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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75화 (174/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5)

정상회담

요새 도시 워길드.

서부의 중심, 그리고 제국군과 칠죄신의 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유명한 도시다.

덕분에 일종의 관광 명소, 테마파크가 되었다.

도시 곳곳에 당시의 전투 상황을 재현한 박물관과 체험관을 만들고, 홍보에 이용했다.

이는 공공사업이었다.

제국의 기틀, 뿌리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니까.

나는 장남, 세탄을 부관 삼아서 워길드 안으로 입성했다.

보통 도시에는 1천의 병사들이 숙영할 곳이 마땅하지 않지.

하지만 도시 내부를 경비하던 군부대가 자리를 비웠고, 일단 거길 사용하기로 했다.

다들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고 짐을 푸는 상황.

하인켈이 나를 찾아왔다.

“주군, 재차 검토했지만 진형이나 도시 안쪽에는 특별한 술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머무르고 있던 시민들도 곧 시가전이 벌어질 거라는 걸 눈치채고는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다는 안 나가지?”

“……예, 지금 살펴보고 있는데 10만 명 이상이 남은 상태입니다.”

도시가 전쟁터가 될 걸 알면서도 왜 버티느냐고?

사람은 터전을 그리 쉽게 저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설마 제국군끼리 도시 안에서 맞붙겠냐는 안이한 생각도 있고.

하인켈이 덧붙였다.

“오히려 찾아오는 외지인들은 늘었다고 합니다. 다들 칼 좀 쓴다는 녀석들인데 아무래도…….”

“출정식에서 하시아가 한 말에 들썩거리고 있다 이거네. 얼른 입대 신청이라도 받고 싶어지는데.”

나는 웃어 보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엔라의 위치는?”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습니다. 북쪽에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들어온 걸 알면서도 전혀 막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병력 500, 아니, 200…… 아니, 아닌가. 급습이 불가능하겠군. 이미 엔라는 우리가 들어온 시점에서 곳곳에 요원들을 배치해 놨을 거다.”

적도 제국군.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은 나만 쓰는 게 아니다.

한데 하인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나 더,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워길드 안에 있으면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이 외부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 밖의 다크엘프에게는 연락이 안 된다?”

“예, 이미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도시 안에서는 서로 연결이 되는데, 밖으로는 벽에 막힌 것처럼 걸립니다. 도시 밖으로 나가면 이상이 없는 거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이 워길드의 특수성 같습니다.”

“옛날에는 안 이랬지?”

“예, 아주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도 마찬가지일 거다. 칠죄신이 돌아오는 영향인 것 같다.”

“예?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

하시아가 그래서 바깥과 연락을 못하고 붙잡혔으니까.

나는 이마를 누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내가 이걸 왜 몰랐지?”

“무슨 말씀이신지…….”

“칠죄신이 카라카스에서 마지막으로 추방당한 곳이 바로 이 근방이다. 그러면 돌아올 때도 이쪽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겠지. 나갔던 문으로 돌아오는 거야.”

“아…….”

하인켈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애당초 신을 다른 차원으로 추방했다는 사실, 또 돌아온다는 사실이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치에는 맞다.

하인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군, 정말로 만에 하나 칠죄신이 돌아온다면 손쓸 방법이 있으십니까?”

“있긴 하다.”

칠죄신의 정신을 오염시켜 버리면 된다.

아직 구체적인 방법까지 떠오른 건 아니지만.

하인켈은 안도한 표정으로 더는 묻지 않았다.

군사기밀이라고 여기고 알아서.

내가 쓴웃음을 짓는데 막사 안으로 세탄이 들어왔다.

“사령관님, 급히 보고 드립니다. 적에게서 사절이 왔습니다.”

“엔라지? 어디서 따로 회담이라고 갖자고 하디?”

“예, 워길드의 시민 광장에서 수장끼리 대화를 하자고 합니다. 파군의 마지막 조각을 넘겨주시겠다고 합니다. 병력을 대동해도 상관없다고 합니다만…….”

이건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와야지.

“엔라의 옆에 예렌이 앉아 있으면 만나겠다고 해. 시간은 내일 정오로 하고.”

3km 밖에서도 저격을 가할 수 있는 예렌.

활개 치게 놔두면 아군이 뭘 해 보지도 못하고 붕괴해 버릴 거다.

내 검이 닿는 범위에 둬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 답변을 하겠습니다.”

세탄은 경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나는 물러나는 아들의 등을 보면서 하인켈에게 말했다.

“엔라는 아마도 내 옆에 세탄이 앉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 거다.”

“예.”

“하인켈, 너는 나를 개인 자격으로 섬기고 있다. 너는 제국군이 아니지.”

나는 하인켈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약,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세탄만큼은 피신시켜라. 이건 명령이다.”

“목숨을 걸고 명 받들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뜻을 거스르더라도 세탄의 목숨을 우선해라.”

“…….”

하인켈이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가 단단히 각오했다는 걸 알고.

“알겠습니다. 저를 믿고 이런 위험한 임무를 맡겨 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이 될 거다. 미안하다.”

사실 하인켈은 약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충심, 그리고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을 능란하게 쓸 줄 알았다.

이런 시가지 내에서, 사람 빼돌리는 데에는 초일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적은 엔라와 제국군, 나아가서 칠죄신이었다.

하인켈에게 여차하면 죽으라는 소리를 한 셈이다.

하인켈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섬기게 된 분이 초대 황제 폐하셨다니, 그것만으로도 저는 제 눈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싸우겠습니다.”

“……고맙다.”

나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일 오후의 회담에 대비해서 지형 정찰부터 해 두자.”

다음 날 오후.

나와 엔라가 각자 병력을 이끌고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민광장이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협상이 결렬되고, 전투가 벌어지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나는 가늠하고는 아군 100을 데리고 광장으로 향했다.

보고를 받은 적병의 수는 300이니 너무 적은 수다.

하지만 고르고 고른 정병들은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내 옆의 세탄까지도.

시민광장.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공간.

평소에는 제국의 시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거닐면서 담소를 나눌 자리지만.

지금은 군복을 입은 무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광장의 중앙에 원탁이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푸른 피부, 화려한 미모의 마족.

엔라 워프레임이었다.

갑주를 입고 칼을 차고 있지만, 정작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옆에 앉은 엘프가 예렌이다. 이미 알겠지만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절대 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예.”

말에서 내린 세탄도 긴장하고는 말했다.

100명의 결사대를 한 번 돌아본 나는 각오를 다지고는 앞으로 걸었다.

이미 놓인 두 개의 의자.

나와 세탄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깍지를 끼고 턱을 괸 엔라가 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다시 보게 돼서 다행이네, 시릭.”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예렌을 살폈다.

예렌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뺨을 붉히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수치심에.

“예렌도 정신이 좀 돌아왔네? 어떻게 된 거야? 칠죄신이 돌아오는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타락한 이들이 제정신을 차린다는 내 추측이 맞는 건가?”

“……송구합니다, 폐하.”

예렌은 쩔쩔맸다.

전에 나에게 무자비하게 화살을 날리고, 죽여서라도 데려가겠다고 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지금 반응만 보면 내가 기억하던 시절의 예렌이었다.

엔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이론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칠죄신이 곧 흑마력인 게 아니다. 흑마력은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드는 오염 물질일 뿐이고, 칠죄신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지 절대적인 명령권을 갖는 건 아니다. 그리고 칠죄신이 돌아온다는데 정작 그 명령권은 헐거워지고, 약해지고 있다. 맞냐?”

“음, 그래.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네? 니들 작정하고 했어.”

나는 기가 막혀서 쏘아붙였다.

“너희들 제정신이 아니네? 칠죄신을 일부러 일찍 불러왔지?”

“……예?”

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침착하던 세탄이 경악했다.

나는 엔라를 노려보았다.

“애당초 테러범들, 제국해방군이라는 놈들의 목적은 제국을 혼란케 만들어서 칠죄신이 보다 빨리 강림하게 만드는 거야. 칠죄신이 언젠가 돌아오는 건 당연하지만, 본래 예정대로라면 훨씬 뒤였어.”

“……”

“칠죄신을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흑마력에 대한 지배를 잃어버린 상태로, 예전보다 약해진 상태로 불러와서 끝장낸다. 그게 바로 너희들의 계획이었다.”

엔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넘겨짚기가 심하군.”

“아니, 그러면 서부군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뭉개지는 게 말이 안 돼. 엔라, 너라면 게릴라전을 벌이건 무슨 수단을 쓰건, 우악스럽게 전쟁을 질질 끌 수 있다. 하지만 마치 그럴 의욕이 없다는 것처럼, 일부러 자기를 노출해서 나를 이쪽으로 불러냈어.”

“…….”

“더 엿 같은 게 뭔지 알아? 네가 어떤 숭고한 목적을 대건 나한테는 개소리라는 거야.”

제국해방군의 테러로 사상자가 나왔다.

흐르지 않아도 될 피가 흘렀다.

지금도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여기가 아닌 곳에서 랑에이와 레릭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나는 이런 방식에 절대로 찬성할 리가 없어. 아군을, 국민을 희생하면서까지 이 지랄을 하겠다는데.”

“하지만 나는 한다.”

엔라는 차를 마시면서 작게 웃었다.

워낙 화려한 미모라서, 마치 꽃이 활짝 만개하는 것 같았다.

“천 명의 아군을 죽여서 만 명의 적을 죽일 수 있다면 해야지.”

“개소리 마라. 자중자란이잖아.”

지구, 로마군에서는 10분의 1형이라는 게 있었다.

아군 10명중 1명을 제비로 뽑고, 나머지 9명이 그 1명을 때려죽이는 거다.

명령에 따라서 전우를 살해해야 했던 이들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엔라가 벌인 일은 거의 이 수준이었다.

엔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릭, 다 안다. 네가 옳다는 것, 네가 반대할 거라는 것, 하지만 나와 나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다 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우리들의 반란은 실패한 반란, 역사에 권력을 탐한 반역자이며 제국을 어지럽힌 역도로 기록될 것이다.”

“…….”

“그래도,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했다.”

엔라가 분연하게 말했다.

“누군가는 손을 더럽혀야 했다. 누군가 악한 짓을 해서라도 처리해야 했다. 우리의 자식에게, 우리들의 후손에게 칠죄신이라는 사악한 짐을 물려줄 수는 없으니까!”

“…….”

“시릭, 너는 흠을 찾기 어려운 황제이며 군사 지휘관이다. 하지만 단 하나, 네 문제는 바로 인간이라는 거다. 너는 인간의 방식으로만 사고한다.”

“뭐?”

엔라는 조용히 말했다.

“내 자식, 내 손자의 시대에 칠죄신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알면서도,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

인간은 100년을 산다.

하지만 이종족은 천년, 그 이상을 살아간다.

비록 추방했다고는 하나 언젠가 돌아올 칠죄신.

인간에게는 너무나 까마득한 미래로 여겨지지만…….

“……너희들에게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 이거냐?”

“그러하다! 언젠가 사악한 도적이 들이닥쳐서 내 아이를 해치고 내 터전을 불사를 걸 아는 데도 눈을 감고 모른 척을 해야 할까?”

“…….”

엔라는 나를, 내 옆에 앉은 자기 아들을 보며 말했다.

“네 아이를 낳고, 내 가슴에 안아 보았을 때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 칠죄신이 없고, 전쟁이 없는 행복한 세상을 안겨 주고 싶다고.”

“…….”

“그러니 싸워야 한다. 몸과 명예가 더러워진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한다.”

철혈성군 엔라가 크게 외쳤다.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사악한 신에게서 제국을 해방해야 한다!!”

제국해방군.

어리석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절실한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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