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2)
예고 승리
바론홀 요새.
제국의 중앙에서 서부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넘어야 하는 디오르 산맥의 요지에 지어진 군사시설이다.
제국철도가 완공되었다지만 바론홀 요새의 중요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바론홀 요새에 웅크리고 있는 1만 군세가 튀어나와서 철도를 폭파한다면, 서부로 한껏 들어간 중앙군은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그러니 중앙군으로서는 바론홀 요새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바론홀 요새의 사령관.
천검장 베로드는 의자에 앉아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베로드 사령관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갑자기 뭔 소리인가?”
베로드는 마족이었다.
칠죄신과의 전쟁에서는 엔라의 아래에서 싸웠고.
많은 공을 세웠지만 워낙 성격이 불같고, 그만큼 사고도 많이 쳐서 요주의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장성으로 진급도 못 했겠는가.
“중앙군의 사절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요새를 개방하면 어떤 잘못도 묻지 않고 병사들의 목숨을 보장하겠다고 합니다.”
“집어치워. 우리는 중립이다. 서부군과 중앙군의 싸움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베로드의 말에 십검장은 한숨을 쉬었다.
“중앙군의 입장에서는 그게 말이 안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그야 그렇겠지. 여기서 더 서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이 바론홀 요새를 비워 버리고 싶을 테니까.”
“그러면…… 엔라 황후를 따르신다는 겁니까?”
서부군의 사절?
베로드는 개소리하지 말라면서 쫓아내 버렸다.
베로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제국군이고 황제 폐하의 명령만을 따른다. 중앙군과 서부군의 권력 다툼 따위 알 바 아니다.”
“소문에 따르면…….”
“리젠 리브라타가 폐하의 환생이라는 것 말인가? 그딴 유언비어를 어떻게 믿나.”
베로드는 선을 딱 그었다.
“그렇다고 엔라를 믿는 것도 아니다. 이건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 멍청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아. 귀한 병사들을 그딴 장난질에 휘말리게 할 순 없지.”
“……하지만 중앙군이 공격해 올 겁니다.”
“흥.”
베로드는 코웃음을 쳤다.
“나는 시릭 카라카스 폐하의 아래에서 싸운 남자다. 나는 그분을 알아. 정말로 그분이라면 이 요새를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이런 미친 짓거리에 장병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그러면…….”
“폐하라면 공격하지 않아. 하지만 공격하면 폐하가 아니지.”
베로드가 눈을 번뜩였다.
“감히 폐하를 함부로 사칭한 개자식의 머리통을 까부술 기회가 오는 거다.”
“……그, 그렇군요.”
“여긴 내가 폐하에게 받은 땅이다! 어떤 새끼에게도 못 내준다!”
요새 사령관이 전면전을 각오했다.
* * *
바론홀 요새 앞.
중앙군 3만 병력들이 대기 중이다.
도착한 나는 지휘 막사에서 전황을 보고 받았다.
먼저 와 있던 랑에이가 말했다.
“요새의 방비가 물샐 틈이 없어. 사기는 충천하고, 요새 벽도 마족들이 특별히 보강했으니까 폭탄도 통하지 않아. 한다면 공성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피해가 커지지. 사절은?”
“자기들은 중립이라고, 개입하지 말라면서 쫓겨났다.”
“베로드라면 그럴 만하지. 사절이 살아서 돌아온 게 어디야.”
나는 픽 웃었다.
내 옆에 선 레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은 워낙 성격이 불같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거 참 어렵겠습니다. 베로드 요새는…….”
“공략 방법이 없지?”
제국군의 군사 정비는 바로 나, 시릭 카라카스가 했다.
즉,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어책은 다 꾸려 뒀다.
“이런 경우에 적장이 실수하기를 바라야 하는데, 베로드는 노련하지.”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습니다. 바론홀에 1만의 적군을 놔두고 지나가는 건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여기에 병력 일부를 남겨 두고 지나치는 건?”
랑에이가 수를 내었다.
레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로드가 치고 빠지는 기동전을 할 것도 고려하면…… 여기에 대략 2만에다가 이름난 장수를 남겨 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병력이 너무 줄어듭니다. 그렇다고 중앙군의 지원군을 더 불러들이면 전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요.”
“위험하네.”
“예, 지금 제국 전체가 이 일전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물론 모든 전투가 중요하지만…… 이 바론홀의 전투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그래야 반란 진압이 수월하게 풀립니다.”
레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한 번의 전투를 그르친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폐하가 시릭 카라카스의…….”
“그래, 나, 리젠 리브라타가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라는 걸 전장에서 증명하는 무대지.”
이번의 전투가 대단히 중요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정공법으로 가자. 나 혼자 간다.”
“……예?”
“뭐?”
둘 다 놀랐지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혼자 바론홀 요새로 간다고.”
“자, 잠깐만. 폐하!”
“내가 가서 베로드 하나만 깨면 돼. 그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다.”
“만나 주겠습니까? 아니,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레릭이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릭, 네 말이 맞다. 이 한 번의 전투로 이 내전의 향방이 단숨에 갈린다. 가장 좋은 건, 저 꼬장꼬장한 베로드가 스스로 문을 열고 요새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거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가서 해결 본다.”
랑에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릭, 말은 알겠지만 내가 같이 갈게.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
“아니, 정말 만에 하나 함정이 있다면 나 혼자 치고 빠지는 게 낫다. 그리고…….”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혼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일이 편하다. 그러니 다들 여기에서 기다려.”
“…….”
두 사람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추가로 말했다.
“아, 하지만 아군 사기는 올려야지. 내 뒤에서 아군이 지켜보게 해.”
이야기를 마친 나는 새삼 중앙군의 태세를 점검했다.
그리고 내 무장상태로 점검했고.
칠성칠요.
유하가 파군을 보다 수복하면서 이제 칼이 다섯 자루로 늘어났다.
목검 문곡(木劍 文曲), 금검 염정(金劍 廉貞).
“거기다가 정신력이 놀라울 정도로 충만하군.”
자식들과 아내들과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를 풀면서 내 정신력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정신력의 양만 따지면 이미 전생 이상이었다.
“자, 그럼.”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요새로 향했다.
“지, 진짜 가는 거야?”
“누가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정말로 홀연하게, 혼자서 요새로 향하자 제국군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특병, 부장급에게 말하면서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고.
하지만 미리 말해 둔 게 있으니 요새의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상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응?”
“미친놈인가? 혼자서 오네?”
나 혼자 다가가자 망루에 서 있던 이들이, 의아해하면서도 나에게 화살촉을 겨누었다.
하지만 바로 쏘지는 않는다.
혹시 사절인가 싶으니까.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외쳤다.
포효.
적과 아군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요새의 병사들은 들어라! 나는 지금 중앙군을 이끌고 온 리젠 리브라타다! 지금 안으로 들어갈 테니까 괜한 공격은 하지 마라!”
“……뭐?”
“미친 새끼 아냐!”
나는 더는 말을 않고는 전진했다.
척. 척.
요새의 벽으로 다가가는 나를 무수한 화살이 겨누었지만 무작정 시위를 당기지는 않았다.
일단 상관의 허가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거겠지.
물론 나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탁. 탁!
나는 염동력을 써서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비행을 쓰면 요새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 병사들에게 보이는 퍼포먼스가 중요하다.
압도적으로.
“……벼, 벽을 걸어 올라오고 있어?”
“저거 뭐야?!”
병사들의 괴성을 질렀다.
수인의 신체 능력이라면 벽을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평지 걷듯이 오르지는 못한다.
느긋한 걸음으로 내가 성벽 위에 오르자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움직이지 마라!!”
“허튼수작 하면 바로 베겠다!”
기다리고 있던 부장급 다섯이 내 앞을 막고는 외쳤다.
그 뒤에는 일반 병사 100여 명.
순식간에 모여든 게 일사불란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기 위해서다.”
“헛소리! 무기를 버리라고…….”
나는 무시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앞장서서 말하던 부장 하나가 내 머리를 향해서 칼을 휘두르고, 다른 하나는 내 허리를 노렸다.
노련한 움직임.
제국군 총수인 나로서는 흡족한 움직임이었다.
팅!!
양옆으로 들어온 공격은 내 염동결계에 튕겨 나갔다.
본래 이동하면서 염동결계를 쓰는 건 정신력 소모가 크지만.
급격하게 성장한 정신력 덕분에 어렵지 않았다.
“뭐…….”
“폐, 폐하의 각성 능력이잖아?!”
앞장섰던 다크엘프 부장이 깜짝 놀라서는 나를 새삼스럽게 보았다.
염동결계를 알아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면 이야기가 빠르지. 물러나라.”
“이이익!!”
뒤에 서 있던 부장 하나가 내 머리를 쪼개 버리려고 했지만, 소리쳤던 다크엘프 부장이 얼른 손목을 붙들어서 막았다.
나를 바라보는 다크엘프 얼굴에는 경악과 놀라움의 표정.
내가 정말 시릭 카라카스가 맞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베로드는 어디에 있나?”
“그, 그게…… 이 아래쪽에서 물자를 확인하시는 중입니다.”
“알겠다. 비켜라.”
내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자 부장들은 망설이다가 옆으로 물러났다.
뒤에 서 있던 병사들도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장병들 사이에서 복잡하게 오가는 시선.
내가 만약 칼을 뽑아서 휘둘렀다면, 이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홀로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시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들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척, 척.
내가 아래로 내려가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수록 병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휘둥그레지는 수천 개의 눈.
내가 정말 시릭인지 알고 싶어하는 눈빛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무기를 내려놓고 나를 따르리라.
“뭣들 하고 있는 거냐!!!”
그때 말을 탄 장수가 달려와서는 내 앞을 막았다.
견장을 보니 검장급이다.
“나는 제국의 십검장 팔레스다! 어디에서 온 누구인데 이리 진중을 어지럽히는가!”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 그리고 제국군 총수, 시릭 카라카스다.”
“……감히 폐하를 참칭하는가!!”
“야, 상식적으로 가짜 놈이 혼자 찾아와서 이러겠냐? 내가 진짜니까 온 거지.”
나는 혀를 차고는 말했다.
“애들 피 흘리는 일이 없게 내가 직접 왔다. 베로드는 어디에 있냐?”
“……으으음.”
팔레스는 신음을 흘리면서 나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숙고하던 그는 말에서 내리고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일단 안내하겠다. 따라와라.”
“건물 안에 있다면 밖으로 나오라고 해라. 나는 요새의 모든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팔레스는 더욱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척척.
수천 병력의 시선들이 모인 끝에.
지휘 막사 앞에 당당하게 선 마족 남성이 보였다.
허리에 손을 얹은 천검장 베로드.
“네놈이 바로 폐하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미친놈이냐?”
“다 맞는 말이네. 1만 병사가 지키는 요새에 총지휘관이 혼자 들어오니 미친 놈이 맞고, 시릭의 환생이 맞고, 그걸 주장하는 것도 맞으니까.”
베로드는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봐도 네놈은 폐하로 안 보인다.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라.”
“돌아갈 거면 오지도 않았다. 장병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언제, 어디든지 갈 것이다.”
“…….”
베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베로드, 너는 나도 엔라도 못 믿겠으니 중립을 선언했지. 하지만 그건 틀렸다. 네가 정말로 이 판에 끼고 싶지 않다면 진즉에 이 요새를 버리고 물러나야 했다.”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다. 중앙군이 이 요새를 무시하고 진군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한데 너는 중립을 고집하고, 이 요새에서 뭉개고 있었고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생겼다.”
“네놈들이 덤빈다면 상대해 줄 수밖에.”
“이 어리석은 놈아. 적이 합리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기대를 왜 하냐? 차라리 엔라에게 붙었다면 모를까.”
나는 논리적으로 말했다.
“이 요새에서 버티고 있는 자체가, 엔라의 편을 들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너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을 텐데? 중앙군이 경거망동하지 않을 거라는 애매한 기대로 버티다니. 그러다가 우리들이 칠죄신과의 싸움에서 많은 피해를 보지 않았더냐?”
“폐하인 척 말하지 마라!”
베로드가 불을 뿜을 기세로 외쳤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야, 황후 6명과 중앙대장군 레릭이 하나같이 멍청이라서 내 혓바닥에 속아 넘어갈 확률이 높겠냐. 아니면 내가 진짜로 시릭의 환생이겠냐?”
“…….”
“일개 사절을 보내도 될 일을, 굳이 직접 와서 일일이 설명하는 놈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었냐? 피 좀 덜 흘리겠다고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총사령관이 나 말고 있으면 말해 봐라. 나한테 어깨 뚫린 다음에야 충성하던 놈아.”
내가 쏘아붙이자 베로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 그걸 어디서…….”
“평상시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일일이 증명할 시간이 없다고. 그러니까 요새를 버리고 물러나라.”
베로드가 눈을 비볐다.
방금 내가 한 말, 베로드는 옛날의 나에게 덤볐다가 어깨에 구멍이 난 다음에 패배를 인정하고 아래로 들어왔다.
극비까진 아니지만, 잘 알려진 이야기도 아니었다.
베로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전투망치를 꽉 잡았다.
“폐하처럼 말해 봐야 소용없다! 이 요새는 내가 폐하에게 지키라고 명령받은 곳! 잡놈의 세 치 혓바닥으로 내가 물러날 것 같으냐!”
“세 치 혓바닥은 몰라도 석 자 칼은 통하겠지.”
나는 칼을 뽑지 않고 들어 올렸다.
내 주변에 스스로 떠오르는 5자루의 칼.
“으으음…….”
이 광경을 아는 베로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베로드, 네가 여전히 변치 않은 충성을 바친다니 정말 고맙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백척간두, 나랏일이 더 중하니 우악스럽게 너를 눌러야겠다.”
“칼로 겨뤄 보겠다는 것이냐? 인간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설사 마력전승을 잘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포효로 말을 잘랐다.
“군을 이끄는 무장이 말이 많구나! 다시 네 어깨에 구멍을 뚫어 준다면 나를 인정해라! 내가 바로 시릭 카라카스라고!”
“네놈이 이긴다면 말이지!”
베로드가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3초 만에 온몸을 휘감은 보라색 마력.
보통 사람의 한계인 7계위.
베로드 역시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수없이 싸워온 용장.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나 역시 보라색 마력을 휘감았다.
단 1초 만에.
“이겨서 믿게 해 주마.”
전생의 나는 제국 최강.
현생의 내가 그 자리를 되찾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