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2)
싸우기 전에 승리한다
내가 리젠으로 환생한 게 우연이 아니다.
칠죄신이 다시 돌아오려고 하자, 그 시기에 맞춰서 환생한 거라고?
그것도 앞으로도 계속?
나는 일단 반사적으로 주변 군중들을 살폈다.
경찰의 통제가 있고, 또 소음들이 많아서 엘프들도 못 듣는다.
“그게 정말이냐?”
“보통은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대는 신을 세상의 바깥으로 추방한 이, 그 순간에 이 세상에 묶여 버린 것이니라.”
바라메가 설명했다.
“본래 강력한 혼일수록 그 차원에 강하게 얽히게 되지. 가진 재산이 많을수록 이사가 어렵다는 비유라면 적당하겠군.”
바라메는 나를 가련하게 바라보았다.
“자, 이제 이 몸과 함께 세상을 등지자고 하는 이유를 좀 알겠느냐? 지금이야 그대가 사랑하는 전우와 가족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하려고 싸운다지만, 다음에는 어찌할 것이냐?”
“…….”
“이번이 첫 환생이라고 쳐도, 다음 환생은? 다다음 환생은 어쩔 것이냐? 시대가 원할 때마다 영원히 재림하는 황제, 그건 인간의 영혼으로 버틸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니라. 그대는 환생하고 싸움을 거듭할수록 지금의 빛을 잃어 가고, 무뎌질 것이니라.”
바라메가 나를 보는 시선에는 동정과 보다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은근히 기뻐하네.”
“……으음.”
“넌 표정 숨기는 게 안 돼. 너랑 같은 고락을 맛보게 될 동지가 하나 늘어서 좋아?”
“……그런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하지 않겠느니라. 하지만 그대여, 이 몸이 권하는 것도 진심이니라. 허룡탑은 카라카스에 걸쳐져 있는 곳, 그대가 그곳에 머무른다면 끝도 없이 재림해서 민중을 위해서 싸우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니라.”
바라메의 제안.
사실 허룡탑에서 계속 같이 살자는 제안은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나름대로 나를 생각해서 권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알겠다.”
“그러면…….”
“이번 일을 싹 해결하고, 퇴직할 방법을 찾으면 되겠군.”
“…….”
바라메가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탐랑을 어깨에 걸치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불가능하다고? 칠죄신을 추방해 버리는 걸 누가 가능하다고 했었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만.”
“방법을 찾으면 나온다. 애당초 카라카스는 지식의 교류가 너무 적어. 각 종족들이 비전이니, 비법이니 하면서 서로 꽁꽁 감춰 두고 있으니까.”
카라카스에서는 각 종족에게만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정보들이 많았다.
때로는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치부라서.
가령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이나, 천족의 치료약 비법 같은 것들.
내가 쓰는 초능력도 본래 마녀들 사이에서만 대대로 전승되는 것이었고.
나는 딱 잘랐다.
“다 모여서 머리를 맞대면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절대적인 건 없다고 믿는다.”
“그래도 방법이 없다면? 그리한다면…….”
“미래는 됐고, 눈앞의 일부터 치우고 생각해야지. 하시아의 죽음에 너희들이 사실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이미 들었다.”
흠칫.
용공주가 깜짝 놀라서는 어깨를 움츠렸다.
1만 년의 허무를 이야기하던 여자지만, 하시아의 타락에 얽힌 일은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애들은 말은 안 해도 내가 너희들과 화해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떠냐고? 글쎄다. 심경이 복잡하고 하나로 풀어버릴 수는 없다.”
“…….”
“하지만 어려운 일도 순서를 밟아서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해 가면 결국 풀리는 법이다.”
나는 담백하게 말했다.
“허룡공주 바라메, 너는 지나치게 멀리 내다본다. 제아무리 오래 살아왔다고 한들, 결국 너 역시도 나와 함께 웃고 떠들고 울던 전우다. 순간의 찬란함이 덧없다고 애써 말하면서도, 축제와 싸움에는 누구보다도 앞서고 들뜨는 녀석 아니더냐.”
“…….”
“허무하다면 그 허무를 달랠 방법을 찾아라.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내내 잠만 자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길잖아?”
나는 씩 웃었다.
내가 산 시절을 합쳐 봐야 바라메가 보낸 시간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정말 앞으로도, 내가 재림 황제로서 살아가게 된다면.
바라메는 내 말을 흘릴 수 없었다.
“으음, 으으음.”
바라메는 긴 신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쁜 숨을 쉬었다.
“……정말 가슴이 뛰는 말만 해 주는구나. 시간의 무서움을 알면서도 굴하지 않고, 쇠락과 풍파를 알면서도 앞을 본다. 그래, 이러니 이 몸은 그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느니라.”
“하지만 그것과 승부는 별개지.”
“물론! 말이 길었지만 지켜보는 이들이 있고, 판가름해야 하는 일은 남아 있으니!”
바라메는 양손으로 창을 잡고는 나를 주시했다.
숨겨 왔던 지식으로 나를 설득하려는 시도도 끝.
그녀도 각오를 다지고는 결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면 승부, 힘과 마력은 결국 내가 부족하고 기술은 내가 앞선다.
그러면 미리 뿌려 놨던 포석을 써서…….
나는 손에 마력을 불러일으키고는 천천히 가슴에 옮겼다.
“…….”
부릅!
그걸 본 바라메도 눈을 크게 뜨고는 자세를 확 낮추었다.
내가 드래곤 하트, 초가속을 쓰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지만…….
파바박!
그 순간 나는 칠성칠요 세 자루를 비검으로 순차적으로 날려 보냈다.
“음!”
바라메는 당황하면서도 얼른 대응했다.
낮은 자세에서도 창을 휘둘러 쳐 내고, 또 뿔 앞에 돌풍을 불러낸다.
뻐어억!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그녀의 턱을 텔레포트시킨 주먹으로 후려쳤다.
용족의 육체가 단단하다지만, 마력방어를 안 하면 타격이 들어간다.
“으음!”
불안정한 자세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하여 바라메의 균형이 흔들린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남은 탐랑을 날리고는, 돌아온 거문과 녹존을 잡고 마력질주로 달려들었다.
날아드는 탐랑부터 상대하려던 바라메가 멈칫했다.
이제까지와 빠른 비검과 다르게, 일부러 느리게 날렸으니까.
“으으음!”
느리게 날아가는 비검과 빠르게 달려드는 나.
망설이던 바라메는 창을 꼬나 쥐고는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비검이 느리게 노리건 말건, 나만 잡으면 승리라는 사실, 거기에 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도류를 휘두르면서…….
드래곤 하트를 발동했다.
애당초 심장에 일부러 마력을 집어넣기만 해도 발동하는 능력, 굳이 손을 댈 필요도 없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면서 세상이 크게 느려지고.
반대로 나는 몇 배나 빨라진다!
휘이이이익!
“억!”
바라메도 눈치를 챘는지 급하게 창을 휘두르면서 물러났다.
파바바바박!
하지만 나는 양손의 검을 교차해서 순식간에 일곱 번을 베고 찌르고, 땅을 박차고는 옆으로 돌았다.
이 초가속은 무지막지하게 빠르고, 거기다가 마력질주까지 더하면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다.
푸아아악!
바라메가 돌아보려고 해도, 나는 이미 그녀의 등을 크게 베어 버린 뒤였다.
하지만 벌써 시간제한이 다 되어 가는지 코피가 터졌다.
바라메는 얼른 뒤로 물러났는데, 나는 급하게 검 두 자루를 던지고는 몸을 날렸다.
“뭐!”
연이은 비검을 피한 그녀는 용케도 나를 향해서 창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옆으로 크게 뛰어 돌아서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간 직후였다.
“큭!”
바라메는 팔꿈치를 날리려고 했지만 나는 몸을 숙여 피하면서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부우우웅.
나는 그녀를 들어 올려서는 그대로 뒤로 메다꽂았다.
콰앙!
내가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 바라메는 대응하지 못하고 쾅 바닥에 꽂혀 버렸다.
“아!”
프로레슬링이라면 카운트라도 세겠지만 아니다.
내가 드래곤 하트를 발동하기 직전, 일부러 느리게 날렸던 탐랑이 이제야 바라메의 목줄기를 노리고 떨어지고 있었다.
목이 날아가게 생긴 바라메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정작 나는 팔을 풀고는 몸을 굴려서 빼냈다.
심장에 몰린 마력을 흩어 버리고 발끝만으로 땅을 차면서 휘리릭 제비를 넘는다.
염동력 덕분에 요란하게 튀어 오른 나는 바라메의 가슴을 무릎으로 찍어 버렸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탐랑이 바라메의 목을 노리고 떨어졌다.
콰각!
뻐거어어억!
요란한 소리.
“커어억…….”
바라메는 숨 막히는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떨었다.
그녀의 목을 살짝 베고 바닥에 박혀 버린 탐랑.
칼은 어떻게든 피하기는 했지만, 대신에 내 무릎 찍기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무릎으로 가슴을 누르고 탐랑의 칼자루를 잡은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라메가 탄식했다.
“……으으음, 졌느니라.”
“좋아.”
바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나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의 부작용, 20초도 안 썼는데 머리가 쿵쿵 울리고 심장이 펄펄 뛴다.
입가에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고.
“으음.”
엉거주춤하게 선 나는 바라메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걸린다?
“……뿌, 뿔이 바닥에 꽂혀 버렸느니라.”
“…….”
내가 저먼 스플렉스를 먹이는 바람에, 바라메의 양 뿔이 타일 바닥을 뚫고 꽂혀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바라메가 비검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고.
“으음.”
뭐, 나도 지금 억지로 일어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바라메의 머리맡에 털버덕 앉은 나는 그녀를 군중들의 시선에서 가려 주었다.
그러고는 염동력을 써서 뿔 주변의 타일을 깨 주었다.
그제야 고개를 바로 한 바라메가 누운 채로 한숨을 쉬었다.
“으음, 지긴 했는데 왜 졌는지 잘 모르겠구나. 이상하군. 마력검강을 안 써서인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만.”
나는 호흡을 고르면서 알려 주었다.
“네 패인은 세 가지지. 첫째, 100년 동안 실전 경험이 없었다. 반면 나는 요즘 지겹도록 싸웠거든.”
“그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니라. 이 몸도 숱하게 싸워 봤으니까.”
“그래? 그럼 둘째, 너는 내가 드래곤 하트를 발동할 거라고 생각한 순간 빠름에만 신경이 쏠렸다. 그래서 일부러 탐랑을 느리게 깔아 뒀고.”
또 내가 초가속 상태인데도 녹존과 거문을 비검으로 날려서 바라메의 반사 신경을 흐트러트렸다.
빠른 거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느린 비검, 더더욱 느린 비검이 날아오면 혼란이 오지.
바라메가 탄식했다.
“……그렇군. 그래서 네가 초가속을 쓸 수 있다고 일부러 나에게 말해 줬군?”
“어차피 싸우게 될 거고, 보통 방법으로는 어려울 테니까.”
허룡탑에서 대화할 때부터 밑밥을 깔아 둔 거다.
나는 짚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사실 드래곤으로 싸우는 게 더 익숙하다. 전에 싸웠을 때도 결국 넌 드래곤으로 변신했잖아? 사실 넌 인간 형태가 그렇게 강하진 않단 말이지. 오히려 그건 엔라나 랑에이가 강할걸.”
“흐으음, 하긴. 이 몸도 여차하면 드래곤으로 변해서는 날뛰었으니까.”
그제야 납득의 신음을 흘린 바라메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구나.”
“대가리가 깨져도 푸르지.”
“……안 깨졌다. 아, 갈비뼈는 좀 금이 간 모양이다만.”
바라메는 픽 웃었다.
“어차피 하루 지나면 다 나아 버릴 상처다만. 참…… 뭐랄까. 세상이라는 걸 알 수가 없구나. 늘 우중충하다 싶더니만 갑자기 그대가 또 폭풍처럼 나타나서는 온갖 잡설을 치워 버리고 하나의 간명한 길만을 제시하는구나. 그게 참…… 새삼스럽게 반해 버릴 것 같다.”
“그래도 나 재림 황제 안 한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게 얼른 머리 좀 짜 봐라.”
“……아까 전에는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더냐!”
바라메가 어이없어하자 나는 코웃음만 쳤다.
“그거야 싸우는 순간이니까 멘탈 안 깨진 척한 거지. 일요일도 없고, 휴가도 없이 영원히 야근하게 될 거라는데 기뻐서 만세 삼창 하겠냐?”
“……으음, 또 속았다. 속았구나. 너무 멋지게 말해서 순간 또 반해 버렸거늘.”
“마음도 사양할 테니까 얼른 특급 마력약이나 내놓으세요.”
나는 6계위에 오른 지 제법 오래되었다.
물론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6계위나 찍고도 부족하다면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앞으로 치러야 할 싸움, 전쟁을 생각하면 7계위로 얼른 가고 싶었다.
한데 바라메의 어투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으음, 그거 말인데…….”
“뭐 문제라도 있냐?”
그때 군중들을 헤치고 사람들이 다가왔다.
중앙경찰들.
거기다가 헌병도 다수 섞여 있었다.
제국 광장에서 나와 바라메가 싸운다는 걸 알고는 출동한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저어서 다가오지 말라고 하고는 내 발로 일어났다.
얼른 봐도 천여 명을 넘긴 군중들을 쓱 돌아본 나는 누워 있는 바라메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라메도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아…….”
“2대 황제 후보가 이겼다!”
“우아아아아!”
나란히 선 우리 두 사람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내가 승리하고, 바라메가 승복한 광경에 환호하는 거다.
뭐 이런 정치적인 수습은 해 두면 편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바라메의 손을 잡고는 군중들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바라메 역시도 갈비뼈가 나간 주제에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여간 이런 화려한 무대는 엄청 좋아하는 여자다.
내가 바라보는데 바라메는 군중들을 향해 웃는 채로 내게 말했다.
“특급 마력약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뭔데? 먹으면 죽냐?”
“……음, 비슷하지만 좀 다르지.”
“뭐?”
“열반에 도달한다.”
야, 그것도 죽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