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69화 (168/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9)

출정식

출정식 날이다.

구체적으로는 리젠 리브라타가 황도의 시민들에게 정치적 포부를 밝히는 날이다.

정부의 신하들, 귀족과 이종족들은 내가 2대 황제로 등극하는 날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제국 중앙군의 출정 준비는 그만큼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장군 100년의 짬밥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그나저나 인간의 수명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대기실에 앉은 나는 곧추세운 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칠성칠요의 마지막 검, 파군.

이제 절반을 되찾았다.

그 검은 복원한 마녀.

마지막 황후인 유하가 크게 결심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녀들 물러가라고 해 줘?”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지금 나는 머리 세팅 중이다.

엘프 시녀와 다크엘프 시녀가 내 머리를 다듬고, 뺨에 화장을 칠하고 있었다.

유하는 오래 생각한 결심을 꺼냈다.

“이번 일에 저도 폐하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황후들은 하나같이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했다.

이번 반란 진압, 서부 원정이 결말이 되리라는 걸 은연중에 깨닫고 있으니까.

나는 손을 저었다.

“그만, 다들 이만 나가봐라.”

“…….”

시녀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나는 유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하는 내가 마지막에 한 결혼, 가장 정략성이 강했다.

“1황후 하시아가 사망했으니, 마녀만 황후를 배출하지 못한다. 그러니 마녀 중 하나를 아내로 맞이해 줬으면 좋겠다.”

“…….”

“본래 나라면 들어줄 리가 없는 이야기지만, 하시아를 잃어버렸다는 공허함이 컸다. 그리고 너도 내가 오래 지켜본 여자였다.”

유하는 하시아의 여동생으로서, 내가 본격적으로 칠죄신과 맞서기 전부터 알았다.

안 기간만 따지면 랑에이보다 길다.

나는 깍지를 끼고는 유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널 골랐다. 우리는 서로 하시아를 잃어버린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

“……예?”

“그냥 네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어.”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을 달래는 거야 그냥 자주 얼굴 보면 그만이지 뭘 굳이 결혼까지 하겠어? 차라리 너에게 적당한 지위를 맡기고 말지. 언니 대신에 널 골랐다, 뭐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냐?”

“……맞으시잖아요.”

“난 너희들 생각보다 얼굴을 밝혀. 너희들이 절세미인이라서 결혼한 거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 볼 때마다 하시아가 생각날 텐데? 그런데도 굳이 너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던 것은…… 너 또한 내가 어린 시절부터 호감을 품었던 여자기 때문이다. 하시아의 엉망진창 생활에 대해서 함께 불만을 토로하다 보니 동지 의식이 생겼고. 너는 나와 마녀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충분히 잘해 주었다.”

“…….”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유하는 종종 나와 단둘이 있으면 심란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게 하시아의 공백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하시아의 타락을 안 직후에는 자매를 배신했다는 자책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게 된 지금으로서는 둘 다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대용품으로 널 대한 적이 없다. 하시아와 비교하면 네가 너무 훌륭하지.”

“……폐하.”

“돈 관리 잘하지. 지도 제대로 보지. 보다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줄도 알지, 살림까지 잘해. 하시아는 사실 얼굴만 예쁘지, 다른 사람하고 너무 안 맞아.”

이제까지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하시아의 이야기는 금기였다.

내 아내이자 스승이며 유하의 언니, 서로 잘 아는 상대이건만 그래서 서로 각별히 조심했다.

하지만 나는 작심하고는 토로했다.

예전처럼.

“그러니 괜한 생각할 필요 없다, 유하.”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래도 제가 따라가고 싶습니다.”

유하는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만약 현지에서 남은 파군의 조각을 회수한다면, 그걸 복원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저밖에 없습니다. 다른 마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

“예, 마녀들 사이에서 칠성칠요 파군을 수호하는 책무는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것입니다. 통칭 검의 마녀라고 합니다. 본래는 언니가…….”

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언니가 검의 마녀가 되어야 했습니다만 막판에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려받았습니다. 지금 시대에서 파군을 복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저뿐입니다.”

“…….”

나도 복원을 맡기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하시아와 대면하게 될 수도 있다.”

“……싸움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유하는 작심한 투였다.

“언니의 타락을 알고서 저도 많이 방황했습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제 아이와 폐하, 그리고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습니다.”

“…….”

본래 유하는 엔라와 적대하기를 망설이고, 가족 사이의 싸움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받아들이마.”

“예, 감사합니다. 폐하.”

유하는 성실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이제 개인 준비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본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유하에게 끌린 데에 하시아의 죽음이 전혀 영향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유하도 알 것이다.

알지만 속아 넘어가 준 것이다.

이제 우리 사이에서 하시아의 이야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

하시아가 살아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

내가 고개를 들자 메이호와 리세라가 들어왔다.

둘째 딸, 메이호가 말했다.

“아빠, 시간 됐어요. 곧 어머니들 나가실 테니까 마지막에 아빠도 준비하라는데요?”

“사람 얼마나 모였냐?”

“……음, 엄청 모였어요. 추정 50만 명 이상이요. 더 모이고 있어요.”

나는 짐짓 한숨을 쉬어 보였다.

“아, 떨린다. 무서워라.”

“걱정하지 마세요. 메이호 언니가 손잡아드릴 테니까요.”

리세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메이호가 쏘아보았다.

“너 자꾸 언니 놀릴래?”

“어머, 언니 모르셨어요? 원래 아버지는 연설 같은 거 하실 때 굉장히 긴장하세요. 그래서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손잡아 주시고, 안아 주시던데요?”

“……어?”

“언니는 잘 몰랐나보네요. 저는 어린 마음에도 부럽게 지켜보았는데요.”

메이호가 당황하며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진이 빠진 한숨을 쉬었다.

……리세라는 진짜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장난을 치는구나.

내가 긴장한다는 건 리세라의 거짓말이다.

전장에서 아군을 호령하고, 고함으로 적을 위압해야 하는 일이 나에게는 숱하게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런 평화로운 연설은 식은 죽 먹기다.

전혀 긴장이 안 된다.

“아, 아빠. 진짜 힘들어요?”

“……으음, 무섭네.”

하지만 딸이 걱정해 주니까 좋잖아!

일부러 풀이 죽은 척해야지!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리세라가 좋게 추임새를 넣었다.

“메이호 언니, 얼른 안아드려야죠. 얼른. 아빠가 무서워하시잖아요.”

“……아빠가 이런 면도 있었어요?”

메이호는 의아해하면서도 팔을 벌려서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면서, 메이호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리세라도 어깨를 떨면서 웃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정작 메이호는 진지하게 나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아빠, 괜찮아요. 선글라스…… 는 끼면 안 되나? 아무튼 다들 아빠가 나오는 걸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엄마도 옆에서 지켜보실 테니까요.”

“……그래? 괜찮을까?”

목소리에 기운 빼기도 의외로 어렵군.

메이호는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아빠, 정말 괜찮아요. 아빠가 돌아와 주셔서…… 엄마랑 어렵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정말…… 엄마도 말주변이 없어서요. 나 혼자만 화내고 바보처럼 군 게 되었지 뭐예요?”

“…….”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요. 앞으로도 아빠가 쭉 함께해 주실 테니까.”

“고맙다.”

나는 장난을 거두고는 힘껏 껴안았다.

우리 둘을 지켜보던 리세라도 천천히 다가왔다.

장난기가 가신 얼굴로.

나는 얼른 리세라도 안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고맙다. 너희들에게는 그저 고맙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몇 번이고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리세라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으응, 아니에요. 아버지. 메이호 언니 정말 잘 속죠?”

“……응?”

“그래, 너무 잘 속는구나. 이러다가 남자에게 크게 속게 되지 않을까 이 아빠는 너무 걱정이 된다.”

“……뭐?”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제가 옆에서 메이호 언니에게 이상한 남자가 붙지 않게 철저하게 감시할게요. 오르카랑 세탄 오빠에게도 잘 이야기해 두었답니다.”

“아니, 잠깐. 뭐야? 나 또…… 속았어?”

메이호가 그제야 알고는 우리 둘을 노려보았다.

리세라는 빙글빙글 웃었다.

“아니에요! 메이호 언니가 아빠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셨잖아요!”

“그렇지. 비록 세라가 거짓말을 했지만.”

“……캬아아악!!”

메이호가 으르렁거리면서 화를 냈다.

리세라는 짐짓 겁먹은 척을 하면서 내 품에 파고들었다.

“꺄아아악! 아빠, 언니가 소리쳐요! 무서워요!”

“호야, 비록 나와 세라가 널 놀려 먹었지만 소리친 건 너무하지!”

“……두 사람이 너무하지! 맨날 날 놀리고 속여 먹잖아! 이젠 아빠도 날 놀려 먹어요!?”

메이호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짐짓 서운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서 싫었니? 아빠는 연설 나가기 전에 호야가 이렇게 예쁜 말을 해 줘서 기분 좋았는데.”

“…….”

메이호가 멈칫했다.

붉어진 얼굴.

하지만 내 가슴에 매달렸던 리세라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언니. 비록 제가 언니를 놀리긴 했지만 사실 좋았잖아요! 아빠에게 격려할 말로 뭐가 좋은지 고민하고, 걱정돼서 같이 오자고 하신 게 언니면서!”

“……세라, 너!”

결국 메이호가 폭발했다.

딸들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안내하는 시종의 뒤를 따라서 나아갔다.

이번 행사는 황성을 개방하고, 서성(西成)의 발코니에서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하는 거다.

황성이 개방적이라는 것, 인원 수용 문제도 있어서 내가 시릭 시절에 몇 번이고 써먹은 방식이었다.

발코니로 향하는 길.

복도를 걸어갈수록 함성이 커진다.

“2대 황제 후보이신 리젠 리브라타가 나오십니다!!”

미리 나가 있던 시종의 선언.

내가 발코니로 나섰다.

화창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

땅에는 무수한 백성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야의 끝까지 펼쳐진 머리들.

정말 많긴 많다.

마이크를 앞에 둔 나는 호흡을 골랐다.

“저 사람이 새로운 황제야?”

“여자처럼 생겼네…….”

“엄청 세다며? 돌아온 칠죄신을 물리쳤다는데?”

“초대 황제 폐하의 환생이라는데.”

“거짓말, 가짜 아냐?”

온갖 소리들이 웅성거린다.

나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턱을 세우고, 앞을 늠름하게 바라보는 흑백발의 수인, 2황후 랑에이.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요염하게 선 은발의 다크엘프, 3황후 이셀렌.

앞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우아하게 선 백금발의 천족, 5황후 렌시엘.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여리고 가녀린 표정을 꾸미고 있는 엘프, 6황후 나비린.

하품이 나오려는 입을 살짝 가리고, 눈이 마주치자 멋쩍어하는 용족, 7황후 바라메.

눈이 마주치자 목례를 하는 흑적발의 마녀, 8황후 유하.

제국을 100년간 임시적으로 통치하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내가 돌아보는 시선.

군중들도 그 의미를 알고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가 권력자가 바뀌는 자리,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것을 알고는.

수십만 명이 모였는데도 찍소리 하나 없는 압도적인 정적.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포효.

“내가 바로 2대 황제 후보인 리젠 리브라타다. 오늘 이렇게 다들 와 줘서 고맙다.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은…….”

“대관식이지.”

포효.

나는 멈칫했다.

내가 자주 쓰는 초능력, 포효는 내가 말할 때 존재감을 뽐내고 목소리를 잘 울리게 하는 거다.

성량만이 아니라 내적인 존재감 자체.

즉, 대화의 기세에서 내가 제압당할 일은 없었다.

딱 하나의 예외.

같은 포효를 쓰는 사람일 경우.

“아니야?”

발코니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여자가 불쑥 물었다.

두 개의 뿔과 날개.

갸웃거리듯이 흔들리는 악마의 꼬리.

그 시절처럼 하얗고도 푸른 머리카락.

“대관식이 맞잖아?”

서큐버스 하시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