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70)
환영의 끄트머리
서큐버스 하시아.
발코니 난간에 앉아서는 한쪽 다리를 가슴에 안고는 나를 바라본다.
좀 전까지 없었는데 정말 신기루처럼 홀연히 나타난 모양새.
내 뒤에 있던 황후들은 물론,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당황했다.
“아…….”
“무, 무슨…….”
다들 동요했지만 나는 침착했다.
“비전이로군.”
자세히 뜯어보니 서큐버스의 몸은 투명한 상태로 뒤쪽이 훤히 비쳐 보였다.
초능력, 비전.
자기 머릿속의 생각을 영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으으음.”
내가 태연하게 굴자 놀랐던 군중들의 동요가 줄어간다.
이것도 예정된 연출이다 싶어서.
하시아는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초능력자인 너라면 지금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걸 알 텐데?”
“그야 그렇지만 탐구 생활은 졸업하고 싶네.”
사실 추측은 있다.
하시아는 머나먼 곳에서…… 비전을 띄우고 그걸 이 자리로 텔레포트시킨 거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텔레포트에 미숙한 나도 칠성칠요를 공간을 넘어서 내 쪽으로 불러오지 않았는가?
그래도 초능력의 동시 사용은 부담이 큰데.
“이게 무슨 라스트 제다이야? 난 그런 영화 안 본다.”
“응?”
여기서 물리력까지는 못 쓸 거다.
나는 서큐버스를 무시하고는 군중을 향해 말했다.
다시 포효.
“다들 이 자리에 많은 생각과 기대를 품었을 거다. 100년의 기다림이 끝났다고, 드디어 2대 황제가 탄생할 거라고.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어라, 진짜 무시하네.”
서큐버스가 얼빠진 목소리를 흘리거나 말거나 무시!
내가 계속 군중들에게 말하자, 당황하던 이들도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100년을 거쳐 온 절차는 무엇인가? 인간과 일곱 이종족, 인간 중에서 황제를 뽑고 일곱 이종족의 승인을 받아서 황위에 오르는 것! 나는 이제 6명의 황후들에게 내가 황제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마족을 대표하는 황후, 엔라 워프레임의 승인을 받지는 못하였다.”
“엔라 황후는 지금…….”
소문은 못 막는다.
황도의 시민들도 엔라가 반란을 일으키고 서부를 장악했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다.
나는 단언했다.
“그래, 서로 간에 믿지 못하고 반목하여서 엔라는 지금 서부에서 있다.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서부로 가려고 한다. 마지막 승인, 4황후 엔라 워프레임의 승인을 받은 다음에 당당하게 황제가 될 것이다.”
“…….”
“물론 다소의 어려움, 혼란이 있을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는 해낼 수 있다. 극복할 수 있다. 제국은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극복해 왔다. 그러니 나는 다시 한 번 약속한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말하는 내가 굳게 믿어야 남들을 설득할 수 있다.
“우리는, 제국은 모두가 힘을 모아서 다시 새로운 난관을 넘어서리라고!”
“…….”
정적.
군중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오기 전에 나는 다시 덧붙였다.
“이에 반대하거나 믿지 못하는 의견이 있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지. 자.”
휙!
“…….”
나는 예비용 마이크를 서큐버스에게 던져 주었다.
물론 영상에 불과하니 진짜로 잡을 수는 없지만, 염동력으로 앞에 띄워 주었다.
서큐버스 하시아는 자기 얼굴 앞에 뜬 마이크를 보고는…… 멍하니 말했다.
“……어, 음. 진심이야?”
“내가 가짜로 그러겠냐? 여기부터는 대본이 없다. 자기소개하고 싶으면 하든가.”
“…….”
황후들이 동요했지만 나는 슬쩍 돌아보고는 막아 버렸다.
서큐버스 하시아가 제국을 혼란시킬 말을 퍼트리면 어쩌냐고?
이미……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입장이다.
“이제 와서 비방 좀 퍼트린다고 효과가 있을 것 같냐?”
애당초 나는 처음부터 이걸 염두하고 있었다.
제국 초기의 비사, 황실에 얽힌 복잡한 사정이 폭로당할 때의 여파.
그래서 아이들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서 진실을 알려 둔 것이고.
그럼에도 아이들은 나를 믿고, 아내들을 믿어 주었다.
우리 가족은 갈라졌지만 다시 하나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남은 건 제국 내부의 혼란인데, 그것도 지금이라면 수습할 수 있다.
이제 나한테 두려운 건 없다.
“말해 봐. 말하려고 온 거 아니었나?”
“……하하하.”
하시아가 빙긋 웃었다.
맑고도 밝은 웃음.
내가 기억하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어깨를 떨던 하시아가 고개를 숙여 군중들을 내려다봤다.
“모두 안녕하세요? 날 모르는 인간들도 있겠지만 상당수의 이종족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하시아 티어리스, 옛날에는 마녀였던 여자입니다.”
“……하, 하시아?”
“1황후라고?!”
하시아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얼굴을 알던 이들이 경악했다.
죽었다고 알려진 황후가 갑자기 100년의 시간을 돌아서, 다른 종족으로 변해서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하시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기에 있는 시릭 카라카스이자 리젠 리브라타에게는 따져 묻지 마세요.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
“헉…….”
“진짜 환생이라고?”
죽었다고 알려진 1황후의 귀환.
거기다가 내가 시릭의 환생이라고 단언까지 하니 군중들 사이에서 동요가 물결쳤다.
그러자 하시아가 깜찍한 윙크까지 날려 보였다.
……아, 진짜.
분위기 전환하려면 윙크라도 하라고 했던 걸 지금 써먹어?
“내 잘못에 대한 재판은 나중으로 미루죠. 지금부터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곧 칠죄신이 돌아옵니다. 그건 예정된 일입니다.”
“아.”
“무, 무슨…….”
이제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하시아가 연신 터트리는 폭탄에 군중들은 울음을 터트리고 비명을 질렀다.
“시릭!”
렌시엘이 강하게 불렀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괜히 두고 보는 게 아니다.
어차피 서큐버스 하시아는 이런 흑색선전, 폭로를 자기가 원할 때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또한 내 추측이 맞다면…….
하시아는 조용하게 말했다.
“칠죄신이 얼마나 사악하고 강력한 존재인지, 많은 이종족들이 알 겁니다.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인간들이라고 해도 교육을 받았을 겁니다. 그건 너무나 사악한 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칠죄신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숙연해지는 군중들에게 하시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 꿈은 소박하지만 위대한 꿈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걸 위해서는 칠죄신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 그래야겠죠. 하지만 칠죄신은 신입니다. 너무나 강력한 존재, 그래서 위대한 일곱 자루의 검을 모아서 의식을 거행하고 나선의 저편으로 추방하기로 했습니다.”
“…….”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이게 바로 내가 사랑하고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시릭 카라카스의 꿈입니다. 인류들을 매료시켰던, 하지만 불완전한 꿈이었습니다. 신은 죽일 수 없으니까.”
하시아는 이상할 정도로 유창했다.
아니, 이건 미리 준비했던 연설이 아니다.
오랜 세월.
아주 오랜 세월을 생각하고 고민했기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상념이다.
“신은 죽일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신을 죽일 방법이 있지 않을까.”
“…….”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게 되더라도, 신을 죽일 방법이 있지 않을까. 절반의 꿈이 완전한 꿈으로 거듭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시아는 나직하게 말했다.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애정이 폭넓은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저, 내 옆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남자의 꿈을 이뤄 주고 싶다.”
“…….”
“가슴이 뛰는 그 꿈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 설사…… 내가 그 꿈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시아는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다.
그러면 군중들이 이렇게 귀 기울이지 못한다.
하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꿈이 이뤄질 겁니다. 칠죄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있다면, 그걸 떨쳐 버리고 싶다면 서쪽으로 오세요. 인류의 모든 것을 건 한판 승부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하시아는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문득 발랄하게 말했다.
“제국군은 여러분들의 입대를 환영합니다!”
“…….”
나와 함께 제국군의 초기부터 있었던 마녀답게, 아주 자연스러운 입대 권유였다.
군중들의 정적.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나가 된 박수갈채가 이내 수십으로.
귀가 따가울 정도의 박수로 커져 갔다.
“와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시릭 카라카스 만세!!”
열정적인 함성들.
가슴이 뜨거워지는 호명 속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서 하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코니에서 내려온 하시아는 나를 보고 멋쩍게 웃었다.
“아, 역시 좀 아니었나? 또 혼낼 것 같은 얼굴이네.”
“너 뭐 하는 거야.”
“침대 위도 아닌데 반말을 하네. ……엄청 화났나.”
“하시아, 너 지금…….”
방금 군중들에게 한 말이 사실인가?
하지만 하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지금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미안,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어. 하지만 전투는 치를 거고 전쟁은 피할 수 없어. 자세한 건 엔라를 꺾고 나서 물어봐. 아, 카미르와 바라메에게 계면 차원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
“유하, 건강해 보이네.”
하시아는 내 뒤에 선 8황후, 자기 여동생을 불렀다.
유하는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 지금…….”
“다들 시릭을 잘 부탁해.”
황후들에게 당부한 하시아가 내게 다가왔다.
나와 마주한 하시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칠죄신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흑마력을 뒤집어쓰고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어. 하지만 장시간은 장담 못해.”
“그래, 알았다.”
역시 내 가설이 맞았다.
흑마력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고, 그건 칠죄신과는 별개다.
지금 하시아는 예전처럼 웃으면서 날 도와줬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되돌릴 방법을 찾을 거다.”
“……응, 믿을게.”
하시아가 눈을 감고는 살짝 발돋움을 했다.
나와 하시아의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사아아악.
하시아의 영상이 서서히 흐려지고 지워졌다.
백일몽처럼 흔적도 없어진다.
“…….”
하지만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벼르던 복수를 하고, 되찾을 기회가 왔다.
나는 이셀렌을 돌아보았다.
“이셀렌, 하시아에 대해서 조사해 봐.”
“……뭘?”
나도 하시아에 대해서 알고, 이셀렌도 이미 충분히 조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짚은 건 다른 부분이었다.
“하시아는 어째서 제국을 세우고 10년 뒤에 나타났을까? 그사이 어디에 있었을까?”
“…….”
하시아의 외모는 엄청 눈에 띈다.
거기다가 1황후로서 여기저기 얼굴이 팔렸고.
사람들이 봤다면 목격담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두메산골에 혼자 숨어 살았다? 뭘 위해서?
파군에 찔려서 죽은 줄 알았지만 살아 있었다?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지?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상했어. 다른 사도들의 행적과 연결해서 다시 한 번 조사해 봐.”
“당장 처리할게.”
이셀렌은 알아들었다.
하시아가 말한 정보를 취하기는 하겠지만 그와 별도로 움직인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는 군중들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칠죄신이 돌아온다는 사실에 겁먹었던 군중들.
하지만 죽었다고 알려진 하시아가 살아온 것도 모자라서 내가 시릭 카라카스라고 공인해 버렸다.
거기다가 칠죄신을 없애 버릴 방법까지 있다고 해 버렸고.
이제 돌아갈 수 없다.
“우리 모두! 서쪽으로 가서 결판을 낸다!!”
“으아아아!!”
“갑시다!!”
“황제 폐하 만세!!”
환호와 결의로 군중들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손을 흔들어 주자 다들 모자를 벗어 던지고, 팔을 번쩍 치켜든다.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진정한 최종 결전.
서쪽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