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8)
어둠이 저물고
내 제안.
다들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황후 중의 막내, 유하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을…….”
“아, 그런 거 없어. 그냥 여기서 정해.”
나는 선수를 쳤다.
“너희들 100년 동안 고민했고, 이제 서로 속사정 다 알았잖아.”
“……있어도 되나요?”
유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다른 황후분들하고 달라요. 저, 저는 언니 대신에…….”
“내가 싫은 거 참고 사는 놈으로 보이냐?”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니들이 좋아서 결혼했고, 보기 싫어져서 안 봤다. 자질구레한 이유, 주렁주렁 달지 마라. 가부만 결정해.”
“불가능하잖아요. 당신은 리젠 리브라타고…….”
“그래서 싫어?”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습니다.”
렌시엘의 말문이 트였다.
“다시, 다시 한 번 당신과 시작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기회가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이렇게 당신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렌시엘이 말하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 앉아 있던 미리엘이 깜짝 놀라서는 렌시엘의 팔을 붙잡았다.
이셀렌은 잠자코 나를 향해서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저 따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나비린은 묘하게 눈치를 보면서 다물었다.
대신 바라메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이야 시릭을 곁에서 다시 지켜보고 싸울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니 마다할 것 없지. 더욱이 과거의 잘못을 갚을 수 있는 길이라면.”
“나는 엔라와의 일을 매듭지어야 한다.”
랑에이도 대답을 했다.
“시릭, 내가 반란 토벌군의 선봉에 나서겠다. 부디 나에게 맡겨 다오.”
“대답이 이상한데?”
“……내 몸과 마음은 다시 한 번 너와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엔라가 있다. 나와 엔라는 그때의 일에 특히 더 책임이 크다.”
렌시엘이 입을 열려고 하자 랑에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들의 배려와 마음은 안다. 같은 책임이라고 말하는 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엔라는 군단을 이끄는 장수였고. 당시에 누구보다도 지휘권이 높았다. 아닌 말로…….”
랑에이는 해묵은 말을 꺼냈다.
“엔라가 반대했으면 최소한 시릭에게 보고는 올라갔을 거다.”
“랑에이.”
“이셀렌, 지금 이건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게 아니다, 엔라는 지금 찢어지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적이 되었다. 그녀라고 이 자리에 있기 싫었을까?”
나는 잠자코 들었다.
사실 엔라는 100%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랑에이의 말은 너무 감상적이고.
하지만 결의를 다지는 자리에서는 감성적인 말도 필요한 법이다.
랑에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엔라는 누구보다도 책임을 무겁게 여기고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생각했을 거다. 당시에 군단장이었다면 자기가 구원 요청을 보내자고 주장했더라면, 하시아를 구출하자는 내 의견을 받아들였으면, 우리와 시릭이 갈라서는 최악의 결과만큼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
“그때 칠죄신에게 죽더라도 싸워야 했다고. 엔라는 내내 그렇게 후회했을 거다.”
랑에이는 괴롭게 말했다.
“나는 엔라와 함께 전선을 뛰어다녔기에 확신할 수 있다. 엔라는 황당무계한 기책을 쓰고, 아군의 희생도 감수하면서 일을 처리하지만 악한은 아니다. 분명히 모진 결심, 단장의 마음을 품고 우리들을 등졌을 것이다.”
“…….”
“세탄, 너는 엔라의 아들이다. 다른 모두가 네 어머니를 반역자라고 해도, 너만큼은 그녀가 감춘 진심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랑에이는 무작정 감상적이지 않았다.
이 호랑이 역시 전장의 선봉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살아온 장수니까.
랑에이는 엔라 대신이라는 투로,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해도 결국 너와 엔라가 창검을 부딪치게 될 거다. 출진 전에 각오를 다져라.”
“……감사합니다.”
세탄은 묵직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랑에이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세탄은 반란군 토벌에 앞서야 한다는 걸.
어머니인 엔라를 공격해서 자신이 반역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
랑에이는 나를 돌아보았다.
“시릭, 나는 너와 함께 살고 싶다. 하시아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리고 엔라를 데려올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 그런 각오로 이번 정벌에 나서겠다.”
“…….”
원래 랑에이는 황도에 놔둘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렇게나 기백을 내뿜는 장수라면 기용해야지.
개인감정?
아니다. 선봉은 전군의 사기와 직결된다.
선봉 장수가 분연하게 전의를 떨친다면 그것만으로도 아군의 전력이 상승한다.
“알겠다.”
“……저는 아직 대답을 안 했답니다.”
나비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의 말씀은 참으로 기쁩니다만…….”
“목소리 깔지 말고 편하게 좀 이야기해. 간드러져서 들어주기 힘들다.”
“……엘프 아가씨를 새로 황후로 맞이하신다면 저는 물러나는 게 좋을 거랍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비린을 보았다.
“미레이에게만 미안하냐? 나한테도 좀 미안해해라.”
“폐하, 이건 정치적인…….”
“아, 나는 더 결혼할 생각도 없지만 하게 되더라도 너희들에게 일일이 허락 안 받아. 내가 하고 싶으면 할 거다. 그러니까 이상한 핑계 대고 빠질 생각하지 마라.”
나는 딱 잘랐다.
“갈 거면 잔말 말고, 남아도 잔말 마라. 지금 우리 이야기하는데 왜 자꾸 딴 걸 끌어와?”
“폐하는 참 가차없으시답니다.”
나비린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저와 다른 황후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니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남은 평생, 폐하의 은덕을 잊지 않고 항상 주의하고, 또 조심하며 잊지 않기 위해서…….”
“야, 다들 마시자. 마셔.”
“……폐하!”
내가 무시하자 나비린이 발끈했다.
물론 나는 들은 척도 않고, 염동력으로 술병을 띄워서 황후들의 빈 잔에 따라 주었다.
이건 술자리에서 분위기 띄우는 내 재주다.
“와.”
미리엘과 메이호가 똑같이 놀란 얼굴로 혼자 움직이는 술병을 바라보았다.
나는 두 딸에게도 각각 술과 주스를 따라주고는 잔을 들었다.
“자, 그럼 의견은 정리되었으니 다들 마시자.”
이제 이야기는 끝이다.
방금 진지한 결정이 오가서 다들 경직된 분위기.
나는 한숨을 보란 듯이 쉬었다.
“나 며칠 뒤에 출장 나가야 해. 먹고 마시는 건 편하게 하자.”
“아버지, 제가 노래 하나 뽑아 보겠습니다.”
세탄이 느닷없이 말하더니 진짜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국군 군가다.
……그런데 못 부른다.
다들 어이가 없어서 당황했다.
리세라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고.
세탄은 개의치 않고는 다 부른 다음에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내 아들이지만 어디 가서 노래 부르지 마라.”
“아닙니다. 제가 노래를 부르면 다들 좋아하더군요.”
세탄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우들이 제가 1황자라고 어려워하니까요. 그래서 술자리에서 노래 한 번 부르면 다들 웃고 떠든 다음에 친해집니다.”
“……그래, 일부러 못 부르는 거였구나.”
“예? 다들 제가 잘 불러서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
세탄은 자기가 음치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메이호가 세탄의 어깨를 찰싹 쳤다.
“여자들 앞에서는 부르지 마. 얼굴은 잘생겨서 노래 들으면 다들 도망갈라.”
“그러고 보니 다들 그 말을 하더군. 내가 너무 잘 불러서 도망가나?”
“…….”
내 아들이지만 왜 자기 목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까.
바라메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술잔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노래라면 이셀렌이 잘 부르던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르카는 들어본 적이 있지 않나? 이셀렌이 불러 주는 자장가.”
“……몰라요. 왜 갑자기 저에게 물어보세요.”
중간에 낀 오르카가 난처하게 눈을 돌리다가 나비린에게 배턴을 넘겼다.
“나비린 어머니야말로 노래 잘 부른다고 소문이 자자하신걸요.”
“어머, 그 말은 지금 나하고 이셀렌하고 싸움을 붙이는 거랍니까? 확실히 노래 부르는 다크엘프는 우스갯소리지만요.”
“몸이 볼 게 없으니 목소리라도 좋아야지.”
“……시릭은 저보고 가련하고 나긋나긋해서 좋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당신, 지금 애들 앞에서 할 소리인가요? 좀 더 교양을 갖추고 단어를 고르세요.”
이셀렌과 나비린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애당초 엘프와 다크엘프, 사이좋은 게 이상하다.
둘 다 내 부인이 되기 전에는 서로 목숨도 노렸고.
말다툼 정도라면 진짜 완화된 거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는 네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지. 오르카는 훌륭하게 잘 컸어.”
“아, 평소에는 아들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하시는 분이 술 좀 들어갔다고 갑자기 확 달라지네요? 암살여왕이라는 분은 술에 암살당하시나?”
“그 나이 먹고 엘프의 공주님이라고 불리는 게 부끄럽지 않아? 공주님, 공주님?”
“……지금 나이 이야기했나요? 밖에서 볼까요?”
의외지만 나비린이 강하다.
랑에이가 손을 저어 정리했다.
“둘 다 그만, 모처럼 이렇게 모여서 마시는 게 얼마 만인데 목에 열을 올리나. 아이들 생각도 좀 해.”
“저는 보기 좋은데요.”
리세라가 냉큼 말했다.
좀 취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사이좋게 싸우시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라서 좋아요. 더 싸워 주세요.”
“말다툼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저속한 말은 삼가세요. 특히 이셀렌, 아이들이 다 컸다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 많이 보고 배웁니다.”
“…….”
이셀렌이 무표정하게 렌시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빙긋 웃더니만 목소리를 꾸민다.
“저기, 이셀렌. 잘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남자와의 첫날밤에는 어떻게 해야…….”
“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렌시엘은 미리엘의 귀를 양손으로 막고는 질색했다.
“다, 다, 당신! 대체 그게 언제 일인데 기억하나요! 심술궂어요!”
“모범생처럼 보이던 천족이 먼저 선물을 들고 와서는 한참 뒤에 조심스럽게 물어보기에 기억했지. 그냥 주변 사람에게 묻지 그랬어?”
“제, 제가 진짜 몰랐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모른 척했던 거예요!”
“와, 렌시엘이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답니까? 자기 딸의 귀를 막았다고 못 하는 말이 없답니다.”
나비린이 이셀렌과 편을 먹고 렌시엘을 몰아붙였다.
메이호가 한숨을 쉬고는 정리했다.
“그만 좀 싸우세요. 아버지 보기도 민망하지 않으세요. 또 듣는 저희도 좀 생각해 주세요.”
“어머, 시릭은 이런 이야기 좋아하잖아요. 여럿이서 하는…….”
“캬아아악!! 나비린! 정말 화냅니다! 교육을 생각하세요! 교육을!”
렌시엘이 바들바들 떨면서 화를 냈다.
다들 웃음이 터지고.
나도 웃고 있었다.
이런 시답잖은 대화.
황실에서 주고받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찮고, 속된 이야기들.
이게 좋았다.
다들 말을 한마디씩 보태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는 계속 튀어 나간다.
“그러고 보니 유하 어머니는 의외로 술을 많이 드시네요.”
“이미 취했어요…… 그냥 마시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우리 중에서 누가 술이 제일 세지?”
“랑에이는 술 끊었잖아. 바라메는?”
“이 몸도 약하다. 엔라와 나비린 둘 중 하나일 거다만. 하지만 이제 아이들이 마시기 시작했으니 모르지.”
“제가 의외로 술을 좀 마시는데요. 해 볼래요?”
눈앞의 정경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하다.
나는 술잔을 비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났던 메이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왜 갑자기 말씀이 없으세요. 취하셨어요?”
“아니, 더 마시련다.”
나는 빈 술잔을 메이호에게 내밀었다.
“사랑하는 딸이 따라 주는 술이 마시고 싶어지네.”
“……그렇게 아부 안 해도 얼마든지 따라드릴 거거든요.”
취하는 밤이다.
눈이 떠졌다.
누워 있는 상태.
“…….”
아이들이 따라 주는 술을 연거푸 마셨지.
마력으로 몰아내긴 했어도 속이 별로였고.
그래서 저번처럼 응접실에 깔린 이불에 누웠고.
금방 자 버렸던 모양이다.
“…….”
옆으로 누운 내 팔을 베개 삼은 리세라가 잠들어 있었다.
곤히 잠든 모습.
딸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눈만 굴려 보니 사위가 어둑어둑한 게 아직 새벽이었다.
호흡들.
여기저기서 애들과 아내들이 잠들어 있었다.
“…….”
그래, 이걸로 된 거다.
나는 세상모르고 잠든 리세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는 살짝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자식.
이렇게 안고 있으면 정말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다.
이 아이가 늘 행복했으면 한다.
불행한 일 따위는 하나도 겪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나는 칠죄신과 그 종복들을 카라카스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
“…….”
그 순간, 갑자기 가슴 깊은 곳이 충만해지면서 전신의 감각이 확 떠올랐다.
정신이 높은 곳으로 아득하게 치솟아 오르는 감각.
정신력이 급격하게 상승했고.
여섯 번째 초능력, 텔레파시를 각성했다.
이제까지는 초능력을 개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자식과 터놓고 이야기하고, 아내와 터놓고 이야기할 때마다 능력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내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가 풀어진 기분이었다.
“…….”
내가 상태를 점검하는데 인영이 슥 일어났다.
달빛을 받아서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
이셀렌이 일어나서 앉아 있었다.
“…….”
“…….”
나와 이셀렌의 시선이 교차했다.
요염한 다크엘프가 보라색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리세라가 베고 누운 내 오른팔, 그 끝의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장난.
“…….”
단둘이만 있을 때 할 짓이지만.
지금은 다들 잠들고 우리 둘만 깨어있는 새벽.
이셀렌은 평소와 다르게 씁쓸한 미소만 띠면서 내 손바닥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나는 손가락을 확 말아 쥐었다.
장난을 치던 이셀렌의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고 꽉 붙들어 맨다.
“…….”
이셀렌은 당황해서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풀어 주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리세라가 잠든 상황이다.
이셀렌이 무리하게 손을 빼내려고 하다가 리세라를 깨워 버릴 수도 있었다.
“…….”
이셀렌도 그걸 알고는 멈칫했다.
그녀가 손에서 힘을 빼자 나 역시도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셀렌이 얼마든지 손을 풀어낼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이셀렌 쪽에서 내 손을 잡아 왔다.
약하지만 부드럽게.
가족들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정적 속에서.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손만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떨어졌지만.
결국 다시 맞물린 손.
“…….”
이셀렌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수그리고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연갈색 피부의 요염한 다크엘프가, 소리 없이 어둠 속에서 몸을 수그리면서 내 손등에 키스하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행여나 자는 아이를 깨울까 봐.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두렵다는 듯이.
아주 조용하게.
“…….”
소리도 없는 입맞춤은 유달리 뜨겁게 느껴졌다.
이셀린의 입술이 떨어지자, 내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만진다.
“…….”
이셀렌은 가만히 내 손가락이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
내 검지와 중지가 그녀의 뺨을 살며시 눌러 본다.
이셀렌은 눈을 스르륵 감고는, 내 손등을 자기 손으로 누르면서 뺨을 비볐다.
서로 간에 한마디도 없는 몸짓만이 계속 이어진다.
“…….”
내가 손가락을 오므리자 이셀렌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살피고는 의미를 알아듣고.
조심스럽게 눕는다.
리세라에게서 거리를 두고.
내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 있게 옆으로, 누워서는 내 손을 잡았다.
“…….”
“…….”
벌어진 거리.
서로 손을 잡지만 그것뿐이다.
한때는 서로를 믿고 의지했지만, 우리는 갈라졌다.
시간은 가차없고 그 골은 우리 사이에도 변치 않았다.
서로 오해를 풀었다고 해도, 마음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화목한 부부로 돌아갈 순 없다.
“…….”
그저.
그저 이렇게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손을 맞잡을 뿐.
행복하게 잠든 아이를 깨우지 않게.
한마디 말도 없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지만.
하나는 알고 있었다.
긴 어둠은 끝났다.
날이 밝는 새벽이 올 것이다.
―라그리즈.
내가 텔레파시로 부르자 이셀렌은 흠칫 몸을 떨었다.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은 다크엘프 사이에서만 오가는 것.
그녀가 내게 말을 걸 수는 없다.
“…….”
하지만 이셀렌은 고개를 아주 미미하게 끄덕이고는.
그저 손을 꼭 잡았다.
이제는 떨어지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