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6)
바깥은 정리했고
같은 일도 연출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인다.
제국군의 총수이자 황제였던 나는 이걸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정치, 대소사에 관여하는 요인들 앞에서 나타난 내가 미리엘을 품에 안고 있다.
이게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내가 시릭 카라카스의 자식들을 존중한다,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의미다.
“으으음.”
불러 모은 명사들도 내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비록 내가 재림한 칠죄신의 일부를 물리치고, 또 시릭의 환생이라면서 대중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있다지만.
그래도 제국은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를 기억하고 사랑했다.
황후들은 몰라도 그 자식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고.
더욱이 리세라와 미리엘, 메이호는 황도의 구호 활동에 많은 힘을 보태서 평판이 아주 좋았다.
“…….”
계단을 내려가는 내 품에 안긴 미리엘은 조용했다.
사전에 내가 세심하게 설명해서 입을 다물고 있지만.
아래쪽의 렌시엘을 살피는 눈빛이 흐리다.
아이도 분위기는 안다.
자기 어머니가 모르는 여자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정도는 바로 아는 것이다.
“괜찮아.”
나는 미리엘에게 속삭이고는 계단을 다 내려갔다.
“…….”
내가 미리엘을 넘겨주자 렌시엘은 얼른 받아들었다.
복잡한 표정.
내가 왜 이러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렌시엘을 압박하고 있던 마족 카리진이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2대 황제가 되실 분이시여. 저는 마족 카리진…….”
“응, 알아. 마족의 3대 가문 중 하나, 레트라이 가문의 딸이지. 시릭 카라카스와의 결혼 전선에서 엔라에게 밀렸고.”
“…….”
나, 시릭의 결혼은 정략성이 분명히 있었다.
최종적으로 마족에서는 엔라가 나와 결혼했지만.
후보로 거론되었던 다른 마족 여성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카리진이었다.
나는 픽 웃었다.
“저번 대선에 떨어지셨지만 100년 동안 절치부심하시고 다시 도전하셨네. 칠전팔기의 정신이 가상하다.”
“……좋게 봐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지금의 거침없는 언행은 꼭 초대 황제 폐하를 빼닮으셨군요.”
“아니, 시릭은 이 정도까지는 안 했지. 르메이!”
“예, 찾으셨습니까!”
파티장에 섞여 있던 인간 남성이 얼른 달려왔다.
제국군 군복.
카리진이 의아하게 보자 내가 말했다.
“설명할게, 지금 내 옆에 선 인간 남자는 제국 중앙군의 백부장 르메이다. 현재 업무는 모병 관리지.”
“……예?”
“현재 제국군에서는 병사 모집 중이다. 너도 입대해라.”
“…….”
황당해하던 카리진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2대 황제 후보께서는 참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진담인데? 내가 제국군 업무에 바쁜 애를 괜히 불러왔겠어? 너는 물론이고 너희 가문의 유력자들, 마족들 중에서 전쟁 경험자들은 모조리 입대해라.”
나는 검지로 카리진의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제국군이 널 원한다! 내일 아침에 당장 원서 제출해. 너 지금 몇 계위더라?”
“……이제 6계위입니다만.”
“오, 엄청 높네. 지금 입대하면 제국군 바로 백부장은 달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천부장? 이야, 때가 좋네. 아무리 계위가 높아도 특병부터 시작하는데, 하필 시국이 이래서 천부장부터 시작하다니. 부럽다!”
“…….”
“좋겠다!”
내가 호들갑을 떨자 카리진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족들이 황후로 내세웠던 엔라 워프레임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면 너희 마족들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제국에 대한 충성이 여전하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전장의 흙먼지를 모르는 사람을 배필로 맞을 생각은 없다.”
“저 역시도 군사에는 제법…….”
“오, 자신 있다고? 그럼, 천부장 카리진의 활약을 기대하지!”
“…….”
카리진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내 옆에서 미리엘을 안고 있던 렌시엘도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결혼하겠다고 온 여자를 입대시키다니.
음, 이거 전설적인 위업 아닌가?
카리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뭘 생각씩이나 해. 그냥 입대하라니까? 자세한 건 르메이가 세심하고 친절하게 안내해 줄 거다.”
“…….”
“지금 시국이 어지럽고 제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이거늘. 2대 황제에 오를 자격을 갖춘 내가 지금 시급하게 처리할 일은 혼인이 아니라 제국의 안정이지. 안 그런가?”
내가 군중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다들 멍하니 듣다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에는 맞으니까.
카리진은 당황하다가 소리쳤다.
“그, 그러면 저 엘프는 뭐죠? 저 이상한 엘프와 매우 긴밀한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
입가에 생크림이 묻은 미레이가 고개를 들고 갸웃거렸다.
……다들 심각한 상황인데도 물 만난 고기처럼, 케이크를 쉴 새 없이 먹고 있었다.
나는 애써 미레이를 변호했다.
“쟤가 저래 보여도 철도헌병대로 80년을 일했어. 흙먼지라면 실컷 마셨다.”
“전 지금 케이크 먹는데요, 특관님!”
“그거 다 먹으면 흙 먹을 줄 알아라.”
“……?!”
미레이가 깜짝 놀라서 겁먹는 건 무시하고.
나는 카리진을 돌아보았다.
“너만이 아니라 마족들이 하나같이 앞다퉈서 엔라를 처단하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 당장 엔라의 아들인 세탄이 달려와서 중앙군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마족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반란을 진압하는 선두에 서야 마땅하다.”
“…….”
“아니 그런가? 내 말이 틀렸다고 할 사람이 있는가?”
포효.
내 목소리에 파티장의 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백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싸워라. 권력이 아니라 명예를 찾아라. 그게 너희들이 앞서서 해야 할 일이다.”
“…….”
카리진은 입술을 깨물고는 말이 없었다.
나는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입대하면 잘 굴려 먹으면 되는 거고, 버티고 안 하면 입지만 좁아질 뿐이지.
“그리고 종위원장! 종위원장 도리엘!”
“…….”
종위원, 종족분쟁 해결위원회는 제국 정부의 부처 중 하나다.
다종족 국가인 제국 안에서 문화와 생활양식이 달라서 충돌하는 경우에 권고를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입김이 강력한 이들이다.
이들이 지금 황후들이 황성에서 나가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 부처장인 천족 남자, 도리엘이 나서면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만약 내가 2대 황제가 된다면 본래 후궁을 차지하던 황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예법에 있습니까?”
“……선례가 없어서 논의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일단 그냥 그대로 두시죠. 아직 내가 2대 황제에 오른 것도 아니고, 부인을 들인 것도 아닙니다. 황후분들은 100년 동안 제국을 평안하게 다스려 오셨으니 그 지혜와 경험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지금 내가 존대를 하지만, 태도는 어디까지나 하급자를 다루는 것이다.
도리엘은 좀 놀란 얼굴이다가 고개를 잠자코 수그렸다.
“그리하겠습니다.”
본래 종위원은 나서면 강력하지만, 경거망동을 삼가는 이들이다.
공식적으로, 이 사안은 내가 황제가 되면 논하자고 했으니 일단 물러난 것이다.
“으으음.”
“설마 이럴 줄은…….”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확 달라졌다.
내가 2대 황제 후보로서의 무력은 깨우쳐 줬으나 아직 정치력을 보여 주진 않았다.
하지만 미리엘을 안고 나타나면서, 시릭의 자제들을 존중한다는 걸 분명히 일러뒀고,
제국군 르메이를 말 하나로 다뤄서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도 알려 주었고.
까다로운 부처인 종위원도 한마디로 물리쳤다.
내가 녹록하지 않다. 아니, 노련하다는 걸 단숨에 입증했다.
이제 괜한 장난질은 못 치리라.
나는 마무리로 군중들을 향해서 말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2대 황제 후보에 오른 리젠 리브라타라고 합니다. 앞으로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의 지혜와 능력을 빌릴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이렇게 급하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지도와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정중하게 말하면서 술잔을 들어 보였다.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 둘 따라서 들어 올렸다.
“예,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충실하게 보필하겠습니다!”
“하하하. 리젠 폐하 만세!!”
울려 퍼지는 소리들.
내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자 다들 기분 좋게 털어 버렸다.
그러고는 귀족부터 이종족 인사들이 나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나는 옆걸음질을 해서는 렌시엘과 붙어 버렸다.
지금부터 렌시엘과 긴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단 식으로.
이 정도까지 했으면 됐지. 더 상대하기는 귀찮다.
옆에 선 렌시엘이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죠.”
“제국군에 인재가 필요해서 모병하러 왔지.”
“어울리지 않게 회유까지 하시잖아요.”
“나도 가끔 존대하고 분위기 잡을 줄 알아. 황제 모드가 따로 있다고.”
렌시엘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옆에 선 미리엘의 손을 잡은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면 끝내고 시간이나 좀 내.”
“예?”
“가족끼리 같이 한잔하자, 애들도 불러서.”
나는 앞만 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제 아이들도 다 컸으니까, 같이 술 마셔도 되지.”
“…….”
렌시엘은 놀란 얼굴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미리엘은 안 되지만요.”
“나는 안 돼요?”
렌시엘의 손을 잡고 있던 미리엘이 토라져서는 말했다.
렌시엘이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랑 같이 있으면 돼요. 대신 말 잘 들어야 해요, 미리엘.”
“예, 잘 들을게요.”
미리엘이 사랑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있는 내가 흐뭇해지는데…… 손에 접시를 든 미레이가 다가왔다.
“그럼 폐하, 따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렌시엘은 내게 눈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케이크를 냠냠 먹던 미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특관님,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여기 오면 옆에 서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응, 그거만 하면 돼.”
“진짜요? 이런 거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케이크가 살살 녹아요!”
“……넌 진짜 당뇨 안 걸리냐? 애가 볼 때마다 케이크만 퍼먹고 있어.”
“전 엘프잖아요. 풀만 먹어도 건강하고 고기만 먹어도 살 안 쪄요.”
엘프가 그래서 사기지.
카라카스는 본래 굶어 죽는 사람들도 왕왕 나오던 곳, 풀뿌리를 먹어도 영양 보충이 되는 엘프들은 정말 축복받은 종족이었다.
나는 혀를 차고 말했다.
“케이크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데, 너 시집 못 간다.”
“에이, 무슨 그런 저주를 하세요.”
“아니, 진짜 못 가. 내 옆에 있잖아.”
나는 의미를 알라는 듯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포크로 케이크의 딸기를 찍은 미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우릴 보고 있네요? 특관님이 유명해서잖아요?”
“……음.”
평소라면 구박 한 번 하고 끝내겠지만.
이건 사안이 중대하지.
나는 미레이에게 설명했다.
“내 결혼 문제가 지금 정치적인 쟁점이 된 거 알지? 그사이에 네 이름도 오르내리던 거.”
“예.”
“그런데 지금 다들 보는 앞에서 우리 둘이 다정하게 있잖아. 그러면 소문이 퍼지지.”
사실 이건 황후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내가 지나치게 황후들을 가까이하면, 불쾌한 평판이 뒤따를 수 있었다.
황후들이 권력을 노리고 2대 황제와 붙어먹었다, 뭐 그런 거.
하지만 내가 미레이를 내세우고, 황후들을 조언자로 두겠다고 하면?
그런 오해를 방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네 혼삿길은 당분간 막혔다, 미안하다.”
“그럼 특관님이랑 결혼할래요.”
“…….”
얘가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어서 미쳤구나.
포크를 입에 문 미레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원판이 워낙 예뻐서, 입 다물고 있으면 그냥 끝내주는 미인으로 보인다.
남자라면 어지간해서는 거부하지 못할 미모지만…….
“나랑 결혼하면 케이크 금지다.”
“……잠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싫어요!”
어지간히 한심해야지!
미레이가 정색하고는 반발했다.
“그런 조건이 어디 있어요! 전 먹을 거예요! 몰래 숨어서라도!”
“결혼하지 말고 당당하게 먹어.”
“싫어요! 특관님하고 결혼하고 몰래 먹을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 안 하면 우리 둘 다 행복하잖아.”
“에잇!”
한데 미레이가 갑자기 딸기를 내 입으로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미레이가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했다.
놔둘 수는 없어서 팔로 허리를 감싸고 잡아 주었다.
“야, 야, 위험해.”
“……히이잉, 떨어졌잖아요.”
난리 치는 바람에 미레이가 들고 있던 접시에서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미레이가 몸을 구부려서 주우려고 하자 나는 기겁하고는 붙들었다.
“야, 먹지 마! 주우려고 하지 마! 지지야! 지지!”
“아직 괜찮아요! 싱싱해요!”
“가서 그냥 하나 더 달라고 해!”
“아까운데…….”
미레이는 안타깝게 보면서도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면 가서 하나 더 먹을게요. 흘린 건 특관님이 치워 주세요.”
“…….”
미레이는 몸을 돌려서 디저트 코너로 돌아갔다.
나는 얼이 빠져서는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이 얼른 다가와서는 치워 버렸다.
수군수군.
연회장에서 나와 미레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이들이 복잡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황후는 정해진 것 같은데…….”
“출신이 불분명한 엘프인가?”
“으음, 인간 남자는 엘프를 선호하는 편이죠.”
“…….”
미레이를 내세워서 기대한 효과기는 한데.
지나치게 효과가 좋은 것 같다.
“신발에 묻었어.”
갑자기 내밀어진 손수건.
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셀렌이었다.
나는 받아들고는 말했다.
“고맙다.”
“……우리야말로.”
이셀렌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르카를 내세워서 마련한 자리지만, 이셀렌은 이게 내 의도라는 것쯤은 바로 알리라.
내가 이렇게 나서서 정리해 줄 것도 예상 밖이었을 테고.
이셀렌은 내 옆에 1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서 침묵했다.
둘만 있으면 다르지만 지금은 사람들 앞이니까.
아니, 이제는 둘만 있어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우리는 너무 사이가 멀어졌으니까.”
“…….”
“렌시엘에게도 말했지만, 이거 끝나고 따로 시간 좀 내라.”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출정 전에 너희들의 일도 정리하련다.”
복잡하게 꼬여 버린 집안일.
홀가분하게 정리하고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