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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64화 (16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4)

마음의 그림자

나와 마주 앉은 선이 가는 얼굴.

리브라타 백작가의 망나니.

리젠 리브라타가 앉아 있었다.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새하얀 공간이고.

―이렇게 서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인가, 시릭 카라카스?

“…….”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몸을 살펴보았다.

굵은 팔뚝, 떡 벌어진 어깨.

시릭 카라카스의 몸이었다.

―자, 이제부터 내 말을…… 뭐 하는 거야?!

“좀 기다려 봐.”

나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물구나무를 섰다.

“초능력도 발동을 안 하는데 물구나무를 설 수 있다니. 거기다가 갑자기 시릭의 몸이 되었다는 건 여기가 보통 공간은 아니라는 거군. 하여간 이래서 약이라는 건 남용하면 안 된다니까.”

―……정신 사나우니까 제대로 좀 앉아서 말해 줄래?

“불만 있냐? 나하고 독대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연병장에 가득했는데?”

―그 사람들도 네놈의 엉덩이랑 대화하고 싶진 않았을 거다…….

리젠이 투덜거리자 나는 몸을 돌려서 다시 앉았다.

리젠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자, 이젠 내 육체를 마음대로 빌려 쓰던 대가를…….

“구닥다리 레퍼토리 말하지 말고. 내가 칠죄신이냐? 다른 사람의 육체를 함부로 뺏을 수 있게?”

―이미 칠죄신하고 비슷한 존재가 된 거 아닌가? 너도 아까 바라메 말을 듣고 좀 뜨끔하지 않았어?

리젠 리브라타가 말했다.

―일부러 자세히 물어보지 않고 얼버무렸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섭지 않아? 끝없이 윤회전생 하면서 변란이 일어날 때마다 각성하는 존재? 그건 사실 원래 있던 몸의 주인, 그 기억과 인격을 말살하는 거 아닐까? 칠죄신이 남의 육체를 함부로 쓰는 것처럼.

“…….”

―아니, 더 나아가서 너와 칠죄신은 이제 거울처럼 마주 보는 존재가 된 거 아닐까? 앞으로 칠죄신이 세상에 변란을 일으킬 때마다 너는 다시 각성하고 맞서려고 할 거야. 끝도 없는 술래잡기를 하게 될 거라고.

리젠이 빙글빙글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처음 볼 때부터 밥맛없게 생겼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진짜네. 아, 눈 썩어.”

―……이제까지 네가 쓰던 얼굴이다만?

“나는 시릭 카라카스인데? 내가 써 주면 고맙다고 얼른 있는 돈을 다 바쳐야지 어디서 투정이야?”

내가 뻔뻔하게 받아치자 리젠은 입을 다물었다.

놈의 말문을 막아 버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방금 지적한 불안, 공포가 없는 건 아니지. 끝도 없는 추가 근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달갑지도 않고. 내가 다음 환생, 다다음 환생에도 지금처럼 열정적일까?”

고조선 사람이 한국인을 보고, 자기 후손이라고 기뻐하면서 목숨을 걸고, 성심을 다할까?

보통 무리지.

“바라메가 괜히 같이 세상을 등지자고 권하는 게 아니야. 나도 시간에 닳아 버릴까 봐 걱정하는 거지.”

―하지만 여기서 쉬어 버리면 그럴 일은 없지. 그냥 네 몸은 원래 주인, 나 리젠 리브라타에게 돌려주고 너는 여기서 빠지라고. 그럼 우리 둘 다에게 좋은 일이잖아?

“그래, 확실히 여기가 편하긴 하네.”

말 그대로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냥 눈을 감아 버리면 얼마든지 자 버릴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데 편하다는 감각이 느껴질 리가 없지. 즉, 이건 정신 오염이다.”

―…….

“애당초 리젠 리브라타의 얼굴로 나온 게 실수다. 넌 그냥 나를 몰아세우려는 수작질에 불과해.”

―그러니까 내가 진짜 리젠…….

“넌 가짜 리젠이고 내가 진짜 리젠 리브라타다. 자, 지금부터 증거를 댈 테니까 잘 들어라.”

내가 무게를 잡자 리젠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멜리아가 너무 좋아.”

―……뭐?

“봐, 여기서 얼이 빠진 네놈은 가짜 리젠이다! 진짜 리젠이라면 그냥 고개를 끄덕였겠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나는 리젠 시절의 기억이 불분명해. 하지만 그건 기억상실이나 기억의 혼동이라고 봐야지. 시릭 시절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남은 걸 보니까…… 기억이 혼재되어서 제대로 불러내지 못하는 거 아닐까?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베드 섹터 뜨면 불러오기 오류가 뜨잖아? 그래도 물리적인 하드는 하나라고.”

―……어, 음.

“기억은 애매해도 감정은 확실해. 난 아멜리아뿐만이 아니라 로데릭이나 칼비나, 내 아버지를 좋아한다. 리젠을 아껴 주는 가족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온갖 감정이 솟아오른다. 이게 바로 내가 리젠이라는 증거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야, 나 좋다는 놈은 지천에 깔렸다? 초대 황제를 숭배하고 공경하는 이들은 무수하게 많아. 나 역시도 내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지만…… 설사 아멜리아나 로데릭이 초대 황제를 싫어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사랑할 거다.”

―…….

“결론, 리젠의 얼굴을 하고 앉은 너는 그냥 가짜야. 내 마음의 불안 같은 게 형상화된 거겠지.”

나는 시릭이자 리젠이다.

몸을 빼앗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리젠이 멍하니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다 들통났군. 나는 네가 망각한 기억과 불안이 엉켜서 만들어진 그림자다.

“굳이 리젠의 모습을 취한 이유는 뭔데?”

―여기 들어오면 가장 끔찍한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어 있으니까. 정신 수양이 깊을수록 이 함정에 벗어나기 어렵지.

얄궂은 일이다.

진리를 갈구할수록, 의미를 부여할수록 내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가는 법이다.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추구한 게 잘못되었을까 봐.

“마구니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바라메가 왜 열반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군. 여긴 상당히 불교적인 곳이네.”

―자, 그럼 그냥 여기서…….

“야, 나 집에 갈 거야. 씨알도 안 먹히는 설득 관두고 얼른 주지.”

나는 말을 끊고는 손을 내밀었다.

―뭐?

“돈오에 달하면 뭐 경지가 상승하지 않냐? 아이템 좋은 거 줘라, 별로면 버린다.”

―……이미 줬다, 이 속물적인 녀석아.

리젠, 아니 그림자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몰랐냐? 나는 원래 속물이었다. 속세에서 구르며 여자를 사랑하고, 내 아이를 목마 태우고, 하고 싶은 말은 해 버리는 놈이다. 눕고 구르고, 다들 같이 밥이나 먹고. 그거면 된다.”

―그럼 사랑하는 황후들은 어쩔 거냐?

“아니, 그 이야기가 왜 갑자기 나와? 넌 내 내면의 불안이라며?”

―원래 사람은 자기 마음도 잘 모르는 법이야. 하지만 너도 가능성 하나를 떠올리고 있을 텐데? 자식들과 이야기 나누고 서로 마음을 열고 같이 자면서 정신력이 크게 상승하지 않았나?

그림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식과 마음을 열고 대화해서 네 경지가 훌쩍 올라갔다. 그러면 아내들과도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 네 초능력이 다시 한 번 크게 상승하지 않을까?

“……음, 젠장.”

지적이 맞다.

내 자식들과 웃고, 떠들고 자고 일어나니 초능력의 수준이 훌쩍 올랐다.

그럼 아내들에게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그림자가 웃었다.

―당황스럽지? 이게 바로 자가당착이야. 그나마 너는 정신력이 남다르니까 버티는 거다만.

“알았어, 나도 한 번 정리할 생각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알려 주마, 칠죄신을 죽일 방법을.

“뭐?”

그림자가 조용히 말했다.

―신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니까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아니다. 결국 거대한 정신 에너지에 불과…….

의식이 돌아왔다.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약을 먹었던 황성의 객실이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내 옆에는 마력램프가 빛을 밝히고 있었다.

“…….”

일단 마력부터 일으켰다.

7계위의 보라색 마력.

특급 마력약의 효험을 보긴 했는데…….

삽시간에 전신을 휘감아서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뭐야?”

너무 반응속도가 빠른데?

원래 마력이라는 게 생각하고, 발동하는 데 딜레이가 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1초 안팎이었다.

내가 초능력, 염동결계나 염동력을 발동하는 시간은 0.5초 내외.

덕분에 나보다 마력의 경지가 높은 적들을 꺾을 수 있었지.

한데 지금 마력 발동은 내 염동결계보다 빨랐다.

대략 0.3초 정도?

“…….”

나는 시험 삼아서 주먹을 휙 질러 보았다.

주먹보다, 주먹에 감긴 마력이 훨씬 더 빠른 궤적을 뿌렸다.

“……우와, 이거 뭐야.”

그냥 반응속도가 미쳤는데?

다들 HDD 쓰는 세상에서 나 혼자 SSD 쓰는 거다.

육체, 마력이 남다르게 강해진 게 끝이 아니다.

리젠이던 시절의 기억들도 거의 다 돌아왔다.

“으으음.”

더불어서 부끄러운 기억들도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끄으응.”

……리젠 리브라타가 왜 그리 임자 있는 여자에게 집착했는지 알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리젠은 일단 귀족이고, 또 얼굴도 제법 괜찮았다.

상당히 싸가지가 없었지만 필요하면 꾸밀 수 있는 놈이었다.

즉, 여자를 유혹하는 게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는데.

나는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거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겠네.”

리젠이던 시절에는 시릭의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황후들에 대한 감정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무의식중에 리젠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던 거다.

“…….”

고개를 가로젓던 나는 소파에 앉은 인영을 뒤늦게 발견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세상모르고 자는 미녀.

……미레이였다.

방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아, 뭐야. 얘가 여기 왜 있어.”

미레이는 얼굴 하나는 예뻐서 입 벌리고 자는데도 외려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을 미레이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덥석.

푹 자던 미레이는 입에 내 재킷 자락이 들어가자 입으로 쪽쪽 빨았다.

“…….”

신이시여, 저 화상을 대체 어째야 합니까?

황제인 나는 모르겠으니까 댁이 제발 알아서 해 주십쇼.

“에퉤퉤!?”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 미레이는 내 재킷을 뱉으면서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붕붕 휘두른 미레이는 나를 보고 반갑게 말했다.

“아, 특관님! 일어나셨어요?”

“넌 대체 여기 왜 있어? 누가 있어도 된다고 했어?”

좀 정떨어질 정도로 정색하긴 했지만 문제가 좀 귀찮아졌다.

지금 시간은 초저녁이다.

나이 찬 남녀가 단둘이서만 방 안에 있으면 소문이 돌기 딱이다.

거기다가 황성에는 이런저런 눈과 귀가 많고.

내가 2대 황제 후보라는 것까지 합쳐 보면 진짜 이상한 오해 받기 딱 좋았다.

“예? 대장님이 보내셨는데요.”

“……아르센이?”

“예, 대장님 말씀 전하러 왔는데 재상님이 저한테 특관님 옆에 있으라고 했어요.”

“…….”

오드벨은 내가 뭘 우려하는지 알 텐데.

그러고 보니 놈이 미레이와 결혼할 생각 없냐고 물어봤지?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미레이가 말했다.

“아, 그럼 바로 말씀드려도 돼요?”

“그래, 뭔데.”

“음, 그게…… 저한테 특관님의 애인인 척하라는데요?”

“…….”

아르센이 뭐 잘못 먹었나?

하지만 그놈은 그나마 내 부하들 중에서 이성이 있다.

나는 손을 저어서 말했다.

“전후 사정을 말해 봐. 왜 그러라는데?”

“아, 지금 황성 안에서 황후분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고 있다는데요.”

“원래 나빴잖아.”

“아뇨, 잘못하면 방 빼야 한다고 했어요. 그건 너무하니까 저보고 특관님에게 잘 말씀드리래요. 그리고 마족들을 막아 보고요.”

“…….”

얜 진짜 설명을 못 하네.

내가 한심하게 보자 미레이는 끙끙거리다가 뒤늦게 생각났단 투로 말했다.

“아, 맞다. 사실 황후분들이 여기 계시고 싶어 했는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고 제가 있던 거예요.”

“…….”

밀실에 남녀 단둘이 있으면 오해 사기 딱이니까.

나도 그래서 자식들하고 같이 잘 때, 침실이 아니라 개방된 응접실에 자리 깔고 눕지 않았던가?

황성 안에서는 이런저런 풍문이 붙고, 그게 민심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조금씩 상황 파악이 된다.

“방 빼라는 건 뭔 소리인데? 제대로 설명해 봐.”

“……특관님, 저는 헌병대원이지 정치가가 아니라고요.”

“설명 못 하면 실직자가 될 거다.”

“……?!”

미레이는 깜짝 놀란 얼굴로 변해서 다시 신음을 흘렸다.

이 녀석에게 이야기를 듣느니 그냥 오드벨을 불러서…….

“…….”

아니지.

오드벨도 무작정 믿을 순 없다.

오드벨은 나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하지만, 때로는 사후 보고로 일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굳이 아르센이 널 콕 짚어서 보낸 이유가 있겠지. 얼른 말해 봐.”

“아, 그러니까 특관님은 지금 2대 황제 후보시죠? 그런데 이대로라면 옛날 황후분들이 죄다 황성 밖으로 쫓겨나신다고 했어요. 지금 정치적 여론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데요.”

“…….”

나는 이마를 눌렀다.

조금씩 이해가 간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대충 그런 소리 하면서?”

“예! 그런 이야기가 많다고 하셨어요! 황후분들도 워낙 적들이 많은 편이라고 하셨고요. 재상님은 방관하실 거래요.”

“그래, 대충 알았다.”

나, 리젠 리브라타가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라는 여론이 많아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이다.

리젠은 원탁회의에서 뽑힌 2대 황제 후보, 이번에 바라메까지 꺾었으니 사실상 모든 황후들의 동의를 얻어 낸 셈이다.

“이제 내가 2대 황제가 되는 건 기정사실, 대관식만 남았다는 거지. 그러니 계산 빠른 놈들이 2대 황제의 황후들을 물색하고 있고.”

그 전에 시릭 카라카스의 부인들은 황성에서 나가 달라.

대충 그런 여론이 조성되고 있단 거다.

내가 그동안 군사적 해결, 파군의 탐색에만 매달리는 동안 정치판에서 떠오른 이슈다.

전통 있는 국가라면 상황(上皇)의 배우자를 태후라고 받들겠지만…… 천년제국은 카라카스의 인류가 처음 가져온 통일 제국이었다.

그런 선례는 아직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애들이 보는데 아내가 집 밖으로 쫓겨나는 걸 방관하다니.

못할 짓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레이, 나 좀 도와라.”

황후들의 일, 정리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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