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60)
승자가 옳다
허룡탑.
카라카스에 있으면서도 다른 차원과 일부분이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탑의 주인, 관리자인 허룡공주 바라메는 다른 차원에서 정보와 물품을 받아들이고.
지금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는데 그 이상의 움직임이 없다.
혹시나 해서 캐노피를 걷어 보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
피처럼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 솟아 있는 두 개의 뿔.
허리에는 굵은 꼬리.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의 미인이지만.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미녀고 뭐고 없다.
“아, 일어나라니까.”
내가 만화책을 흔들어서 바라메의 얼굴에 바람을 일으키는데…….
파바박!
바라메의 뿔에서 칼바람이 일어나더니만 만화책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순간 반사적으로 마력방어에 염동결계까지 켰으니 망정이지, 좀만 늦었다면 내 팔도 걸레짝이 됐을 거다.
졸고 있어도 이 여자는 최강의 종족, 용족의 대표다.
바라메는 잠에 취해서 말했다.
“……정말 귀찮게 구는구나. 침대는 넓으니 어서 그대도 옆에 눕기나 하거라.”
“지금 네가 뿔로 만화책 찢었는데.”
“뭐라!”
다시 침대로 엎어지려던 바라메는 눈을 번쩍 떴다.
걸레가 된 만화책을 보고는 기겁한다.
“이거 슈퍼맨 데뷔작인데! 크리스토퍼 리브의 서명까지 있던 보물인데! 인류의 역사에 남을 귀중한 물건이!”
“그걸 네가 찢었네. 이 문화대혁명아.”
“그대가 갑자기 찾아와서 깨우는 바람에 벌어진 사고 아니더냐!”
바라메는 침대에 OTL 자세로 울부짖었다.
새삼스럽지만 브래지어만 팬티만 입은 차림이다.
어떤 피팅 모델도 옆에 서기를 거부할 정도로 풍만하면서도 잘록한 몸매, 하지만 아무리 겉이 완벽해 봐야…….
“카아아아악! 어째서, 대체 어째서 이 몸에게 이런 시련이! 천지신명도 무심하시구나!”
속은 이렇지.
나는 혀를 차고 말했다.
“깨울 때 바로 일어났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네 잘못이네.”
“…….”
번뜩!
바라메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시릭 카라카스! 네놈이 100년 만에 재회해서 하는 짓이라는 게 이 몸의 소중한 보물을 찢어 먹기냐~!”
“판타지에 나오는 드래곤은 금은보화를 자기 레어에 쌓아 둔다는데, 너는 만화책을 쌓아 두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바라메는 앞뒤 설명도 없이 나를 바로 알아봤지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바라메는 차원과 영혼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
그녀는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그 안의 영혼을 꿰뚫어 본다고 하고.
바라메는 한스럽게 외쳤다.
“풍부한 이야기야말로 세상의 귀한 보물 아니더냐. 아니, 근데 대관절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게냐? 이 허룡탑은 이 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텐데?”
“그러게다. 나도 사실 별로 올 마음은 안 들었는데.”
“……이 몸이 자는 모습을 훔쳐보았으면 좀 더 달콤한 단어로 수식해야지. 그대는 새로이 태어나도 변한 게 없구나.”
바라메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갈가리 찢어진 만화책을 보다가 고개를 가로젓더니만…….
휙.
공중에 던지고는 가볍게 손을 그었다.
파바바박!
칼바람이 일어나면서 걸레가 되었던 만화책이 아예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찢겨져 버렸다.
“못 쓰게 됐으니 필요 없느니라.”
“소중한 거 아니었냐?”
“찢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라메는 일어나면서 가벼운 슬립 하나만 걸쳤다.
그녀는 만화책을 밟고 걸으면서 말했다.
“따라오너라. 서방이 집에 왔으니 마땅히 대접을 해야지.”
침실 옆의 응접실.
식탁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의자는 두 개.
바라메는 찬장, 이어서 냉장고를 열어 보고는 말했다.
“아, 미안하구나. 차도, 과자도 다 떨어졌구나. 있는 거라고는 물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괜찮겠느냐?”
“됐고. 앉아라.”
바라메는 내 앞에 물을 내려놓고는 마주 앉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엔라의 꿍꿍이,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으음, 마족과의 4차 회전? 그때 엔라가 우회기동 하는 거야…….”
“그거 말고. 지금 엔라가 서부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양 무릎을 가슴에 모으고 턱을 괸 바라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칠죄신의 무리들과 합류해서 반란 일으키는 거? 그럴 것 같기는 했다만.”
“……사전에 막을 생각은 안 들디?”
“그러면 이 몸이 당장 날아가서 서부군을 싹 다 찢어발기고 엔라의 목을 날려 버리면 되느냐? 그게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몸도 안다만.”
바라메는 투덜거렸다.
“100년 만에 봐서 감이 무뎌졌느냐? 이 몸은 다른 황후들, 아니 다른 생물들하고는 삶을 보는 관점이 너무나 다르니라.”
“너무 다르지, 만 년 묵은 구렁이 씨.”
“오랜만에 만나 놓고 너무 입이 험하구나. 반려를 구렁이라고 깔보는 건 네놈의 격까지 낮추는 일이니 삼가라.”
바라메는 20대 미녀로 보이지만 1만 년이 넘게 살았다.
용족, 그중에서도 드래곤, 그 드래곤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반만년이라 말하는 한국의 역사, 그 2배 이상을 살아온 존재.
시간과 세상을 보는 감각이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
“좋아, 만 년 묵은 드래곤아. 이제 상황 마무리 단계니까 거들어라. 칠죄신이 돌아오려는 걸 막고, 그다음에…….”
“싫구나. 의욕이 없느니라.”
바라메는 뺨을 테이블에 붙이고는 눈만 치켜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릭 카라카스, 그대의 꾐에 넘어가서 이 몸도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 보려고 했느니라. 그대와 함께 싸우고, 가족을 이루고 살던 것도 즐거웠느니라. 그래, 꿈처럼 즐거웠던 20년이었지.”
“…….”
“하지만 아무리 즐거운 잔치도 끝은 있는 법이니라. 그리고 이제 다 끝났도다.”
“아직 안 끝났어. 하시아가 살아 있다.”
“……그건 좀 놀랍구나.”
바라메는 테이블에 뺨을 문질렀다.
“아, 그런가. 그래서 엔라가 이 몸에게 도와 달라고 했던 거였구나.”
“구체적으로 뭐라고 했는데?”
“인간 귀족 중에서 특별한 그릇이 이어지는 태생을 알려 달라고 했노라. 왜 그러나 싶었지만 이 몸도 할 일이 없으니까 협조했느니라.”
인간 중에서 남다른 그릇이 태어나는 12가문.
바라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는 김에 용족의 피도 좀 이식했고.”
“내 몸에 이런 거 달린 게 역시 너 때문이었냐.”
“잘 돌아가더냐? 인간에게 드래곤 하트가 유전적으로 발현하게 만드는 건 상당히 어려웠느니라.”
바라메는 차 튜닝 좀 했단 투로 말했다.
나는 혀를 찼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더군. 초가속 능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죽을 뻔했다.”
“아, 드래곤 하트의 성능은 다들 차이가 있다만, 그대는 초가속이었나? 위험하다 싶으면 심장에 마력 공급을 끊어라. 그러면 죽지는 않을 거다.”
바라메는 고개를 들고는 빙긋 웃었다.
“아, 오랜만에 그대와 이야기하다 보니 잠도 깨고 즐거워지는구나. 20년 만에 상쾌한 기분이니라.”
“그래도 나와 제국에 협력할 생각은 없다고?”
“없다. 이 몸이 그대의 반려가 될 때부터 말하지 않았더냐?”
바라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칠죄신을 추방해 버리면 우리 용족들은 더는 드래곤으로 변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그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그대에게 협력했던 것. 하지만 그 이후는 없다고 했느니라.”
“너희들에게 드래곤 변신이 소중한 건 안다.”
성인이 된 용족, 그중에서 선택받은 이들은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내가 한 일은, 새가 스스로 날개를 꺾고 날지 말라는 요구였지. 그걸 알면서도 협조한 용족들에게는 각별히 감사하고 있다.”
“우리 용족들은 제국을 위해서 정말 아낌없이 헌신했느니라. 그런데 또 한 번 해 달라는 건 염치없는 요구 아니더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족이 협력해 주면 좋지만, 그게 어렵다면 너만이라도 와라. 와서 자리나 채우고 앉으라고, 바라메.”
“싫다. 이젠 귀찮고,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이니라.”
“…….”
보통 사람이 귀찮다고 하면 이득과 이치로 설득하면 된다.
하지만 만 년을 살았다는 드래곤이 말하면 무게가 다르다.
바라메는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이 몸은 1세기 전에 네 설득에 매료되었느니라. 칠죄신이 없는 세상을 말하는 너는 빛나고 있었지. 꿈을 꾸는 순수한 소년이자 아름다운 청년의 빛. 그 영혼에 이 몸은 끌렸고 사랑에 빠졌지. 지금도 애타게 사랑하고 있느니라.”
“…….”
“하시아의 타락은 안타까운 일이니라. 이 몸도 변명할 생각은 없도다. 그 한을 풀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면 마땅히 목을 내밀겠지만…… 돕는 건 별개의 일이니라.”
바라메는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쏘아보았다.
“시릭 카라카스. 그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열정의 결정체였느니라. 하지만 그 결과물은 어떻지? 고작 10년 만에 행복한 가정은 끝났고, 100년 만에 나라는 휘청거리고 있노라.”
바라메는 끓어오르는 투로 말했다.
“속은 기분이다. 아주 속은 기분이니라.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혹시나 싶어서 그대에게 몸을 맡기고 사랑했는데도…… 결국 남은 건 허무한 결말이었느니라.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구나.”
“…….”
“그래, 너를 따라갔지만 결국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느니라.”
나는 턱을 괴고는 혀를 찼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네가 애착이 없어서다. 오래 산 너는 너무 쉽게 저버려. 아까 찢어 버린 만화책처럼, 조금의 흠결도 참지 못하고 그냥 외면해 버리지.”
“…….”
“어차피 말로 계속해 봐야 풀릴 문제도 아니다. 그냥 싸워서 결론 내자.”
싸움, 그 단어에 바라메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큰둥한 얼굴에서 확 분위기가 달라지고 위압적이고 도전적인 얼굴이 된다.
싸움과 투쟁.
만 년의 허무를 말하는 드래곤도 이 단어에는 다시금 피가 끓어오르니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몸을 풀 상대도 없어서 심심했지? 내가 상대해 주마. 내가 이기면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 해라.”
“……서방이라고 봐줄 줄 알면 착각이니라. 지금이라도 입을 다물면 못 들은 걸로 해 주겠느니라.”
“좋아서 입 찢어지셨으면 뭘.”
바라메는 서둘러 입을 가렸지만, 푸른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없이 늘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좋다. 하지만 조건이 고작 그 정도여서는 서로 투쟁심이 부족하지. 만약 그대가 이 몸을 꺾는다면 특급 마력약을 제공하겠다.”
마력약을 먹으면 마력이 늘어난다.
하지만 보통 마력이 없는 이들이 각성하려고 쓰는 게 일반적이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마력약의 효과는 떨어지고.
지금의 나에게는 1급 마력약도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특급 마력약은 다르다.
복용 순간 바로 1계위가 올라간다는 물건, 황제였던 나도 구경 못 했다.
“지금 6계위인 내가 마시면 바로 7계위가 되겠군.”
“그래, 아주 들뜨지 않느냐?”
나는 마주 웃으면서 바라메를 보았다.
“내가 질 경우에 조건을 빡세게 걸겠단 소리군. 뭐냐?”
“허룡탑에서 이 몸과 같이 천 년의 세월을 지내야 한다. 바깥 일이 어떻게 돌아가건, 일절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느니라.”
“…….”
즉, 지면 세상사를 외면하고 여기서 평생을 살라는 거군.
위험한 도박이다.
나는 전성기 시절에도 바라메를 꺾느라고 고생했으니까.
하지만 바라메는 정치적 무게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차원과 영혼에 대한 남다른 지식이 있었다.
앞으로의 일, 하시아를 되돌리고 칠죄신을 보다 확실하게 끝장내려면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다른 설득 방법은 없냐고?
황제 시절에도 바라메와 용족들을 제국군에 끌어들일 때도 이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서 좋군.”
아무리 어려워도 이겨 버리면 다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