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5)
판세는 뒤집어 줘야 제맛
황성의 목욕탕.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쉬고 있었다.
“후우우.”
다리를 쭉 뻗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니 콧노래가 나온다.
끼이익.
욕실 문이 열렸다.
내 부름을 받고 온 아들, 오르카가 나를 흘끗 보았다.
묘하게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그 콧노래를 보니까 역시 아버지가 맞네요. 저 어릴 때 같이 목욕할 때랑 똑같잖아요.”
“설마 아직도 안 믿고 있었냐?”
“믿지만 외모는 강력한 선입견이잖아요. 너무 똑같이 행동하는 걸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데요.”
오르카도 욕조 안에 들어와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치를 살피는 얼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어볼 수 없거든.”
“예, 말씀하세요.”
“지금 황실을 둘러싼 정치 구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
사실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략적인 큰 줄기만 정리하고 로데릭, 알리시아와 멜리우스 그리고 황후들에게 맡겨두고 관심을 꺼 버렸다.
내게 가장 큰일은 자식들을 지키는 것,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오르카가 잠시 망설였다.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 녀석아, 모른 척하지 말고. 누나하고 엄마 편만 들래?”
“…….”
내가 추궁하자 오르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냥 세탄 형이나 다른 사람에게…….”
“다들 나한테 일부러 말 안 하는 게 티 나서 그런다. 그리고 세탄은 이런 세심한 일은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아. 아니…….”
사실 세탄의 입장은 굉장히 난처하다.
반란을 일으킨 엔라의 아들이니까.
오르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입막음 당했어요.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나도 안다. 그래서 여기로 부른 거잖아.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리젠 리브라타의 아내, 2대 황제가 될 남자의 배우자 이슈.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지만 다들 관심이 많겠지.
그런데도 나에게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선대 황후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면, 더더욱 나에게 보고가 들어와야 마땅한데.
“이셀렌을 필두로 황후들이 나에게 일부러 감추고 있는 거겠지. 심지어 리세라나 다른 애들도 나한테는 비밀로 하고.”
“…….”
“가족에게 따돌림당하니까 섭섭하다.”
“아,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진짜, 미안하게.”
오르카는 순간 정색했다.
이 녀석은 현장 요원이면서도 은근히 감정적이고 정이 많았다.
“되게 애매한 문제고, 또 어머니들이 부탁해서 일부러 입 다물고 있던 거예요. 리세라 누님하고 메이호 누나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저한테 몇 번이나 말했다고요.”
“알았으니까 말해 봐.”
“…….”
“내가 지금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응?”
나는 일부러 사정조로 말했다.
사실 내가 오드벨을 불러서 경을 치거나, 다른 루트를 통해서 한바탕 뒤집어 버리면 문제 파악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오르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가 말씀드렸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그래, 얼른 말해 봐.”
“문제가 단순하지 않아요. 일단 지금 아버지, 그러니까 리젠 리브라타가 누구와 결혼할지가 굉장히 뜨거운 이슈예요.”
오르카는 일단 입을 열자 청산유수였다.
“아버지가 우리들을 굉장히 아껴 주시고, 또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라는 풍문도 돌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들과 재혼하는 건…… 상당히 별개의 문제거든요? 환생이라는 풍문도, 리젠 리브라타의 황제 등극을 보다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한 퍼포먼스라는 해석도 상당하고요.”
“…….”
의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만하지.
오르카는 한숨을 섞어 가며 말했다.
“설사 아버지가 시릭의 환생이라는 걸 믿더라도, 황후분들과 다시 함께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황후들은 시릭 카라카스를 시해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고, 10년 이상 별거한 사이다, 그런 반대 의견이 대세예요.”
“…….”
“리젠 리브라타와 어머니들과의 재결합을 바라는 목소리는 소수입니다. 아버지가 환생했다는 걸 미심쩍어하는 이들도 도덕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르카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엔라 어머니가 지금 반란을 일으키셨잖아요. 그 일 때문에 마족들 사이에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음?”
“어머니들과의 결혼은 이종족들과 정략 목적이 섞여 있었잖아요. 마족들로서는 자기들의 대표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고 간주하게 되죠.”
“그게 그렇게 되네?”
“그래서 지금 마족들은 리젠 리브라타와 마족 여자를 결혼시켜서 엔라 어머니의 일을 묻어 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종족 전체의 명운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적극적이죠.”
오르카의 정황 분석, 상당히 면밀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카가 말했다.
“내친김에 말씀드리는데 어머니들의 입장은 굉장히 난처하세요. 사적인 감정은 제가 말씀드릴 게 아니니까 관두고요. 요즘 흑색선전이 많거든요. 어머니들이 임시 통치에서 그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다, 사실 엔라 어머니와 짜고 치고 있다, 뭐…… 그런 거요.”
“아니, 진짜 엉망이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정치 쪽은 맡겨 뒀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했는데?
오르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들은 그냥 아버지 모르게 타이밍을 봐서 적당히 나가실 생각이셨어요.”
“아니, 진즉 나한테 말을 하지. 그러면…….”
“아버지는 계속 이리저리 바쁘셨잖아요. 거기다가 아버지에게 이 이상 강요하거나 짐짝을 안겨드리는 건 영 아니죠.”
“짐짝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오르카는 오래 고민했다는 투였다.
“어머니와 과거에 얽힌 일, 굉장히 복잡하잖아요. 우리 자식들이 뭐라고 간섭할 부분도 아니고요. 우리도 이제 다 컸고요. 아버지는 아버지의 행복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음, 그래요. 이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아니, 난 너희들을 짐으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체가…….”
“압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부담스러워하시잖아요.”
오르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오르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뭐, 어머니들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셨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의견을 통일하신 것 같고요. 뭐 그리고 저희들로서도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어도 별 이견은 없어요. 이제 어머니 몇 분 더 늘어난다고…….”
“엄청 끔찍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나는 벽에 머리를 대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다.
아르센이 미레이를 보낸 이유도 대충 알겠고.
나는 이마를 누르고 말했다.
“오르카, 마족들이 리젠과 결혼시키려고 밀어붙이는 여자가 누군지 아니?”
“예, 카리진 님이실걸요.”
“…….”
나도 아는 이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 황후들이 어떤 식으로 압박당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번에 준비하시는 출정식, 사실 그걸 대관식으로 오인하는 이들이 다수거든요. 그러니 황후들이 그날 퇴거하겠다고 공식적인 약속을 해 달라고 합니다. 렌시엘 어머니에게 종위회의 상소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다른 황후들은 이제까지 자리를 많이 비웠지. 하지만 렌시엘은 100년 동안 꿋꿋하게 황성을 지켰고.”
즉, 렌시엘이 황성을 떠난다는 건 상징성이 있다.
시릭 카라카스의 황후들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로.
“종위회에 상소를 올리라고 정치적인 공작을 가하는 게 마족들이고?”
“예, 다른 종족들도 개입하긴 했지만 마족들은 진짜 상황이 급해서요.”
“…….”
나는 눈을 감았다.
정치적인 사정, 돌아가는 판은 다 알았다.
하지만 다 둘째 치고.
내 아내들을 집 밖으로 내쫓으려고 한다는 자체가 불쾌하다.
나도 아내들의 얼굴을 안 보면 안 봤지, 그렇게까진 않았다.
“알겠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지금 지랄하는 것들 싹 한자리에 모아 봐라.”
“어머니가 알게 되실걸요?”
여기서 어머니는 이셀렌이다.
다크엘프의 정보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속일 수는 없겠지. 내가 오늘 저녁에 축하 파티를 연다고 해.”
“……아버지, 파티라는 게 그렇게 바로 열리지 않아요.”
“닥치고 오라고 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옷 적당히 입고 손에 술잔 하나씩 들고 있으면 그게 파티지. 음식도 대충 차리고, 악단도 대충 불러. 화려할 필요 없어. 그냥 뭉개 버리려고 모이라는 거니까 구색만 갖추면 된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만 시간 주시면 안 돼요? 그래도 아버지가 공식적으로 여는 자리인데 초라하면 말이 많아져요.”
오르카가 사정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러던가. 네가 해야 할 건 그 자리에 엔라를 제외한 황후들을 모두 모으고, 괜한 상소를 올리는 종위회 놈들, 그리고 마족들이 새롭게 미는 여자를 불러오는 거다. 그러니까…… 리젠 리브라타가 황후를 물색하는 자리라는 풍문을 퍼트려.”
“그것도 하루 안이죠? 너무 빡센데요. 그리고…….”
“이셀렌이 알아도 상관없다. 혹시 너를 나무라면 내가 오드벨에게 듣고 하는 일이라고 해.”
오르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
“걱정하지 마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아내를 혼내더라도 내가 하지, 딴 새끼가 하게는 안 놔둔다.”
출정식 전에 정리하고 가야지.
* * *
다음 날 밤.
황성, 중앙성.
연회장에서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렸다.
보통 파티는 당일치기가 아니라 충분한 시일을 두고 열리는 것이다.
다른 파티와 일정이 겹칠 수도 있으니까.
누가 주최했는가? 그 파티에 얼마나 많은 명사들이 모였는가?
고위층의 파티는 힘, 사회적인 파워를 가늠하는 자리다.
하지만 이번 파티는 단 하루 만에 결정된 자리인데도 부름을 받은 이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철혈성군을 제외한 황후들 전원, 부름을 받은 이들 모두.
“…….”
5황후 렌시엘은 찻잔을 손에 들고는 가만히 서서 장내를 지켜보았다.
황도의 명사, 귀족, 관리들이 급하게 모인 자리.
자리 배치, 사람들의 움직임만 봐도 권력의 향방을 알 수 있다.
랑에이와 바라메는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중.
이셀렌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나비린은 엘프들과, 유하는 마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작다.
명색이 황후들인데 둘러싸고 있는 인원들이 서넛밖에 되지 않았다.
“…….”
외려 엘프들은 지금 케이크를 퍼먹는 여자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쉬폰 케이크에 정신이 팔린 엘프, 헌병대원 미레이.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가 점찍은 여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지금 연회장의 절반이 주목하는 여자.
정작 미레이는 포크를 입에 물고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치즈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 중 뭘 먹을지 고민 중이시다.
“……참 꾸밈없는 사람이네요.”
미레이는 귀여운 편이다.
나머지 절반이 주시하는 여자.
붉은 머리카락, 보라색 피부의 마족.
마족들이 2대 황제의 배필로 밀어주는 여자, 카리진.
그녀의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파티는 놀이터가 아니라 전장이다.
지금 카리진은 그 어느 황후들보다 화려한 군세(軍勢)를 거느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돋보이려고.
초대 황제의 황후들은 이제 지는 해, 자기가 떠오르는 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
하지만 렌시엘은 별로 화나지 않았다.
그녀는 정치적인 식견이 있다.
엔라의 반란, 정치적인 입장이 불안해진 마족들이 필사적으로 저러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렌시엘이 쓴웃음을 짓는데…… 한참 웃던 카리진이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을 거느리고.
전쟁터에서 돌격해 오는 것이다.
“…….”
렌시엘이 정면으로 응시하자 멈춰 선 카리진이 말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렌시엘 전하.”
“그렇군요, 카리진.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2대 황제 후보가 선출되었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리젠 리브라타는 대체 어떤 분이시죠?”
“직접 만나 보시면 알 겁니다.”
다소 도전적이고 무례하지만 렌시엘은 너그럽게 넘겨 버렸다.
카리진도 마족의 명운을 위해서, 반드시 리젠 리브라타와 맺어져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으리라.
어떻게 아냐고? 렌시엘도 그 과정을 거쳤으니까.
선배로서 후배의 당돌함을 너그럽게 넘겨 줄 수 있다.
하지만 카리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 황후분들이 리젠 리브라타와 교류가 아주 잦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권력의 이양을 위해서 필요한 절차입니다.”
렌시엘이 우아하게 받았다.
그러자 카리진이 뒤쪽, 자기 사람들을 흘끗 돌아보고는 말했다.
“정말 그것뿐인가요? 그럼 다행이지만요.”
“예, 걱정하실 건 아무것도 없습니…….”
“황녀를 내세워서 리젠 리브라타를 사로잡으려는 소문은 역시 헛소문이죠?”
“…….”
이게 대관절 뭔 소리지?
렌시엘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2대 황제 후보가 탄생하면 초대 황제의 자식과 맺어서 정통성을 계승하잔 정치적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리젠이 시릭의 환생이라는 걸 안 순간, 다 없던 일이다.
“그런 우려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카리진.”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아직 어리디어린 따님을 내세워서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시려는 건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
울컥.
너그럽게 넘기려던 렌시엘의 가슴 속에 불꽃이 타올랐다.
의심이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미리엘을 정조준해?
카리진이 눈웃음을 쳤다.
“그런 소문을 들어서 우려했는데요. 제 오해였다니 정말로 다행이네요. 그런 우려는 절대로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
같이 마시고 있던 랑에이나 바라메, 다른 황후들도 이 자리를 주목하고 있다.
파티장의 모두가 렌시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는 말을 잘 골라야 한다.
렌시엘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시릭을 위해서…….’
홀로 되뇌곤 렌시엘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헛소문이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누가 헛소문이래?”
팍 치고 들어오는 퉁명한 목소리.
렌시엘과 카리진의 대결을 지켜보던 수백 개의 눈이 계단으로 향한다.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
미리엘을 가슴에 안은 리젠이 불쾌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황녀가 귀여운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아버지에게 딸은 세상 무엇보다도 귀여운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