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1)
총사령관의 편지
제국의 중앙군이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물론 황도와 각지의 방비를 해야 하니 33만 전원을 보낼 수는 없다.
고르고 고른 정병 7만.
선봉을 시작으로 철도로 운송을 시작했다.
최종 목적지는 서부의 중심 도시인 워길드였다.
출발 30분 전.
공적인 마무리를 마친 나는 사사로운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황도역의 사무실.
“……7만은 너무 적지 않느냐?”
마주 앉은 로데릭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묘하게 어색해하는 기색.
나는 모른 척, 웃으면서 말했다.
“서부군이 20만이라지만 대의명분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압박하면 알아서 붕괴할걸요. 제가 시릭 카라카스라는 게 알려지면 더욱 그렇고요.”
“얌전을 빼네?”
자리에서 일어난 칼비나가 내 뒤에 서서는 목을 팔로 감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자꾸 그러면 황제고 뭐고 확 졸라 버린다?”
“일단 제가 이번 작전의 총지휘관인데요.”
“아직 출발 전이거든?”
칼비나는 으름장을 놨지만 진짜로 조르진 않았다.
내 옆에 앉은 가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사실 리젠 도련님이 초대 황제의 환생이셨고 최근에 기억을 되찾으셨다. 그겁니까?”
“어디의 사이비 종교 같아서 짜증 나네. 내 귀여운 남동생이 사실 다리털 숭숭 난 아저씨였다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야.”
“칼비나, 폐하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로데릭은 평소처럼 말했지만 묘하게 힘이 없었다.
나는 무릎에 손을 얹고는 로데릭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두 남매는 이미 내 정체를 알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다시 보니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사실 제가 좀 더 자주 뵙고 리젠이라는 걸 보다 확실하게 증명했어야 마음을 놓으셨을 텐데요. 황실 내부의 문제가 꽤 많아서 그쪽에 집중하느라 소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형님의 동…… 으아아아악!?”
칼비나가 갑자기 내 목을 꼬집었다.
로데릭이 한숨을 쉬었다.
“칼비나, 너 자꾸…….”
“동생이 하루아침에 폐하가 된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정중하게 사과하는 게 리젠 답지 않아서 기분 나빠.”
“아, 나 리젠 맞다니까. 다만 너무 오랜만에 봐서 어색한 거지.”
칼비나는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구시렁거렸다.
“이상한 눈치를 보는 게 기분이 나쁘다고. 어차피 너는 글러 먹은 폐급 남동생이었어. 얼굴 하나만 예뻐서 언제나 사고 치고, 잔머리만 굴리는 못된 동생이었지.”
“그러는 댁은 허구한 날 사고 치는 못된 누나였잖아.”
“막상막하의 남매, 로데릭 오빠만 속이 터졌지!”
“……지금도 터지려고 한다.”
우리 둘을 보는 로데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릭의 과거를 추스르는 데 전념하다 보니까 내 지금 가족에게는 소홀하지 않았나 싶어서, 좀 미안한데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황실 사람들에게 네가 시릭이라는 걸 믿게 하는 일이 더 어려웠겠지.”
칼비나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아멜리아가 나랑 로데릭 오빠에게 간곡하게 말하더라. 너는 분명히 리젠이 맞으니까 만나면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안아 주라고.”
“으음.”
그러고 보니 아멜리아도 제칼에서 만난 이후로 이야기를 못했지.
내가 신음을 흘리자 칼비나는 내 뺨을 쿡쿡 찔렀다.
“황제고 뭐고 아멜리아 눈에서 눈물 떨어지게 하면 혼난다?”
“아멜리아 울리느니 황제 때려 칩니다. 내가 대체 왜 황제 해?”
나와 칼비나의 대화에 로데릭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 리젠. 일이 커지고 오랜만에 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헷갈려서 좀 긴장했던 거다.”
“그냥 사석에서는 동생으로 대해 주세요. 아니, 어디서나 막냇동생으로 대해 주세요. 예의범절 어쩌고 귀찮게 하는 놈 있으면 저한테 일러바치고요.”
“……고자질해도 되는 겁니까?”
가룰이 멍하니 물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 내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리브라타 가문이 사랑으로 이끌어 주었는데.”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리브라타 가문으로 환생한 덕분에 일하는 보람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얼마나 좋은지 새삼 알게 되었어요. 나는 사실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물론 그래야지. 황실이 안정되어야…….”
“아, 리브라타의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시릭이자 리젠이고, 양쪽 다 소홀할 생각은 없습니다. 칼비나 누나와 로데릭 형, 그리고 가룰이나 아버지도 내 소중한 가족입니다.”
내가 단언하자 그제야 로데릭의 얼굴이 좀 풀렸다.
로데릭도 이미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사실이 널리 퍼지면서 주변 분위기가 변하니 새삼 어색했던 거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일 다 끝나고 형하고 술이나 같이 마시고 싶어요. 그리고 괜찮으면…… 시릭의 가족들도 소개해 주고 싶고요.”
“아, 폐하의 가족들 말이지? 그러고 보니 리젠의 어린 시절 일화 같은 걸 들려주면 좋아하려나?”
칼비나가 내 어깨를 누르면서 빙긋 웃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좀 하지 말아 주실래요? 아버지의 체면이라는 게 있거든요?”
“반대로 시릭 시절의 일화를 우리가 들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로데릭 오빠?”
칼비나가 호들갑을 떨자 로데릭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아무튼 조심해라. 리젠, 나는 군대의 일은 잘 모르지만 보통 문제가 아닌 것쯤은 안다. 더욱이 칠죄신의 이름까지 나왔으니까…….”
“칼비나 누나랑 가룰이 있잖습니까. 다른 녀석들도 데려가니까 안심하고 기다려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멜리아는…… 안 왔습니까?”
“좀 준비할 게 있다고 했어.”
“…….”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멜리아인가 싶어서 돌아보았는데 거구의 늑대 수인, 레릭이었다.
“폐하 만세! 충성!”
칼비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는 경례를 올렸다.
대장군이면 제국에서 5명밖에 없는 군대의 톱이니까.
칼비나의 경례를 받아 준 레릭이 나에게 말했다.
“폐하, 곧 출발할 시간입니다. 열차에 탑승하시죠.”
“…….”
아멜리아를 아직 못 봤는데.
나는 아쉬움을 억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대 전체의 스케줄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
“알았다. 로데릭 형님, 그러면 황도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로데릭도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꽉 맞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의 악수.
다시 몸 건강히 보자는 약속이었다.
군대 수송 열차 안.
일반 열차와 달리 여긴 VIP실이고 뭐고 없다.
그래서 나는 객실 연결 통로에서 레릭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지방군의 움직임은?”
“완전히 신뢰할 순 없지만…… 서부군과 결탁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동부는 물론이고, 남부와 북부도 필요하다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그래.”
“문제는 서부대장군입니다. 그 녀석이 4황후의 진의를 알고서도 함께하고 있다면 일이 복잡해질 겁니다.”
레릭은 지금 중앙군의 수장.
나는 엔라의 저의에 대해서 적당히 설명해 주었다.
완전히 믿지 말라는 말을 덧붙여서.
“그래도 처리해야지. 워길드까지 걸리는 지역이 3개라고?”
“예, 바론홀과 킹크로, 알렉사입니다. 지금 선봉은 바론홀 요새에 도착한 상황입니다.”
“내가 절대 선공하지 말고 멀리 거리만 두고 있으라고 말한 거, 지키고 있지?”
“물론입니다.”
레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릭, 이미 알겠지만 이번 반란은 진정한 의미의 반란이 아니다. 상호 간에 피 보는 일은 최대한 적게 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시려고요? 바론홀 요새를 지키는 녀석은 꼬장꼬장해서 말을 안 듣습니다. 권유고 뭐고 안 통할 텐데요.”
“그거야 바로 정리할 방법이 있다. 내가 가서…….”
드르륵.
그때 객실 문을 열고 나온 칼비나가 말했다.
“제국 만세! 충성! 잠시 보고 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음, 뭔가. 칼비나 천부장.”
“지금 플랫폼에 폐하를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음? 지금 출발 3분 전인데?”
레릭이 의아해하는데 칼비나가 나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바로 깨달은 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레릭, 출발 늦추지 마라. 나는 금방 탈 테니까!”
탁!
한달음에 뛰어내린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현재 플랫폼은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을 배웅하는 가족, 친구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
나는 포효까지 사용하면서 있는 힘껏 외쳤다.
인산인해의 인파들 사이에서 찾아내려고.
“도련님!”
저 멀리 들리는 목소리.
나는 인파를 뚫고 앞으로 달려갔다.
“어어어?”
“폐, 폐하시다!”
“다들 비켜드려!!”
배웅하던 인파들은 내 복장, 얼굴을 알아보고는 좌우로 얼른 비켜 섰다.
덕분에 나는 바로 아멜리아를 찾을 수 있었다.
탁, 탁.
내 앞으로 달려온 아멜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인이니 체력이 좋을 텐데도, 상기된 뺨, 흘리는 땀.
어지간히 달려왔단 이야기였다.
“죄송해요, 도련님. 생각하느라고 너무 시간이 걸려서요.”
“아니야. 그냥 이렇게 얼굴 보기만 해도…….”
“이거, 가면서 드세요.”
아멜리아는 들고 온 바구니를 내밀었다.
나는 얼른 받아들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뭘 만들어드려야 할지 몰라서…… 너무 시간이 걸렸어요.”
“아냐, 아멜리아가 만들어 주는 거라면 뭐든지…….”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멜리아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깜짝 놀라자, 그녀도 화들짝 놀라서는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
나는 사실 이번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릭의 가족들도 나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나는 숱한 전쟁을 거치고 제국을 세운 황제니까.
하지만 아멜리아에게는 다르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몸이 약하고 사고만 치던 막내 도련님에 불과하다.
“……아멜리아.”
그런데 그런 놈이 하루아침에 전쟁터로 나가게 되다니.
당연히 걱정되지.
아멜리아의 표정, 눈물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동시에 떠나는 나를 말릴 수 없다는 것도.
“……미안해,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을게.”
“아니에요, 도련님. 제가 얼마든지 걱정해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아멜리아는 내 양손을 꼭 잡고는, 말했다.
“몸만 성히 돌아오세요.”
“……응.”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간단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양손을 꼭 잡은 아멜리아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때르르릉!!
침묵하는 우리 둘 사이로, 곧 열차가 출발한다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멜리아는 애써 웃으면서 내 손을 놓아 주었다.
“아멜리아도 건강하게 지내야 해. 나 다시 올 때까지.”
“예, 도련님을 언제까지 기다릴게요.”
“…….”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열차 쪽으로 물러났다.
아멜리아는 그만큼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애써 웃으면서.
“…….”
탁.
뒷걸음질로 승강구 계단에 오른 내 시선에 아멜리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다 괜찮을 거라고.
“아멜리아.”
덜컹.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떠나는 병사들을 배웅하는 함성.
아멜리아는 나를 바라보면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조심하세요!”
“……응.”
반대로 나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덜컹! 덜컹!
열차가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열차를 따라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한껏 달려와서 지친 몸인데도.
“도련님! 도련님!”
“……다녀올게!”
아멜리아가 힘껏, 힘껏 달려오는데도 속도가 붙은 열차는 더욱 빨라진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멀어진다.
걸음을 멈춘 아멜리아는 울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우두커니 선 채로.
“…….”
그런 아멜리아도, 배웅하는 인파들도 한껏 멀어진다.
“……아.”
나는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장으로 향한 경험은 숱하게 많았지만, 이런 배웅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가기 전에 봤으니 다행이다.
안심한 나는 계단에 앉아서 바구니를 열어 보았다.
아멜리아가 뭘 했는지 궁금…….
“…….”
양념이 된 멧돼지 고기.
크로셀 후작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멜리아가 멧돼지를 사냥해서는 그걸 다 같이 나눠 먹었다.
“……어.”
일을 끝내고 다 같이 먹는 게 행복해서, 환생한 보람이 있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잘 먹었는데.
아멜리아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엄청 고생했을 텐데…….”
멧돼지 고기 자체야 황성 식료품에도 찾으면 나오겠지.
하지만 아니다.
보나 마나 이건 아멜리아가 직접 잡아서 조리한 거다.
황도 밖까지 나가서.
익숙하지 않은 지형,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사냥을 하고, 요리해서 달려와 건네준 것이다.
“…….”
그때 내가 맛있게 먹었으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기를 한 조각 집어서 입에 넣었다.
살짝 짠 소금 간과 달콤한 소스, 육즙이 확 녹아든다.
고기를 꾹, 꾹 씹어 삼키는 내 시선에 바구니 안의 종잇조각이 보였다.
“……뭐지.”
잡아 보니 편지였다.
아주 정갈한 글씨였다.
「아멜리아는 어려운 건 잘 모르지만 도련님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건 압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잘 챙겨 먹으시고, 반드시 돌아와 주세요.
아멜리아는 도련님이 무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눈이 아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기를 씹었다.
천천히 꼭꼭.
반드시 돌아가야겠다.
이런 사랑은 어디서도 받을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