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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61화 (160/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1)

환생의 진실

내 승낙.

“좋다, 오랜만에 신명이 나는구나!”

바라메는 무릎을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서는 발걸음.

나도 따라서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100년 전과는 통로의 구조가 다르다.

그때는 모래시계처럼, 좌우의 폭이 좁았는데 지금은 농구 코트처럼 넓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변한 거다.

허룡탑은 불안정한 공간이다.

마치 해변처럼, 다른 차원의 정보가 썰물처럼 밀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나선계단을 내려간 바라메가 문고리를 잡자 나는 서둘러 말했다.

“잠깐, 너 옷부터 입어라.”

바라메는 여전히 속옷 위에다가 슬립 하나만 걸친 채였다.

바라메는 눈웃음을 쳤다.

“후후후, 이 몸의 아름다운 몸에 홀려서 차마 주먹을 뻗지 못할까 봐 두려우냐?”

“아니, 보나 마나 그 문,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잖아? 사람들 다 본다.”

바라메는 평소에 축 늘어져 있고, 허무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판이 벌어지면 화려한 걸 좋아한다.

과거에 나와 싸워서 결판을 낼 때에도 제국군이 다 지켜보는 한복판에서 했고.

하지만 바라메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눈을 흘겼다.

“후후, 그래. 이 몸의 속살을 함부로 내비치기 싫다는 거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이 반려로 생각하는 건 오로지 그대뿐, 다른 것들은 눈에 차지도 않음이니.”

“아니, 그냥 애 엄마가 주책이라는 건데.”

“…….”

내 말에 바라메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손을 휘둘렀다.

단숨에 복장이 바뀐다.

가슴과 다리를 드러낸 비늘갑옷, 손에는 창을 잡은 바라메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이 몸과 그대의 투쟁을 시작하겠다. 규칙은 전처럼 일대일, 한쪽이 졌다고 말할 때까지 싸우는 것, 그게 전부니라.”

“알았다.”

끼이이익.

바라메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따라서 나가자……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하늘.

여기저기 오가는 행인들.

“……야.”

어딘지 알았다.

황도의 중심가.

그것도 제국 광장이었다.

나, 시릭 카라카스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진 곳이고 인파들이 항상 오가는 곳이다.

“……누구야, 저거?”

“용족이다.”

“용족?”

“자, 잠깐. 저거 설마…….”

엘프, 다크엘프들이 내 옆에 선 바라메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자 바라메는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행인들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허무하다 어쩌다 하던 여자가 팬 서비스는 잘하시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너무 두근거리거든. 그래, 오랜만에 축제다.”

바라메는 활짝 웃었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이런 순간의 단락이 너무나 즐거워지지. 하지만 이게 끝났을 때의 상실감은 배가되어서 돌아온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벗이 사라지고, 꿈을 토로하던 가족이 사라지고, 사랑했던 남자도 사라진다.”

“…….”

“한데 시릭, 이렇게 네가 다시 돌아와서 나와 함께 어울려 칼의 춤을 추겠다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바라메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행인들이 더 멈춰 서서는 숙덕거렸다.

인파가 순식간에 수십 명이 되자 바라메는 부드럽게 나를 돌아보았다.

“시릭, 엘프와 다크엘프, 인간과 수인이 하나가 되어서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이게 바로 네가 만든 세상,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도다.”

“그럼 그냥 순순하게 나를 따라오시지?”

“아니, 말했지만 이 몸은 이 찬란함을 사랑하면서도, 머지않아 사그라들 것을 안다. 이 몸은 몇 번, 아니, 수십 번이나 겪은 일이니라.”

바라메는 내 귓가에 속삭이는가 싶더니만, 가볍게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지켜보던 군중들이 놀라서 소리를 친다.

바라메는 마치 팬 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드러우면서도 애정을 담고 있었다.

“이 찰나에 집착하는 영혼들이 못내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너희들과 어울리고 있다 보면 지쳐 버린다. 그래, 이 몸은 이제 힘들고 지쳤느니라.”

“야, 누가 아니래? 나야말로 지쳤어요. 나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이 몸과 같이 허룡탑에서 세월을 보내자꾸나. 세상의 덧없는 일을 멀리하고 우리 둘이서만 한 쌍의 원앙처럼 지저귀면서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면 그만 아니겠느냐?”

바라메가 말했다.

“칠죄신이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또 제국이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흥망성쇠는 다 순간의 단락일 따름, 그걸 막고자 그대가 영혼을 다치면서까지 노력을 다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야 내 가족이 여기 살고, 내가 이룩한 게 이 땅에 있으니까.”

원론적인 대답.

하지만 이게 인간의 정답이다.

동시에 이 대답은 1만 년이 넘게 살았다는 바라메에게는 대답이 못 된다.

바라메는 웃으면서 창을 들었다.

“예전과 같은 대답, 변치 않았구나. 그래서 이 몸은 여전히 그대에게 반해 있느니라. 부디…… 이번에도 이 몸의 시련을 넘어 보아라!”

쿠웅!

바라메가 발을 구르는 순간, 땅이 흔들리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

바라메를 알아보거나, 몰라도 용족이라는 게 신기하고 그 미모에 반해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 뭔지 알면서도, 설마 그럴까 하고.

“설마…….”

“여, 여기는 제국 광장인데?”

원래 제국은 무를 숭상하는 국가, 무장은 특별히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국 광장은 내가 명령해서 직접 동상을 세운 곳, 제국민들도 여기서 무기를 휘두르고 싸우는 걸 각별히 삼가 왔다.

황제 폐하가 내려다보시는 곳, 설사 시비가 붙어도 다른 곳에 가서 해결하는 게 맞다고.

“……그래, 뭐.”

바라메가 원래 화려한 싸움을 좋아하는 여자기도 하지만, 굳이 이곳을 고른 건 그런 이유도 있으리라.

내가 검을 들자 다들 숨을 삼켰다.

“자, 잠깐. 저 남자는 리젠 리브라타다.”

“뭐? 2대 황제 후보라고?”

“2대 황제 후보랑 용공주가 싸워!”

뒤늦게 알아본 이들 때문에 군중들이 더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제국 광장을 경비하는 경찰들도 있었지만 얼른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외려 바라메가 경찰에게 창을 겨누고는 말했다.

“나는 제국의 7황후, 허룡공주 바라메다. 지금부터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잠시 이 터를 빌리니 제국의 치안을 지키는 이들은 일반 시민들이 함부로 휘말리는 일이 없게 잘 조율하기 바란다.”

“…….”

말도 안 되는 억지.

하지만 완벽한 미모의 여자가 당당하게 단언하는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제국 경찰들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버릴 정도로.

경찰들이 얼른 군중들을 뒤로 밀고, 연락을 하고 소란을 피우는데…… 바라메는 나를 바라보며 자세를 낮추고 창을 겨누었다.

나 역시도 탐랑과 거문을 띄우고는 녹존을 손으로 잡았다.

시선의 교환.

그리고 우리는 서로 바로 달려들었다.

바라메는 긴 창, 나는 칼이니 간격에서 당연히 불리하다.

하지만 애당초 비검을 팍팍 날리고 염동력으로 자유자재로 운신하는 나에게 무기의 유불리란 있을 수 없다.

서로 잘 아는 사실!

파악!

탐랑이 먼저 날아가면서 바라메의 목을 노린다.

하지만 그 순간 일어나는 돌풍.

바라메의 뿔이 불러낸 칼바람에 탐랑이 텅하니 튕겨 버렸다.

“흡!”

예상한 나는 그 직후에, 거문과 녹존을 양손으로 잡고 공격했다.

챙!

바라메가 휘두른 창을 일단 막고, 안으로 파고든다.

언뜻 무모한 전술, 하지만 바라메도 내가 언제 비검으로 응수할지 모르기에 간격만 믿고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

바라메는 물러나지 않고 대뜸 마력을 담은 발길로 나를 걷어찼다.

마력검과 육체의 충돌.

채앵!

하지만 쇳소리만 났다.

바라메는 용족, 그것도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었던 선택받은 이다.

비록 드래곤 변신은 이제 못 쓴다고 한들, 그 육체의 강도가 남다르다.

“흠!”

나를 밀어낸 바라메는 창대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나는 슬쩍 뛰어올라 피하면서 지상의 바라메를 향해서 녹존을 내던졌다.

이어서 비행.

단숨에 안쪽으로 파고든다!

“오오!”

바라메는 탄성을 지르면서…… 외려 나를 향해서 뛰어올랐다.

피해 봐야 내 검과 비행으로 따라붙을 걸 아니 오히려 돌격해 오는 것이다.

윙윙윙!

외려 덤벼드는 바라메의 뿔 앞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사람을 가볍게 찢어발기는 돌풍!

또 녹존이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예상하고는 그냥 거문을 꽉 잡고 충돌했다.

뻑! 파아악!

뼈가 울리는 소리들.

서로 공중에서 맞붙어서 합을 주고받았던 우리 두 사람은 몸을 뒤집어서 착지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달라붙어서 검을 찌르고, 창을 휘두른다.

서로 춤을 추듯이, 정신없이 손을 섞고 몸을 움직인다.

쾅! 콰앙!

압도적인 힘의 공방, 우리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광장 바닥 타일에 쩌저적 금이 간다.

치고받는 공격. 튀어 오르는 핏줄기.

밀려난 건 내 쪽이었다.

“으음.”

그리고 아쉬워하는 건 바라메였다.

한참 흥이 오른 그녀는 갸웃거리면서 나를 보았다.

“뭘 숨기고 있지, 시릭? 정면 대결로는 이 몸을 못 이긴다는 거야 알지 않나?”

“어차피 사람 불러 모은 거, 분위기 좀 탄 거지.”

이미 황도의 시민들은 널찍이 물러나서는 정신없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바라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이 몸을 이길 자신이 있는가? 아니, 이겨서 이 몸을 끌어들이고 설사 칠죄신을 물리치더라도 끝이 아니니라. 그대에게 안식은 없고, 영원토록 싸움의 굴레에 매여 살 테니.”

“뭐?”

“저들의 시선을 보라. 저들이 누구를 응원하는지 보라.”

바라메가 가리키는 이들.

제국의 시민들은 열띤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라는 걸 알아보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2대 황제 후보다.”

“초대 황제 폐하의 환생이라면서? 그런데 왜 황후와 싸우는 거지?”

“인정할 수 없다, 뭐 그런 거겠지.”

“옛날에 초대 황제 폐하도 7황후를 칼로 꺾고 부인으로 삼았잖아. 그거 아닌가?”

다들 보는 앞에서 바라메와 싸우는 이유도, 얼추 알아서 짐작하는 모양새다.

나는 다시 바라메를 돌아보았다.

“저게 왜?”

“……시대가 원하면 황제는 되살아나느니라.”

묘한 소리.

하지만 흘려듣기 뭐하다.

용족은 차원과 영혼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식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바라메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그대가 칠죄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 시국에 환생하는 건 우연이 겹친 일이 아니니라.”

“뭐? 그럼 뭔데?”

바라메는 저어하며 말했다.

“다들 그대가 급사한 원인을 몰랐지만 이 몸은 알고 있었느니라. 그대가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을 엿보고 탐하려고 했기 때문이겠지. 그건 금기 중의 금기, 하지만 그대도 설마 죽음까지 이르리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

그야 그렇지.

나는 제국 최강, 신까지 추방했다.

물론 차원 이동이라는 게 위험하다는 소리는 숱하게 들었지만.

거기에 손 좀 댔다고 죽을 거라고는…….

바라메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보통 죽지는 않지만 그대는 다르다. 그대의 영혼이 이 카라카스에 꽉 묶여서 고정되는 바람에 부작용이 컸던 것이니라.”

“뭐?”

“……그대는 이 카라카스에 떠도는 혼, 그리고 세상이 위기에 처하면 부활하는 존재이니라.”

“야, 내가 무슨 예수그리스도냐? 말세가 오면 재림하게…….”

농담인가 싶었지만 바라메는 숙연했다.

나는 멈칫하고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시릭으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돼서 온갖 일들이 벌어졌다.

크로셀 후작부터 시작해서 제국 철도 테러, 계속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음모들.

“나는 그게 엔라의 설계거나 아니면 그냥 우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필연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졌기에 그대가 깨어난 것이지.”

“…….”

나는 다시 사방을 돌아보았다.

주먹을 꽉 쥐고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인간과 엘프, 그리고 다른 이종족들을.

나의 승리를 기대하는 이들.

“……진짜냐? 내가 재림 황제가 되어 버렸다고?”

“신을 추방한 자가 그 위계에 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더냐. 시대가 영웅을 부르는 법이니라.”

바라메가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카라카스가 어지러워질 때마다 환생을 거듭하며 싸우게 될 것이니라.”

끝도 없는 추가 근무.

세상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재림하는 황제라니.

……제발 은퇴 좀 시켜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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