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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76화 (175/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6)

부부 전투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엔라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대다수가 이종족들.

엔라의 진의를 알고 따랐을 것이다.

나는 일단 반사적으로 물었다.

“칠죄신이 그렇게 빨리 돌아온다고? 카미르가 본래 6만 년 이상 걸린다고 했는데?”

“칠죄신은 추방당하기 전에, 만약을 대비해서 토구로나 디에르크를 비롯한 끄나풀을 몰래 숨겨 뒀다. 오래 걸려도 천년 안에 돌아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

흔히들 조선왕조 500년이라고 하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여자, 엔라는 그 2배 이상 살 것이다.

인간인 나에게는 100년도 아득한 시간이지만.

이종족들은 시간관념이 다르다.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칠죄신의 예정된 귀환이 초조했다. 불안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간다. 거기다가 나, 시릭 카라카스와는 멀어졌고 내가 천년 뒤에 돌아와서 해결해 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내가 죽은 직후에 일을 벌이자?”

“…….”

“어차피 일을 벌일 거라면 제국에 분열을 일으킬 불만 분자를 쓴다. 크로셀 후작이나 루크 케드릭 같은 놈들은 기회가 오면 분탕질을 할 놈이었다. 이건 제국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둘러대기 딱 좋네.”

“어차피 사람이 죽어야 할 일이라면 범죄자를 쓰는 게 낫다.”

“나는 찬성할 생각 없지만 대중적으로 먹힐 핑계네. 하시아는 어디에 갔냐?”

“…….”

나는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다시 물었다.

“네 계획은 결국 칠죄신을 처리할 비책이 있다는 전제야. 너로도 안 되고, 하시아로도 안 될 텐데? 하지만 너는 확신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했고.”

사실 나는 정신 오염이라는 비책을 생각했지만 아직 가설 단계다.

엔라가 천천히 말했다.

“하시아는 흑마력을 받아들이면서 차원과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그녀는 평소에 카라카스가 아닌 밀접한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허룡탑보다 희끄무레한 곳이라던데 왕래가 자유롭진 않더군.”

“…….”

그래서 하시아는 종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거네.

마녀들의 계보도에서 이름이 사라졌다가 돌아온 이유, 그것도 카라카스에 없는 존재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겠지.

엔라가 천천히 말했다.

“하시아는 칠죄신을 카라카스의 인근 차원에 봉인할 수단을 마련했다. 전에 네가 한 것이 무작정 멀리 보내는 추방이었다면 이번에는 완벽한 봉인이라고. 그걸 위해서 모든 준비를…….”

“그거 거짓말이다.”

“……뭐?”

엔라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턱을 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타락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하는 게 아니야. 나는 하시아 성격을 알아. 그 여자는 다른 사람이 슬퍼하겠다 싶으면 입을 다물어 버리거든. 칠죄신이 약해졌어도 봉인하는 게 쉬울 리도 없고, 놈이 앉아서 당해 줄 리도 없다.”

“…….”

“하시아를 알고 칠죄신을 아는 내가 장담하는데 완벽한 봉인이 아니야. 그거 깨진다.”

엔라는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의혹이 들기 시작한 거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군사행동에 철두철미해서 철혈이라고 불리지. 하지만 지금 허점을 드러냈군.”

“……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결국 다 털어놓고 나에게 진심을 알아 달라고 하고 있다.”

“네가 막판에 다 알 거야 이미 각오한 바다. 마지막까지 숨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세탄이 들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텐데.”

멈칫.

엔라는 그제야 세탄을 돌아보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서히 굳어지는 얼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본심을 꾹꾹 숨기고 있었지만 자식만큼은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해 버린 거지. 그래서 세탄이 듣는 앞에서 지금까지 벌인 일을 변명해 버린 거다.”

“…….”

“어차피 내가 알고 있으리라는 걸, 내가 말해 줄 수도 있다는 걸 변명 삼아서 말이지.”

즉, 내가 판을 깔면서 눈치를 주니까 엔라가 낚였다.

엔라는 본래 세탄에게 이런 속사정을 전부 밝힐 마음이 없었다.

엔라가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결국 너는 극단적으로 비정해지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거든.”

나는 손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휙 떠오른 탐랑.

세탄의 관자놀이를 향해서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잠, 잠깐?”

엔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내가 무슨 카드를 만지작거리는지 그제야 깨닫고.

“너는 은연중에, 내가 세탄을 인질 삼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인질로 써야 정상 아니냐?”

“…….”

“반란을 일으키면 그 직계가족을 처형하거나, 인질 삼아서 위협하는 게 당연해. 그런데 너는 내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식을 아낀다는 걸 아니까.

내 신하 중 누구도, 세탄을 인질로 삼아서 엔라를 설득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다들 내가 그러리라고 전혀 생각을 안 했다.

심지어 엔라도.

나는 앞만 보며 말했다.

“세탄.”

“……예, 폐하.”

“미안하다. 각오해라.”

물론 진짜로 할 생각은 없다.

아들을 해치느니 내 가슴에 칼을 박고 만다.

그러나 여차하면 저지른다는 기백을 품어야 엔라를 눌러 버릴 수 있다.

세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제국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시릭.”

엔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잘게 흔들리고, 틈이 드러난다.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왜? 넌 제국에 불을 지를 생각이면서 내가 자식을 해치는 건 안 돼? 출장 나갔다가 집에 오니 개판이 되어 있는데 어디서 잘난 척 큰소리야?”

“…….”

“뭐? 실패할 반란? 너 결국 나보고 네 목 치라고 이러는 거지? 와, 집안 꼴 봐라. 내가 너 죽인 다음에 세탄하고 같이 부둥켜안고 서로 펑펑 울 줄 알았어? 전쟁터를 너무 구르다 보니 미쳤냐?”

“폐, 폐하. 말씀이 좀 지나치신…….”

침묵하던 예렌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나는 눈을 부라리면서 쏘아붙였다.

“닥쳐, 타락한 것아. 타락 안 했어도 닥쳐. 지금 집안 문제다.”

“…….”

예렌은 깨갱하고는 고개를 꾸벅, 꾸벅 숙여 보였다.

나는 엔라를 다시 노려보았다.

“일을 아주 엿같이 만들었어. 정말 네가 그딴 생각을 품었더라면, 자식에게 칠죄신의 두려움을 물려주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었다면 다른 황후들에게 사정을 밝히고 협조를 구했어야지! 그러면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잖아!”

“…….”

“내가 하는 거 보면 시릭의 환생이라는 거 금방 알았을 텐데? 그런데도 관두지 않고 계속 저지른 건, 나에게 마지막에 죽겠다고 이러는 거지?”

나는 쏘아붙였다.

“넌 결국 하시아를 저버린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이 판을 꾸민 거지. 자기 혼자 다 뒤집어쓰겠다고.”

랑에이 말이 맞다.

엔라는 당시의 황후들 중에서 가장 군 지휘권이 높았고, 그래서 그 일에 가장 큰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그걸 수습하겠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거다.

전우였던 다른 황후도, 자식도 저버리고.

자기 혼자서.

“나에게 속죄하겠다고 제국에 불을 질러? 네 머리에 불을 질러 주고 싶어지네.”

“……가차없군.”

“됐다. 더는 말을 말자. 파군의 남은 조각은?”

“내가 갖고 있다. 하지만 바로 내줄 수는 없다.”

엔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턱을 괴고는 물었다.

“이유는?”

“여기까지 피를 흘렸는데 이제 와서 돌아갈 순 없으니까. 우리 둘이 결판나면 하시아가 카라카스로 돌아와서 봉인 계획을 완수할 거다.”

“네 멍청한 계획은 지금 이 시간부로 모두 다 폐기한다. 이제부터는 내 계획대로 진행한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치고 파군의 마지막 조각을 회수한다. 아, 너와 예렌은 발악해도 상관없다. 단, 뒤에 있는 병력을 이동시키면 세탄의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세상에.”

엔라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하다, 하다 내가 자식을 인질로 삼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으니까.

물론 나도 지금 몹시 불편하다.

절대 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들의 목 운운하다니.

하지만 내가 참고 말한 덕에, 괜한 병력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

엔라는 한숨을 쉬더니만 자기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둘둘 싸인 손수건을 푸니 나오는 칼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됐다. 그러면…….”

퍽!

나는 바로 원탁을 걷어찼다.

예렌의 시야를 가리는 쪽으로.

“윽?!”

막 예렌이 등 뒤의 활을 잡는 게 보였지만 이미 늦었다.

활은 결국 잡고 시위를 걸었다가 놓아야 한다.

반면 내 비검은 의지를 발하면 바로 날아간다.

“칵?!”

시야를 가린 테이블을 뚫고, 탐랑이 예렌의 몸통에 박혔다.

이어서 녹존까지 날려서 예렌의 몸에 박아 버린 나는 앉은 그대로 거문과 문곡을 휘둘렀다.

부우웅!!

엔라가 막 나를 향해서 대검을 내리치고 있었으니까.

카아앙!!

칼을 교차해서 막기는 했지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앉아 있던 의지가 흔들거린다.

나는 그대로 몸을 뒤로 눕히면서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적의 공격을 막던 중에, 염동력을 이용한 발차기.

엔라는 얻어맞고 뒤로 물러났다.

“……으음.”

타격은 없지만 감정적으로 동요한 얼굴.

보통 때라면 내 이런 공격에 얻어맞진 않았을 거다.

흔들리는 시야.

일부러 세탄을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세탄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셈이다.

“…….”

서로 시선 교차.

나는 바로 어깨로 밀어붙이면서 엔라를 향해 파고들었다.

마력질주에 이어서 마력검강!

“흐으읍!”

엔라 역시도 마력검강으로 응전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하던 공격을 멈칫하고는, 염동결계를 써서 받아 냈다.

퍼어엉!!

그래도 몸이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들고 있던 문곡을 날려 버렸다.

“큭?!”

공격 직후의 빈틈, 엔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비검이 어깨를 뚫어 버렸다.

줄줄 흘러나오는 피.

“…….”

엔라의 안색이 단번에 안 좋아졌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항복해라, 항복하면 정상참작해서 재판은 받게 해 주마.”

“……보통 항복하면 교수형으로 탕감해 준다고 했을 텐데?”

“…….”

엔라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야 나에게 낚인 걸 안 것이다.

내가 정말로 세탄의 목숨을 저울에 올릴 리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고, 혹시라는 게 있다.

내가 황제로서 책무를 우선해서, 세탄을 정말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내 언동에 엔라는 그 의구심을 품었고, 그 순간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

보통 사이라면 이런 단순한 대화로 서로를 이렇게까지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와 엔라는 적일 때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

세탄은 검을 뽑아서 예렌을 제압하고 있었다.

녹존이 마력을 빨아들이니 허튼짓은 못하겠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하인켈이 세탄의 옆에 딱 붙어서는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황후 전하!!”

엔라와 내 대치를 본 반란군이 뒤늦게 달려왔다.

싸움을 시작한 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군사행동이 늦었다.

하지만…….

“와아아아!!”

“공격해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반란군의 뒤편으로 돌아간 제국군이 공격하고 있었다.

어차피 엔라와는 평화롭게 끝날 리가 없다.

일부러 병사를 100명만 데리고 온 나는 나머지를 우회해서 반군의 뒤를 찌르게 만들었다.

모든 상황을 다 깨달은 엔라는 뒤쪽을 향해서 고함을 쳤다.

“괜히 항전할 필요는 없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그래, 그래야지.”

내 말에 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패를 인정하고.

“……그래, 설마 세탄을 데리고 출정할 때부터 이걸 계획하고 있던 건가.”

“세탄이 네 약점이라서가 아니야. 세탄은 너와 맞붙어야 한다.”

반란자의 아들로서 살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로 이 모든 계획을 실행했던 엔라지만 아들 앞에서는 어머니의 틈을 보여 버렸다.

엔라 본인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빈틈.

“……어떻게 알았지?”

“같이 산 부부니까.”

전쟁터에서 나와 함께 싸우는 것만 알던 여자가.

내 아이를 갖게 돼서 몸가짐이 달라지고, 먹는 것도 가리고.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품에 안아 보려고 하고, 열성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나도, 엔라도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엔라는 이 전란에서 자기 자식을 무조건 배제하려고 했고.

나는 그런 엔라의 빈틈을 읽고는 카운터를 친 것이다.

“비정한 아버지의 승리라는 거지.”

“아니, 비정한 건 나였다.”

엔라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면서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말했다.

“그때 말이지. 다른 황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이리 뒤처지는데, 만약 하시아가 아이라도 낳으면 어떻게 될까. 시릭, 네 안에서 내 아이가 뒤로 확 밀리게 되는 거 아닐까?”

“…….”

“추하고 더럽고 작은 생각이지. 나도 내가 이런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 자신이 구역질이 나서 얼른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그때의 결정에, 군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구원요청의 편지를 찢어 버리는 내게 과연 그런 마음이 한 톨도 없었을까?”

엔라는 착잡하게 말했다.

“일이 모두 헝클어지고, 엉망이 되고 너무나 괴로웠다. 나 자신이 역겹고 추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을 속인 죄가 너무나 크고, 커서…… 참을 수가 없었다.”

“…….”

“그래, 그러니까 명예를 일말이나마 되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당신에게 이리 진의를 토로해 버린 거야…… 사실 어차피 당신이라면 알아주리라는 건 핑계다. 그래, 핑계였다. 당신이 몰랐다면 결국 내가 먼저 밝혔겠지. 나는 그런 여자니까.”

엔라는 간곡하게 말했다.

“세상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증오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리했다는 걸, 약간이라도 알아준다면 그걸로 족했다.”

“…….”

“그래, 마지막으로 다시 보게 돼서 행복하다.”

엔라의 검감이 길어진다.

5미터를 넘어서, 이제는 10미터로.

최후의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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