못 버린다.
전쟁터에서 무수한 전우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는 절대로 치료약을 허투루 쓰지 못한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엔라가 아득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살아서 재판 받아. 어디서 편하게 전사하려고 해?”
“…….”
“그리고 그 전에 칠죄신과의 결전에서 선봉에 서라. 장군이 필요해. 아, 하는 김에 네가 가진 모든 정보를 다 내놓고.”
나는 허리를 굽혀서 엔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엔라의 떨리는 눈빛.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뒤에서 애가 보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냐? 난 우리 애 연산군 만들 생각 없다.”
“…….”
엔라도 뉘앙스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여장군은 나를 떨리는 눈망울로 보다가 말했다.
“결판이 났으니 하시아가, 곧 다시 올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녀에게서…….”
“알았다. 그만 말해라.”
“…….”
엔라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오르는 눈물, 덜덜 떨리는 어깨.
나는 허리를 펴고는 돌아보았다.
예렌은 활을 뺏기고, 세탄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다른 병사들도 자질구레한 부상은 있지만 내 쪽의 병사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제 정리 들어간다!”
엔라와 병사들은 모두 포로로 사로잡았다.
각자 검을 뺏고 부상을 치료하는 중이다.
나는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워길드를 안팎으로 수색하고 병력을 정비했다.
그런 한편, 밖에 놔뒀던 본대의 일부를 불러들여서 앞일을 의논했다.
임시 사령부로 삼은 시청.
나는 손을 털면서 이셀렌에게 물었다.
“이셀렌, 서부대장군 루가르의 위치는?”
“탈론 평야로 이동 중이야. 적병의 숫자는 3만, 그리고…….”
“하지만 바로 움직이지는 않겠지. 그렇지, 예렌?”
“……예, 그렇게 압니다.”
예렌은 머뭇거리면서도 턱을 끄덕였다.
손에 찬 건 수갑.
다크엘프의 고문 장치다.
예렌이 마력을 일으키려고 하면 그 즉시 손가락이 짓이겨진다.
거기다가 활도 압수했고.
바라메가 헛기침을 했다.
“저기, 예렌이나 엔라도 항복을 했는데…….”
“그래서?”
“……너무 과한 것 같다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 수갑도 풀어 주고 무기도 돌려주고 그럴까? 하는 김에 서로 등도 두드려 주고?”
“…….”
“내가 나 배신한 놈 받아 주고 다시 써먹는 일은 숱하게 있었다. 내가 사람이 좋아서? 아니, 그렇게라도 안 하면 써먹을 놈이 없어서.”
칠죄신에 항거하는 길은 너무 힘겨웠고, 인재가 있으면 진짜 누구라도 써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100년 이상 유지되어 온 제국에 대한 반역은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항복을 믿어도 우리 아래 애들이 못 믿는다. 지휘관인 내가 칼처럼 안 굴면 군의 기강이 흐트러져.”
반란은 반란이다.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유야무야 뭉개 버리면 군의 목적성이 상실된다.
포로답게 수갑을 채우고, 가차없이 대해야 기강이 서지.
나는 예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예렌, 네 충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도 다소 박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아, 아, 아닙니다. 폐하. 어찌 감히 제가 이런 처우에 불만을 품겠습니다. 그저, 그저…… 이렇게 다시 폐하를 뵙고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전에 너무 큰 실례를 저질러서…… 송구합니다.”
예렌은 진짜 여차하면 혀라도 깨물 기세로 부끄러워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하시아의 계획, 봉인의 원리가 뭐지?”
“……예, 일단 원론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칠죄신은 흑마력을 다른 차원에서 불러와서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저 역시도 이성을 잃고 온갖 욕망으로 폭주해 버려서…….”
예렌은 쭈뼛거리다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칠죄신은 흑마력에 타락한 이들의 대부 같은 존재입니다. 타락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죠. 하지만 하시아 님이 타락하고, 칠죄신이 추방당하면서 그 상황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
“암살여왕님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네트워크 구축이라고요.”
이셀렌은 멈칫하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시아가 칠죄신이 갖고 있던 흑마력의 지분을 가져왔단 이야기로군. 주식을 매수해서 회사 경영권을 잡았다는 이야기네. 그다음은?”
“칠죄신은 그 지배권을 노리고 하시아 님을 노릴 작정입니다. 그리고…… 하시아 님은 칠죄신이 돌아오면 봉인해 버릴 생각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명령을 내렸다.
“일단 알겠으니까 다들 해산해라. 사주경계 철저하게 하고. 이셀렌은 잠깐 남고.”
“…….”
다들 내 눈치를 보면서 물러났다.
나는 남은 이셀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중, 병사와 장교들 사이에서 세탄의 평판은 좀 어떠냐?”
“전반적으로는 호평이야. 제국을 위해서 혈연도 돌아보지 않는 결단력을 지녔다고 받아들이고 있어.”
“그래, 그러면…… 적당히 네가 불조절해라. 추켜세울 필요는 없지만 불온한 소리가 돌지 않게만 해.”
사실 세탄은 엔라와 검을 직접 섞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장의 소문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리고 악의를 품은 이들이 세탄을 패륜아라고 비방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지만, 그냥 여지를 없애고 싶었다.
이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조치해 뒀어.”
“그래, 그러면 쉬어라.”
“…….”
이셀렌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물러갔다.
아마 내 건강을 염려하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나는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탐랑에 보라색 마력이 맺혀 들었다.
“…….”
카라카스에서 마력검이라는 건, 손에 쥔 상태에서 발휘하는 것이다.
엔라처럼 검강을 쭉쭉 늘이는 건 보기 드문 재주지만 결국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있어야 발휘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비검이라는 재주, 검에 마력을 실어서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염동어검도 쓸 수 있다.
그다음에는 지금처럼…….
“으으음.”
손에 닿지 않은 상태에서도 염을 집중할 수 있었다.
계속 정신을 집중하자 보라색 마력이 서서히 금빛으로 물든다.
이게 바로 7계위를 초월한 힘.
나 말고는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후우, 후우우…….”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도 굉장히 부담이 걸린다.
내가 몸에 힘을 빼는데 칠성칠요가 말했다.
―고민이라도 있나?
“하시아가 봉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칠죄신도 계획이 있겠지. 애당초 토구로나 다른 사도들을 미리 빼돌렸다는 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차할 경우에, 칠죄신은 나에게 지고 추방당하는 것도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영원히 사는 신이라서 잠깐 밖에 나가 있는 건 별 상관없다 이거지.”
―…….
“그런 놈의 계획은 아마도…….”
“음, 뭔데?”
칠성칠요가 말한 게 아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돌아보았다.
백청발의 서큐버스.
하시아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전?
아니, 이제는 뒤가 안 비쳐 보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텔레포트? 아니, 옛날에도 이렇게까지 신출귀몰하지는 않았는데?”
“……그야 그렇지. 흑마력을 쓰면서 내 정신 영역이 확 넓어졌거든.”
“…….”
나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할 말이 너무 많은 데 어이도 없고 기도 찬다.
하시아는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음, 시릭…… 저기, 미안해?”
“작전 개요나 말해.”
“어, 다들 칠죄신을 이상하게 높게 치고 있더라고.”
하시아는 느닷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포악하고 사악한 신이지만 유치하고 한심한 데가 있어. 특히 무대 같은 걸 만들어 주면 좋아라 뛰어오지. 친구가 없어서 불러 주면 만사 제쳐 두고 술자리로 달려오는 백수건달 같은데. 물론 그 술자리를 피바다로 만들지만.”
“그래서?”
“하지만 그러면 아예 술자리 자체를 안 만들게 되잖아? 그런데 시릭, 네가 천년제국이라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 선두에서 자기에게 덤벼온 거야. 심심하던 칠죄신으로서는 엄청나게 달가운 일이었지.”
하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칠죄신은 거기에 정신이 팔렸지. 너를 몰아붙일 수 있다는 생각, 자기에게 반역의 칼날을 들이댄 황제인 너와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앞뒤 없이 저질렀지. 네가 칠성칠요를 손에 넣고, 추방 계획까지 세웠는데도 득의양양했다. 신이라서 자만해 버린 거지. 자기가 원하는 무대, 구도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
“그게 약점이다.”
내가 물어보려는 찰나.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렸다.
바로 옆에 번개가 떨어진 것 같은 소리.
“폐하!”
“괜찮으십니까?!”
귀를 누른 세탄과 하인켈이 뛰어 들어왔지만 나는 듣지도 않고 창가로 달려갔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
쾌청한 오후인데도 저 먼 곳만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검은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번뜩거린다.
하시아는 나직하게 말했다.
“너를 몰아붙이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버린 사악한 신, 세상 모든 게 자기 손바닥이고 자기 마음대로 된다는 신, 추방당한 것조차도 머지않아 돌아올 판에 불과했다고 자만하던 신.”
“…….”
“깜빡하고는 맨몸으로 돌아와 버렸네.”
신을 속여 넘긴 마녀가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