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8)
Royal road
다들 놀란 얼굴.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당시 구원군 편성을 1만이라고 했나? 랑에이가 선봉에 엔라가 주장(主將)이었고, 최종 결전에서 피해가 컸지만 찾아보면 당시 구원군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있겠지. 이종족이라면 아직 살아 있을 테고.”
“…….”
“병사들이야 병력 이동의 목적까지는 몰랐어도, 돌아가는 제반 사정은 알았을 거야. 즉, 당시 부대원을 만나서 확인하면 너희들의 주장이 옳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르카.”
이셀렌의 말.
자리에서 일어난 오르카가 서류를 가져왔다.
흘끗 보니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구원군으로 편성되었다가 살아남은 병사들, 황후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게 이셀렌이 미리 알아 둔 것이리라.
나는 손사래를 쳐서는 물려 버렸다.
“됐다. 이미 너희들의 말은 믿고 있다.”
렌시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미, 믿어 주는 건가요?”
“자세히 조사하면 결국 다 나올 이야기인데 이걸로는 거짓말 못 하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아까 내가 말한 하시아의 생존, 그리고 타락을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굉장히 놀랐을 거다. 내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마.”
“…….”
다들 시선을 모았다.
나는 새삼스럽게 짚었다.
“시릭 카라카스가 죽고 나서, 너희들이 내 유언이라고 내놓은 것 말이다. 나는 그런 유언을 남긴 적이 없다. 12가문의 선정, 그건 엔라와 용공주의 합작품이다.”
“예, 근데 그걸 왜 지금…….”
“엔라는 대체 언제부터, 그걸 왜 준비한 걸까?”
내 물음에 다들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셀렌은 생각하다가 말했다.
“12가문은 무작위로 선정한 게 아니었지. 하지만 당시에 우리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아버지가 황제로 재임하셨을 때부터 12가문을 선정하셨단 말입니까?”
세탄이 말했다.
“그래야 말이 된다. 12가문은 인간 중에서 남다른 그릇이 나오는 가문들이고, 엔라가 그걸 하루아침에 뚝딱 알아냈을 리는 없어. 용공주라면 모르겠다만.”
“…….”
다들 놀라면서도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 가정이다. 다들 침착하게 들어라.”
“예.”
“엔라는 그냥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다. 하시아와 공모했다.”
다들 멍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근거를 댔다.
“하시아의 생존은 카미르 님에게 들었다. 그때는 아직 추정이었지만 이번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면서 하시아의 생존을 확인했다. 거짓 정보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것이 해명된다.”
“예? 대체 여기서 뭐가 더…….”
“하시아는 타락한 게 아니다. 혹은 타락했어도 뭔가 돌아올 방법이 있다. 엔라는 그걸 위해서 지금 하시아와 협력하고 있다.”
다들 신음을 흘렸다.
랑에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다, 시릭. 하지만 그건 너무…….”
“알아, 타락은 한 번 하면 끝, 되돌릴 수 없다는 거. 일단 타락한 순간 미쳐 버리고, 생전의 기억은 있되 인격은 붕괴되지.”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다 보았다. 파군을 부러트릴 때, 하시아가 정말 미친 것처럼 보였냐?”
“…….”
하시아는 공격도, 방어도 하지 않고 내 칼에 맞았다.
타락한 이들이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나도 이게 단순한 내 희망 사항, 착각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만난 사도는 마지막에는 정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락셀.
녀석은 마지막에 공격을 포기했다.
제국군 시절처럼 내게 경례를 바치고 사라졌다.
나는 칠죄신의 종복, 타락해 버린 영혼들을 숱하게 보았지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그 사도에 칠죄신이 강림하지도 않았다. 나비린, 칠죄신이 돌아올 날이 코앞이라고 했지?”
“예, 분명히…….”
“그러면 칠죄신의 힘, 지배력이 더 강해져야 하지 않나? 하지만 원탁 결전에서 키릭 레오가가 칠죄신을 거부하기까지 했어. 거기다 칠죄신의 사도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어. 하물며 엔라는 타락하지 않았다. 즉, 칠죄신의 지배력은 외려 약해졌다.”
렌시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타락하더라도 예전의 이성을 찾을 방법이 있다. 그리고 철혈성군이 그 방법을 완성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사실 이론적인 건 잘 모른다. 그건 카미르 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 알겠지. 하지만 예전부터, 오래전부터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나는 카미르를 보며 말했다.
“칠죄신은 왜 굳이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는 걸까요? 아니, 그게 칠죄신의 온전한 능력일까요?”
“예?”
“칠죄신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모습은 알지? 공간을 열어서, 해당자에게 흑마력을 휘감아. 그런데 왜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신이라면 그냥 손가락만 튕겨도, 아니 하다못해 자기 손으로 만지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과정이 하나 더 있지?”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죠.”
카미르의 질문에 나는 손에 마력을 불러냈다.
빨강, 주황, 노랑으로 변해 가는 마력.
“보세요. 내가 마력을 써요. 그런데 이 마력이 곧 나 자신은 아니잖습니까?”
“흑마력이 곧 칠죄신 자체가 아니라는 지적이십니까?”
“아까 나비린의 설명을 듣고 깨달은 겁니다. 엘프들이 정령마술을 쓰는 건, 다른 세계의 에너지를 빌려 오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나비린을 돌아보았다.
“정령무희는 정령이란 에너지와 엘프들을 이어 주는 가교라고 했지? 하지만 나비린이 모든 엘프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나? 물론 엘프들도 나비린의 지시나 권유를 무작정 거부할 수 있는 건 아니지.”
“…….”
“사실 칠죄신도 그런 거 아닐까? 강해지는 대신에 미쳐 버리는 흑마력과 사람을 이어 주는 가교인 거지.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고.”
카미르가 놀라서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그러면 말씀하시는 게…….”
“예,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친다는 게 진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냥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뒤집어쓰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타락하면 어느 정도는 칠죄신의 명령에 구속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통제가 약해지고 있어요.”
“으음, 일리가 있군요.”
“타락은 제국군 사이에서도 논쟁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습니다. 타락한 이들은 동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발견 즉시 처단해야만 했으니까요. 타락한 동료는 칠죄신의 종복, 적으로 간주하라고 정신교육을 몇 번이나 했고요.”
그러고도 변해 버린 동료를 공격하지 못해서 희생이 많았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흑마력의 시스템이 완전한 게 아니고,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몇몇 의문점들이 풀립니다. 엔라가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서 파군의 칼날을 빼돌리는 이유도요.”
“예? 그건 왭니까?”
“흑마력에서 이성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은 거죠. 여전히 미쳐 있고, 드물게 이성이 돌아오는 정도입니다. 아마도…….”
나는 이마를 누르고 말했다.
“이게 바로 엔라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파군의 조각으로 나를 움직이면서, 타락한 이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여지가 있다는 걸 보여 준 겁니다.”
“너무 말도 안 되잖아요…….”
“아니, 나는 엔라를 안다. 우리는 서로의 수법을 너무 잘 알아.”
본래는 적, 서로의 전술을 파훼하려고 몇 번이고 목숨을 걸었으니까.
상대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
“엔라를 지금 신뢰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뭘 하려는지 알겠어. 그리고 왜 무단으로 반란 같은 미친 짓을 하는지도 설명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락한 이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말해 봐야 나는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엔라는 독단으로 실행한 거야.”
“어머니가…….”
세탄이 탄식했다.
나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답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정황증거인 것 같답니다. 보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필요하답니다.”
“그거야 하나 남았지. 용공주다.”
나는 단언했다.
“아까도 말했지? 내 유언을 날조해서 12가문을 지정한 게 엔라와 용공주라고. 즉, 엔라가 뭘 꾀하는지 그 만 년 묵은 용은 다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낮잠이나 쿨쿨 자고 있겠지.”
“그러면 용공주 전하를 소환해서 확인을…….”
“아뇨, 자는 중이면 안 일어날 겁니다. 그냥 제가 가서 두들겨서 깨우는 게 빨라요. 그리고 내가 이쪽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는 다시 황후들의 눈을 보며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랑에이, 이셀렌, 렌시엘, 나비린, 유하.
“엔라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런 무모한 짓을 꾸민 이유는 너희들도 짐작이 갈 거다.”
“…….”
엔라는 장군, 당시에 군단장이었다.
나에게 보고를 올리지 않고 독단으로 작전을 펼쳤다가 하시아를 내버렸다는 책임.
그 책임을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깊게 느꼈으리라.
이셀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게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고?”
“마,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우리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러죠?”
렌시엘이 경악했다.
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잖아? 일단 목적이 세워지면 황당한 책략도 쓰는 여자야.”
“말도 안 돼!”
“모두 같이 책임지기로 해 놓고! 그 맹세를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고요? 미친 거 아닌가요?”
나비린이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화를 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최종 결전 직전에 있었던 일, 너희들의 진실을 들으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알겠다.”
“……어. 으.”
“…….”
아내들이 입을 다물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전전긍긍하는 얼굴들.
자식들도 마찬가지로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진작 이야기 좀 하지 그랬냐.”
“그, 그게…….”
“……우리들의 잘못이니까.”
“숨긴 시간이 길수록 괴로워졌습니다. 그래도 애써 잊어버리려고 했습니다. 또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힌다고……. 아니, 변명입니다.”
렌시엘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 당신에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결국 다들 일단 숨기자고 했습니다. 최종 결전이 코앞인데, 이 사실을 알릴 수는 없다고요.”
“…….”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냥 1황후의 콧대를 꺾어 주자고 보고를 누락한 일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거라고는, 또 당신에게 의심을 받아도 풀 수 없을 거라고…….”
렌시엘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하시아에게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그날, 그 영상을 보고 경악한 건, 하는 말은 다르지만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밝은 뜻과 올바른 의지를 갖고 한 일이 아니라…… 질투심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렌시엘은 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래서 우리는 당당하게 그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우리는 떳떳하지 못하니까요. 설사 당신이 용서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렌시엘.”
렌시엘이 한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당신이 제 옆에 있어도 가끔 멍한 얼굴을 할 때…… 하시아 씨가 있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란 생각과, 내가 당신을 이리 망쳤다는 자책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렌시엘은 다른 황후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우리는 같은 잘못을 저질렀고, 돌이킬 수 없지만 그래도 시릭이 언젠가는 다시 우리를 찾을 거라고, 그저 지금은 참고 인내하자고 했지만 10년 사이에 당신은 훨훨 가 버렸고요.”
“…….”
“황후들은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이 황성을 홀로 지키면서 다른 황후들을 원망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습니다. 다들 여기 있으면 당신이 생각나서 괴로웠겠죠. 나 역시도 술로 달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요.”
렌시엘은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시릭. 우리들이…… 다 망쳐 버렸습니다.”
“…….”
긴 이야기.
100년을 기다린 사죄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다. 잘못은 되돌릴 수 있다. 돌아오는 칠죄신을 다시 뭉개 버리고, 타락한 하시아를 원래대로 되돌리면 된다.”
나는 이셀렌을 보았다.
“지금 당장 할 일부터 말하마. 대관식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민중에게 심어라. 이셀렌, 오드벨하고 공모해서 황도, 전국에 소문을 퍼트려라. 2대 황제 후보가 황후 다섯 명의 동의를 얻었고, 곧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말해.”
오드벨이라면 이런 거 잘할 거다.
……아니, 이미 다 준비를 끝내 놓지 않았을까?
나비린이 의아하게 짚었다.
“기대감만 품게 한다고요? 그냥 대관식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아니, 내가 하는 건 대관식이 아니라 출정식이다. 그 자리에 모인 민중들 앞에서 서부, 엔라를 따르는 반군을 친다고 공표한다.”
다들 술렁거렸다.
하지만 내게 생각이 있으리라고 믿고 기다린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민중들 앞에서 이리 말할 거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많은 황후들이 나를 지지해 주었지만 엔라의 동의까지 필요하다고.”
“그러면…….”
“내가 하는 건 전쟁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건 내전도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엔라의 ‘오해를 풀고 동의를 얻기 위해서’ 서부로 가는 거다. 그렇게 국민들이 믿게 만든다.”
반란 토벌이 아니라 2대 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같은 전쟁도 명분에 따라서 때깔이 달라지지.
“국민들은 성원하고 나를 지지하겠지. 반군으로 일어났던 서부군도 결속력이 약해진다. 그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죄신의 사도들을 처리하고, 모든 걸 해결한다.”
전쟁 한판으로 싹 해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