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9)
가족의 약속
대전제는 세웠고.
이제부터는 각자에게 일을 맡겨서 돌린다.
짝!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전환한 내가 지시했다.
“랑에이는 치안 담당, 특히 술집이나 시장통에서 민심의 동향이 어떤지 살펴라. 메이호, 네 어머니를 좀 도와 드려.”
“제가요?”
메이호가 당황하는데 내가 눈치를 주었다.
“너, 오래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서 눈치가 빠르잖아. 랑에이는 주변머리가 부족하니 네가 좀 커버해라.”
“알, 알았어요.”
“지금부터 당장 준비해. 빠를수록 좋다.”
내가 채근하자 메이호는 눈을 곱게 흘겼다.
내가 정말로 그 이유만으로 랑에이와 붙여 둔 게 아니라는 걸 안 것이다.
황후들이 사정을 밝힌 순간, 메이호의 얼굴도 많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풀어지는 것도 어색하고.
그러니 랑에이와 따로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아빠, 고마워요.”
메이호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랑에이를 향해 다가갔다.
렌시엘은 일어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저는 황성의 내부를 정비하고, 출정식 행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그런 걸 잘 모르니까 부탁한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사실 나는 귀찮아서 예의범절을 안 지키는 경우가 많다.
황제인 내가 안 지킨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하지만 의식, 예법이 때로는 중요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나비린은…….”
“예, 귀를 열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나비린이 빙긋 웃자 나는 혀를 찼다.
“괜한 사고 치지 말고.”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답니다.”
“귀족들 좀 두들겨라. 특히 서부에 기반을 갖고 있는 귀족들이 꽤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로데릭 형님하고 알리시아가 이미 하고 있지만 너도 힘을 실어 줘. 아, 다시 말하지만 괜한 사고 치지 마라.”
“……폐하는 절 대체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똑똑한 척하지만 툭 찌르면 튀어 오르는 용수철.”
나는 이어서 세탄을 돌아보았다.
“세탄, 너는 중앙군의 상황을 면밀히 둘러봐라. 아무리 레릭이 다잡는다고 하더라도 내전은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거다.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닐 테니까. 주의 깊게 살피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라. 단, 사전에 레릭의 허가를 받고.”
“예, 해 보겠습니다.”
출정 준비를 마친 나는 유하를 돌아보았다.
“유하, 파군의 조각을 가져왔다. 수복을 부탁한다.”
“……예, 하지만 이번에는 좀 시간이 걸릴 거예요. 검을 복원하는 건 뒤로 갈수록 작업이 어려워져서요.”
“알겠다. 그리고 카미르 님, 긴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카미르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칠죄신을 보다 완벽하게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그건…….”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나는 칠성칠요를 써서 추방한다는 방식을 써야 했죠. 하지만 녀석은 결국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각 종족마다 비밀스러운 지식,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거기서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테니, 칠죄신에 대한 정보를 보다 많이 가져와 주셨으면 합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다들 일어나서 부산하게 움직인다.
가족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
나는 깍지를 끼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흩어졌던 가족이 하나의 목표를 갖고 하나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7황후 용공주다.
출정식에는 용공주도 있어 주는 게 낫다.
“아니, 용족의 힘이 필요해.”
용족.
인간과 일곱 이종족 중에서 가장 숫자가 적은 이들이다.
그들이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힘을 빌려줄 때, 하나 약조를 했다.
용족들은 이후에 제국의 정치와 군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물론 그들 역시도 제국민, 마력약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플레이였다.
“출정식에 맞추려면…… 결국 허룡탑을 다녀와야 하나.”
용공주의 거처, 허룡탑(虛龍塔).
제국의 북동부에 있어서 오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거기다가 그녀가 허락한 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시릭이던 시절, 용족의 도움을 구하고자 갔을 때도 그녀가 내린 시련을 돌파해야 했고.
“그런 거 좋아하는 여자니까. 그런데 시간이 없는데…….”
아예 용공주를 쏙 빼놓고 진행할까?
하지만 최악의 경우, 칠죄신과 다시 싸우게 된다면 용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결국 시간이 들더라도 용공주를 설득하는 게 나은데.
고민하는데 리세라가 다가와서는 내 옆에 앉았다.
“아버지, 무슨 고민 하세요?”
“으응, 아니다.”
“혹시 일곱 번째 어머니를 만나러 가시려고요?”
내가 놀란 얼굴이자 리세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머니들을 모시고 문무백관과 만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출정을 선언할 거라면, 7황후 전하도 있어 주시는 게 훨씬 더 나으니까요. 엔라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분들이 동의했다는 그림이라면 군사적 피해도 줄어들 테고요.”
“그렇지. 문제는 찾아가는 데 시간이 걸리고 가도 만나 줄지가 문제다. 자고 있으면 문 안 열어 주는 여자라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지만 경우가 좀 달라서. 그래도 가 봐야겠는데…….”
“그럼 이건 어떠세요?”
리세라가 손에 든 봉투를 꺼내서는 내게 들어 보였다.
봉인된 인장, 하품하는 드래곤이 찍혀 있었다.
7황후의 인장.
하지만 거의 쓰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의아해하는데 리세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에 받아 낸 거예요. 7황후 전하께서 황도를 떠나려고 하시기에, 다시는 못 볼 것 같아서 억지를 부렸거든요.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까 난감해하시다가 주셨어요. 이게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고요.”
“그러면…….”
“예, 카미르 님에게 확인해 봤어요. 이걸 쓰면 허룡탑의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고맙…….”
삭.
리세라는 내 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봉투를 가져갔다.
……나 주려던 거 아니었니?
내가 얼빠져서 보자 리세라는 봉투로 입가를 가리고는 어깨를 떨었다.
장난치는 거다.
다시 손을 뻗어도 리세라는 등 뒤로 숨겨 버렸다.
“드리는 대신에 어려운 부탁 하나만 할게요.”
“그냥 말하렴. 아빠가 딸의 말을 못 들어주겠니?”
리세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번처럼, 가족 모두 다 같이 자고 싶어요.”
“아, 그거야 뭐…….”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자식들과 응접실에 이불 깔고 자는 거, 너무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리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들도 끼워서요.”
“……으음.”
나는 머리를 멋쩍게 긁었다.
아내와 오해도 풀렸고, 감정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10년 동안 얼굴을 안 본 사이고, 아내들의 입장에서는 100년 동안 자책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서로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법이다.
“세라야, 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지만…….”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세탄 오빠랑 메이호 언니하고도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눴어요. 다들 찬성하고 있어요. 단, 메이호 언니는 아빠가 내키지 않으면 안 한다고 하시지만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거절 못 하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리세라가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이혼한 부부가 서로 다시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아이처럼.
“우리들이 어머니하고도 잘 이야기하고,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볼게요.”
“으음, 그래.”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다. 다들 더 털어놓을 자리는 필요하니까. 내가 용공주를 데리고 돌아와서 자리를 마련하기로 하자.”
앞으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는 데 황후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능력들이 뛰어나니까.
큰일에 임하기 전에 서로 단결을 다지는 회식 자리다.
리세라가 활짝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허락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아니, 나야말로 너희들에게 곤란한 일 맡겨서 미안하다. 잘 부탁한다.”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는 아버지를 잊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리세라는 빙긋 웃으면서 내게 편지 봉투를 건넸다.
“그거 뜯으면 바로 이동하게 된다고 했어요. 조심하세요.”
“알겠다.”
“그럼 저는 애들하고 의논하고 올게요. 떠나기 전에 다른 분들에게 인사하고 떠나세요.”
허룡탑으로의 이동 수단은 확보했다.
카미르에게 다시 확인을 거친 나는 따로 랑에이를 불러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자 랑에이가 다가왔다.
“시릭.”
“난 이제부터 허룡탑에 다녀온다. 혹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다른 황후들하고 의논해서 처리해라.”
“……용공주를 설득하려고? 위험하지 않을까?”
“그야 뭐.”
리세라야 잘 모르겠지만 용공주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턱을 긁으면서 말했다.
“싸우면 싸우는 거지. 복잡할 거 없다. 너나 다른 애들 데리고 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시련 말이군.”
“그 여자는 그런 걸 너무 좋아해.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나는 투덜거렸다.
랑에이가 갑자기 어깨를 떨면서 웃어 버렸다.
내가 의아하게 보자 랑에이는 얼른 표정을 고쳤지만 그래도 미소는 여전했다.
“……아니, 그냥 네가 너무 옛날처럼 말해서.”
“렌시엘은 체통이 없다고 잔소리를 했지. 나비린은 속 보이는 아양을 떨면서 내 편을 들어 주고.”
“그러면 이셀렌이 새로 보고할 게 있다는 핑계로 너를 데려가고, 뒤이어서 엔라가 군사회의라는 명목으로 널 붙잡았지. 그러면 렌시엘하고 나비린이 같이 편을 먹었고.”
옛날이야기를 하는 나도, 랑에이도 웃고 있었다.
그때.
칠죄신과의 전쟁은 정말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전우들이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아내들이 있었으니까.
랑에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도, 그때가 정말로 행복했다. 너를 따르기를, 너를 사랑하기를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하시아가 나타나면 네 시선이 그쪽으로만 향하는 걸 옆에서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
“내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다. 내가 그때 좀 더 강했으면, 정신을 차렸다면…….”
랑에이가 토로하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일이고 우리는 그걸 되돌릴 수 있다. 용공주를 찾아가는 것도 그 일환이고.”
“……응.”
와락.
랑에이는 나를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긴 포옹.
한참 뒤에 내가 조심스럽게 등을 안아 주려는 찰나에, 랑에이는 손을 풀고 물러났다.
“그럼 조심히 다녀와라. 꼭 그 녀석을 데려와야 한다.”
“안 오면 엉덩이라도 때려서 끌고 오마.”
나는 애매하게 붕 떠 버린 손을 흔들며 웃었다.
랑에이가 그 손을 갸웃거리면서 보는데…… 나는 봉투를 뜯었다.
파앗!
귀가 먹먹해지는 감각.
눈을 깜빡거린 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이동한 거 맞나?”
바닥에 깔린 건 책.
몇몇은 지구에서 나도 봤던 만화책이다.
“제대로 온 게 맞군.”
그리고 바닥에 어지럽게 깔린 책들 사이에 놓인 침대 하나.
그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
아름다운 발뒤꿈치부터 이어지는 종아리, 엉덩이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
반투명한 캐노피에 가려서 다리만 보이는데도 사람을 멈춰 버리게 만든다.
가느다란 숨소리.
아름다운 여신이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보통 남자라면 멈추거나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다가가겠지.
하지만 나는 둘 다 아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만화책을 잡아 들었다.
“자냐? 지금 잠이 와?”
나는 만화책을 여자에게 던져 버렸다.
제대로 안 보이지만 머리가 있음 직한 쪽으로.
염동력까지 동원해서 모서리로 찍기!
딱!
“으으응.”
귀찮아하는 몸짓.
팔을 대충 휘두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라, 자.”
나는 염동력으로 만화책 열댓 권을 여자에게 파바박 던져 버렸다.
팍!
그러자 잠들어 있던 여자가, 허리에 달린 꼬리를 휘둘러서는 싹 쳐 내 버렸다.
“……아, 저리 가거라. 졸리느니라.”
“일어나, 이것아.”
“…….”
대답이 없네?
또 주무셔?
나는 만화책을 양손으로 잡고는 웃었다.
“아, 이거 초판이네? 하지만 난 안 보는 만화니까 찢어 버려야지.”
벌떡!
침대에서 자던 여자가 불에 덴 듯이 일어났다.
참 깨우는 데 손이 많이 간다.
제국의 7황후.
허룡공주(虛龍公主) 바라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