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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67화 (166/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7)

폭포도 베어 봤다고

연회는 금방 끝났다.

애당초 길게 갈 자리도 아니었고, 황후들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는 일종의 선언을 해 두는 자리였다.

참가한 이들은 복잡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들 어떤 게 이득일지 계산을 품은 얼굴.

나는 객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곧 대관식이 열릴 테니 그때까지 기한이 미뤄진 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돌아간 거지.”

“…….”

옆에 고개를 숙이는 건 오드벨이다.

밤늦은 시간에 불려온 오드벨은 알아서 머리를 박았다.

내가 일어나라고 하니 말은 들었지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머리를 긁고는 말했다.

“뭐 잘못했냐? 왜 그래?”

“폐하는 가족을 각별하게 아끼시니까요. 황자와 황녀분들은 물론, 황후 전하들까지도 말입니다.”

“…….”

“사실 황후 전하들에 대한 많은 억측들이 있었고, 저도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만 진실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폐하…….”

나는 오드벨이 하려는 말을 가로챘다.

“제국을 위해서는 내가 2대 황제가 되어 주고, 새로운 황후를 맞아라. 그리고 이전의 황후와 자식들을 저버려라?”

“그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저와 레릭, 아르센 같은 측근들은 폐하가 시릭 카라카스 전하라는 걸 압니다. 아니, 폐하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문무백관들도 하나, 둘 폐하의 환생을 믿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심은…….”

“나는 가정을 위한답시고 국가를 저버리지 않겠다. 그럴 거라면 엔라의 반란을 징치하겠다고 하지도 않아.”

나는 소매 단추를 풀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주장하는 대로, 국가를 위해서 가족을 저버릴 생각도 결코 없다.”

“…….”

“나는 시릭 카라카스이자 리젠 리브라타고, 내 가정과 국가를 위해서 싸우고 정치를 한다. 둘 중 하나만 고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느니 때려치우고 만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드벨. 양립시킬 방법을 마련해라.”

“……제가 말입니까?”

“그러면 그렇게 입 벌리고 놀 생각이었냐? 나한테 보고만 안 올리면 끝이었어?”

“…….”

나는 어깨를 털면서 말했다.

“너 내가 시릭 시절에 황제 때려치우겠다고 한 게 장난으로 들렸냐? 난 내 가족 없으면 일을 못 해. 보람이 하나도 없거든.”

“…….”

“나 계속 황제로 모시고 싶으면 재상인 네놈이 머리를 쥐어짜서 방법 마련해 와.”

사실 나 나름대로 생각해 둔 복안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래 애들의 생각, 방법도 경청하고 싶기도 하거니와.

오드벨도 한 번 건드려야 했다.

“너는 나비린과 리세라에게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

“저는 폐하의 뱀이니까요.”

오드벨은 사적으로는 내 처남, 외척이다.

하지만 본인은 그걸 몹시 불편해하고 있었다.

오드벨은 영민하면서도 냉철하고, 내가 카라카스의 모든 종족을 아울러서 선도하는 이상적인 존재로 숭상하고 있었다.

나랏일을 하는데 여동생과 조카가 방해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나한테 미레이를 붙였지. 리젠 리브라타가 새로운 엘프 마누라를 얻게 되면 나비린이 물러나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저는 폐하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폐하가 잘못하셨을 리는 없으니 분명히 제 동생이 가당치도 않은 잘못을 저지른 게 확실합니다.”

오드벨의 목소리가 커졌다.

“폐하가 어떤 분이십니까? 20년 동안 칠죄신에 맞서면서 온갖 역경을 거치고, 전선의 병졸 하나까지 세심하게 챙기면서 종족을 뛰어넘어 모두를 품으신 분입니다. 제국의 건설 이후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하들과 백성들을 사랑해 주신 분입니다.”

“…….”

오드벨은 드물게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제국의 건설, 발전에 불철주야 이바지한 놈이었다.

뱀은 뱀이지만, 내 뱀 새끼다.

“그런 폐하가 갑자기 달라지셨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밤마다 가족들을 챙기시던 분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등을 지시지 않았습니까? 대신에 몇 배 이상의 업무를 보셨습니다만 보는 저로서는 정말 애가 많이 탔습니다.”

하시아의 타락을 알고 난 나는 일만 했고.

오드벨은 그런 나에게 우회적인 방식을 동원하면서, 제 딴에는 날 풀어 주겠다고 노력했다.

오드벨이 한숨을 쉬었다.

“……사랑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푸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결혼도 안 해 본 놈이 무슨.”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드벨, 이제 됐다. 너도 고생 많았지?”

“…….”

“렌시엘에게 이야기 들었다. 네가 그나마 정부를 잘 지탱해 줘서, 제국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아닙니다. 녹을 받는 신하로서 할 일을 했습니다.”

오드벨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오드벨의 어깨를 툭, 툭 두드려 주었다.

“나 황제 할 거다. 그러니까 내가 내 가족들하고 잘 지낼 수 있게, 정치적인 방법을 어떻게든 마련해 봐. 그게 이제부터 네가 머리 쥐어짜야 할 일이다.”

“…….”

“그러니까 이제 나비린하고, 리세라하고도 종종 만나서 이야기해라.”

오드벨이 흐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기하다 보면 무슨 단서라도 나오겠지. 이건 황제 명령이니 새겨 들어라.”

“폐하.”

오드벨은 몸가짐을 조심한다고, 황후가 된 나비린과 둘이 대화한 적이 까마득하게 오래전이었다.

남매가 보통 사이가 나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가족이다.

“너 믿는다, 이 뱀 새끼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

“……감사합니다.”

오드벨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윗사람의 한마디가 마음을 울리면서 모든 것을 풀어 주는 법이고.

남자의 눈물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저 묵묵히, 충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늦은 밤.

술상이 차려졌다.

참석자들은 나와 황실의 가족들이었다.

“입에 맞으시면 좋겠어요.”

상을 차린 건 시녀나 다른 이들이 아니었다.

리세라와 메이호, 그리고 다른 애들이었다.

자식이 차린 상이라니.

간단한 샐러드와 생선, 고기찜과 감자, 빵과 와인.

하지만 나는 술보다는 안주에 더 시선이 갔다.

“……와. 이걸 니들이 했다고?”

“제가 감자 깎았어요, 아빠.”

미리엘이 손을 들고 말하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네.

애들이…… 커서 아버지 술상도 차려 주고.

물론 다들 황자, 황녀라서 부엌일을 해 본 일은 없었겠지.

실제로 담백한 식탁이지만 보는 나로서는…….

메이호가 뾰족하게 말했다.

“잠깐만요, 아빠. 반찬 가짓수가 적다고 실망하시는 거예요? 저는 일부러 실력을 좀 감췄다고요. 다른 애들하고 맞추려고요.”

“음, 그래, 그래.”

“……아, 안 믿는구나. 두고 봐요. 내일 아침 해장은 제가 다 할 테니까.”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들 마시자.”

내가 잔을 들자 아내들과 자식들도 다들 술잔을 잡았다.

다들 술, 미리엘만 주스다.

쨍.

술잔을 부딪치고 다들 입으로 가져갔다.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신 나는 돌아보고는 말했다.

“보통 건배할 때는 구호를 하지 않았냐? 그런데 아무도 하잔 소리를 안 하네.”

“그럴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

세탄이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원하시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만.”

“이 녀석아, 원래 심각한 대화는 좀 더 풀어지고 나서 하는 거다만.”

나는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내들이 곤혹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들 잔 비우고 술 돌려, 그러면 이야기할 테니까.”

“…….”

“사실 나하고 너희들만 이야기할까 싶었지만, 생각을 좀 바꿨다.”

나는 나비린을 보면서 말했다.

“오기 전에 오드벨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예? 왜 갑자기요?”

“오드벨은 돌아가는 판을 이미 알고 있었지. 사실 얼마든지 너희들 편을 들어줄 수 있었다. 아니, 자기 여동생하고 조카가 곤경에 처하면 도와주는 게 정상이지. 하지만 놈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는 말했다.

“그게 제국 재상으로서의 몸가짐이라면서. 누군가는 지조가 있고 훌륭한 공인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

“오드벨이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는다고, 내 총애를 믿고 까분다고 여러 소리 나올 수 있다는 건 안다. 하긴 재상만 100년을 한 놈이고, 지금 시대의 권력자인 나비린의 오빠야. 사실 황실 제외하고 관료들 중에서 오드벨 이상의 권세를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을걸?”

다들 흠칫하고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왜 긴장해? 사실 그대로 말하는 건데.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폐하, 오빠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오드벨은 자기가 사실 권세가라는 걸 세상이 어떻게 볼까 염려하고 있다. 놈이 여자관계가 전혀 없는 건 그런 이유도 있을 거고.”

리세라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삼촌이 그래서 연애도 안 하신다고요?”

“놀랐지? 그럴 시간에 제국의 발전에 힘을 쓰겠단다. 자기 절제의 극치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계속 너희들도 안 보고 일만 하다 보니까 그거 따라 하겠다고 그러더라. 그렇게 100년 내내 제국 정부의 일만 한 놈이 걔야.”

“…….”

“하지만 난 오드벨처럼은 못 한다. 내 가족 없으면 못 해. 난 내 자식들 없으면 안 된다.”

오르카가 갑자기 목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메이호는 이미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일 끝나고 너희들 한 번씩 보는 게 내 소원이고 내 즐거움이었다. 그게 없어지니까 나는 말라 버렸고.”

“……아버지.”

리세라가 안타깝게 불렀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다들 모여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는 자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세탄이 진지하게 말했다.

장남, 믿음직한 놈이라는 건 이미 잘 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세탄. 하지만 너희들만 있는 거론 부족하다.”

“…….”

나는 내 아내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았다.

랑에이에 이셀렌, 렌시엘과 나비린, 그리고 바라메와 유하까지.

“너희들을 사랑했고 원망도 했다. 어떻게 할지 많이 고민했고, 생각하는 게 싫어서 아예 잊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많은 고락을 겪고 나니, 또 여기까지 와서 돌이켜 보니 그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

“너희들이 애들 엄마로서 소중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그래서 너희들이 싫어 죽겠는데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용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희들에게도, 내 자식들에게도 못할 짓이다. 차라리 서로 도저히 함께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아이들에게 사죄를 구하고 말겠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붙들어 두는 건 서로에게 너무 힘든 일이니까.”

“…….”

“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척하는 건 한계가 있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아이들도 스스로 말하듯이 다 컸다.

부부의 거취는 남편과 아내가 정해야 한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갈라선 지 오래되었다. 하루아침에, 천연덕스럽게 봉합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시일을 두고, 조금씩 지난 시절의 골을 메워 보려고 한다.”

“…….”

“간단히 말하면 집 나가지 말고 그냥 좀 앉아 있어라, 이것들아. 나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집 비우려고 해?”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진지하게 듣던 아내들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심지어 자식들마저도.

나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아, 거. 딴 년이 쫓아내려고 한다고 진짜 나가려고 해? 그것도 나에게 말도 없이?”

“아, 아니…….”

“말을 하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걸, 왜 바보처럼 맞고 있어? 니들 바보야?”

렌시엘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아, 무슨 소리 할지 뻔하니까 생략한다. 집어치우고 내 제안에 대한 결론만 말해.”

내가 물었다.

“나랑 살래, 말래?”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고?

나는 폭포도 베어 본 적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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