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7)
마음의 굴레를 넘어서
하시아의 타락에 얽힌 황후들의 입장 표명.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황이 바뀌었다. 문제는…….”
애들인데.
내가 아이들의 얼굴을 살피는데 메이호가 손을 들고는 말했다.
“우리들도 저번처럼 들을게요. 전에는 넘어갔지만 그래도 어머니들의 입장도 조금은 들어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비린도 말을 보탰다.
“저는 리세라가 들어 줬으면 한답니다. 다른 아이들은, 각자 황후들과 의논해서 참가를 정하는 게 맞지 않을는지요?”
“그럼 각자 의논 시간을 두고 저녁에 모이지.”
내가 결정하자 나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폐하. 다른 황후들에게도 전달하고 차질 없이 진행하겠답니다.”
“…….”
리세라도 나에게 인사하고는 나비린을 따라갔다.
내가 지켜보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메이호가 확 끌어안았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난 아빠 편이니까.”
“그래.”
나는 내 허리를 끌어안은 메이호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럴수록 둘째 딸은 더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미리엘이 그런 우리 둘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르카, 나도 아빠랑 저러고 싶어.”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오르카가 난처해했다.
미리엘이 양팔을 위쪽으로 번쩍 들어 보였다.
“내가 작아서 손이 안 닿아. 도와줘.”
“어떻게요?”
미리엘은 아직 어린 애고, 오르카는 엄연한 성인 남성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태어난 순서대로 형제자매의 서열이 정해진다.
마치 한국의 옛날이야기에 나오던 어린 삼촌과 나이 많은 조카 같군…….
내가 웃으면서 보는데 나를 향해서 다가온 오르카가 미리엘의 허리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여차.”
나는 얼른 미리엘을 가슴에 받고 안아 주었다.
내 귀여운 천사는 웃음소리를 터트리면서 내 얼굴에 뺨을 비볐다.
“괜찮아요, 아빠. 저도 아빠 사랑해요.”
“…….”
아.
느닷없이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눈 끝이 아려 왔다.
“…….”
오르카는 그런 나를 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좋은 아들이었다.
초저녁이 되고 다시 가족들이 모였다.
2황후 랑에이, 3황후 이셀렌, 5황후 렌시엘, 6황후 나비린, 8황후 유하.
전처럼 응접실에 나눠 앉은 황후들.
유하의 옆에 앉은 카미르가 말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사실 제가 들어도 될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장모님에게는 따로 여쭤보고 확인할 게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나는 난처하게 말끝을 흐렸다.
자리에 앉은 내 품에서 미리엘이 곤하게도 잠들어 있었다.
차마 깨울 수가 없다.
그리고 메이호는 뒤에 서서, 내 목을 양팔로 끌어안고는 몸을 숙이고 있었다.
“……호야.”
“싫어요. 전에는 어머니 쪽에서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번에는 아빠 옆에서 들을 거예요.”
“알았다.”
언쟁을 벌이면 미리엘을 깨울 수도 있지.
그리고 메이호의 마음씨가 참 고마웠다.
나와 리세라가 계속 놀리고 본인도 지적당하면 부끄러워하지만 이 아이 역시 내가 너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메이호의 손을 누르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꼭 맞잡았다.
“…….”
나는 랑에이, 이어서 렌시엘에게 양해의 눈짓을 보냈다.
랑에이는 정중하게, 그리고 렌시엘은 눈물을 머금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셀렌이 말없이 렌시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자, 그럼 시작하자.”
어색한 정적.
나는 운을 뗐다.
“사실 하시아가 상당 부분 거짓말을 했으리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설사 너희들이 그걸 밝히더라도 내가 생각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들을 새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장남, 세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 이렇게 커서, 같이 서로 이야기하고 지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들에게도 해명의 기회를 줘야겠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결국 변명일 뿐이야.”
이셀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나약한 소리나 한답니다, 암살여왕. 그러다가 또 펑펑 울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려고요?”
“뭐?”
“다들 두려워하는 다크엘프의 수장이라는 분이 그렇게 넋이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답니다. 흠모하던 오페라 가수가 죽어도 팬이 그렇게까지 서러워하지는 않을 거랍니다.”
“너도 이틀은 앓아누웠을 텐데?”
“나는 원래 몸이 약하답니다. 딱히 시릭이 죽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요.”
이셀렌과 나비린이 서로 설전을 벌였다.
아, 얘네 사이 안 좋지…….
렌시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폐하가 모처럼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주신 자리입니다. 두 사람 다 마음 깊이 새겨 두고 경거망동은 삼가세요.”
“당신은 또 우아한 척이나 하신답니다. 죄를 갚을 길이 사라졌다고 웅크리고 떨던 모습이 어제 같은데요.”
“그, 그건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이들 앞입니다.”
“……시작은 원군 요청을 받으면서부터였어요.”
유하가 조용히 운을 뗐다.
정적.
다들 시선이 모인 가운데 유하가 말했다.
“다 죽어 가는 전령의 전서는…… 본진의 폐하를 급히 불러와야 한다고 했어요.”
“전서? 왜? 다크엘프 통신망이 있잖아?”
물론 제국군의 정보 전달은 전령도 병행했지만.
급한 건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이 우선 아닌가?
이셀렌이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그때 1황후의 근방에서는 통신이 막힌 것 같아. 실제로 나도 그걸 알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전부 응답이 없었어. 사도 디에르크가 정보 통신을 약화시킨 것처럼.”
“으음.”
나는 잠깐 생각했다.
“그러면 칠죄신이 무슨 사달을 벌여서,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도 차단해 버렸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우리들은 엄살이라고 생각했다.”
랑에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렌시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랑에이, 당신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엄살이라는 건 나와 이 자리에 없는 엔라, 두 사람의 주된 주장이었습니다.”
“…….”
“예, 제가 주장했어요.”
렌시엘이 나를 보며 말했다.
덜덜 떨면서.
“1황후가 나가 있던 서쪽 방면은 조무래기들만 있었어요. 적어도 당시에는 정보가 그랬어요. 한데 구원 요청이라니, 그것도 본진에 있는 제국군의 총수인 당신이 직접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정말 말도 안 됐죠. 우리들이 구상한 최종 결전을 완전히 어그러트리는 일방적인 소리였어요.”
“그래서?”
“그래서…….”
렌시엘이 차마 말을 못 하는데 나비린이 이었다.
“그 편지를 시릭에게 전하지 말자고 다들 뜻을 모았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원군을 보내지 않은 건 아닙니다. 구원군은 분명히 갔답니다.”
여기부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이야기를 재촉했다.
나비린이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우리 황후들은 서로 사이가 나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사실 내키지 않는 사이도 있답니다.”
“…….”
“시릭, 당신은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사이가 나쁜 건 나쁜 거랍니다. 당장 저와 암살여왕이 한자리에 앉아서 온전히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황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장면이랍니다.”
이셀렌이 말을 받았다.
“원래라면 둘 중 하나가 죽지. 실제로 제국군 초기에는 정말 위험한 경우가 10여 회는 있었고.”
“그렇답니다. 서로 사이 나쁜 종족, 거기서도 귀인(貴人)인 우리들이 한 사람의 부인이 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랍니다. 해묵은 종족 간의 감정도 있고, 서로 개인적으로 안 맞는 분들도 많답니다.”
“너와 맞는 여자가 세상에 어딨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나비린이 눈을 흘겼다.
“그런 건 상관없답니다. 한 사람만 알아주면 되니까요.”
“아, 리세라?”
“……남자랍니다.”
“그래, 오빠인 오드벨은 네 진심을 알아줄 거다.”
“…….”
발끈.
나비린은 서운해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고상한 척 폼을 잡아도 내가 좀 도발하면 바로 저런다니까.
나는 손을 저었다.
“이야기가 샌다. 원래대로 돌아와라. 그래서?”
“하지만 사이 나쁜 우리 황후들도 하나는 확실했답니다. 다들 1황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답니다.”
나비린의 말.
렌시엘이 부연했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시아는 우리와 출발 지점이 다르니까.”
이셀렌이 착잡하게 말했다.
랑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릭과 하시아는 처음부터 함께한 사이, 우리는 그다음이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정략결혼이니까요.”
유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들이 겁에 질려서, 더듬더듬 말하는 걸 보니 말문이 막혔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나와 하시아는 처음부터 함께했고, 다른 아내들은 분명히 정략이 섞인 관계였다.
일곱 이종족을 끌어들이려면 혼인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시아도 말했고, 나도 결국 납득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난 너희들을 뒷전으로 여긴 적이 없어.”
“알아요.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 줬는지, 단순히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우리를 대해 줬다는 건 알아요.”
렌시엘이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하시아를 넘을 수는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
이셀렌이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하시아를 질투했어. 정치적인 목적을 떠나서 고른 여자. 네가 가장 신뢰하는 스승, 네가 쓰러졌을 때 군사 지휘를 맡기고 조언을 청하는 존재.”
“…….”
“우리와 달리, 네가 마음만으로 선택한 여자.”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시아는 단순한 1황후가 아니었다. 너의 스승이자 동반자였지. 우리 아내들은…… 결국 그다음이었고.”
나는 입가를 문질렀다.
나비린이 말했다.
“본론은 이제부터랍니다. 구원 요청을 확인한 우리들이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누가 먼저 했지?”
“내가 했다.”
말을 아끼던 랑에이가 손을 들었다.
렌시엘이 정색하고 말했다.
“아니에요. 전 그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구원 요청을 구겨 버린 건 엔라였어요.”
“엔라는 이 자리에 없다. 그리고 엔라가 안 했으면 내가 그랬을 거다.”
“……저도 부추겼어요. 언니는 너무 함부로 군다고.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자기 판단대로 콕 짚어서 구원군으로 부르는 게 말이 안 된다고요.”
유하가 떨면서 말했다.
랑에이가 신음했다.
“그래서 우리 황후들이 모두 함께 구원군 1만을 끌고 가기로 했다. 하시아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칠죄신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황제인 너를 턱짓으로 오라 가라 부려서 자신의 위세를 만방에 자랑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런 사람 아니다.
하지만 하시아는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행동을 많이 해 왔다.
이셀렌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 황후들이 직접 가서 살펴보고…… 하시아에게 한바탕 설교를 할 작정이었지.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다.”
“……문제는 엔라와 랑에이를 앞세운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 반나절 거리에 이르렀을 무렵에 칠죄신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거다.”
“…….”
나는 머릿속에 당시 군단들의 포진과 위치를 떠올렸다.
랑에이가 무겁게 말했다.
“하시아는 포로로 잡혔다고 병사들이 말했다. 칠죄신이 포로를 잡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호선랑 랑에이는 돌격해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엔라는 반대로 회군해야 한다고 했고요.”
렌시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 엔라가 없다고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말합니다. 랑에이, 자꾸 자기가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시릭의 판단에 혼란이 옵니다.”
“…….”
“그리고 엔라의 판단은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랑에이와 엔라가 뒤늦게 공격한다고 한들, 실제로 칠죄신을 쓰러트릴 순 없었어요. 하시아의 생사도 불분명한데 외려 두 사람까지도 당할 수 있었죠. 시릭도 알겠지만 그 두 사람은 칠죄신과의 최종 결전에 필요했습니다.”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와 제국군은 칠죄신과의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서 엔라와 랑에이가 빠지면 승리할 수 없다.
“……결국 하시아는 죽었다고 판단하고 우리는 회군했다.”
“…….”
랑에이는 의기소침해져서는 말을 못 했다.
……동료를 버려두고 회군했다고 따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은 칠죄신, 거기 들어가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다.
이셀렌이 말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하시아가 네게 보낸 구원 요청을 묵살하고, 우리들이 구원군을 꾸려서 보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무겁게 다가왔다. 당시에는 모두 경황이 없었고 겁에 질려 있었다.”
“…….”
“하시아의 전사가 알려지면 수습이 안 될 거라고. 네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그야, 엔라는 군단장이었고, 내가 자율적인 권한을 줬어도 이건 좀 아니지? 자의적으로 구원군을 편성해서 보낸 건 둘째 치고, 나한테 보고를 일부러 누락했잖아?”
“…….”
“하지만 그걸 안다고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할 순 없었을 텐데?”
나비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미움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무서웠다고요!”
“…….”
“……다, 당신이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들이 그때 잘못된 판단으로 1황후를 죽게 만들었다고요.”
나는 지도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쿼렐에서 출발했지? 나는 당시에 본진을 엔게이트에 두고 있었다. 내가 훨씬 더 멀다. 이셀렌이 나에게 바로 보고를 올리고, 내가 구원부대를 편성하고 직접 몰고 가도 너희들보다 늦게 도착했어.”
“그게 그렇게 정리할 수 있나요?”
유하가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단락을 맺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우리들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
내가 직접 달려갔으면, 어떻게든 칠죄신과 싸워서 하시아를 구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시, 하시아가 칠죄신에게 잡혔다는 보고를 들은 순간 나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단정하지 않았나.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은 그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이란 간사한 것인가?”
그래, 아내들의 두려움도 이해가 갔다.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흘러서 이렇게 마주한 진실에도 마음에 풍랑이 이는데.
당시에 나는, 아내들한테 아무 잘못도 없다, 라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그렇군. 이거 함정이었네.”
나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어쩐지. 칠죄신이 하시아를 살려 뒀더라.”
“예?”
다들 의아하게 보자 나는 허탈하게 말했다.
“내 짐작이지만 거의 확실할 거다. 칠죄신은 처음에는 하시아를 인질로 삼아서 나를 불러낼 생각이었을 거다. 나와 제국군이 준비한 최종 결전의 무대를 흐트러트리고 나를 번민하게 만들려고.”
“…….”
“그런데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구원하러 온 걸 보고 계획을 바꾼 거야. 너희들이 중간에서 보고를 누락한 걸 알아차린 거지.”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깊이 감춰 놨다가 내가 행복한 시절에 들이밀어서 파괴하려고.”
“무슨…….”
“맞을 거다. 신이라는 게 나 하나 조지겠다고 그런 거지.”
자기에게 대항하는 인류의 구심점.
그냥 죽이는 걸로 성에는 안 차니까.
계속 괴로워하라고 나에게 폭탄을 던진 거지.
정말 망할 놈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긴장한 아내들이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내릴 판결에 자기들의 운명이 갈린다고.
두려움에 떨면서 내 눈치만 본다.
“그래, 이제 알았다.”
내 아이의 어머니들도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작은 거짓말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왔으니까.
이제 과거의 일은 다 알았다.
그러면 미래, 앞으로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이 집의 가장이자, 제국의 황제로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첫째, 하시아는 살아 있다.”
“뭐?”
“무, 무슨…….”
이셀렌이 깜짝 놀랐다.
“둘째, 타락한 사람이 돌아올 방법이 생겼다. 근거는 조금 있다가 말한다.”
“…….”
다들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타락은 한 번 하면 끝, 영영 돌아올 수 없다.
나만이 아니라 다들 치가 떨리게 겪은 일, 각자 타락한 동족들을 상대로 싸운 일이 무수하게 많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걸 풀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셋째, 그러니까…….”
나는 가족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하시아를 원대로 되돌리고 칠죄신을 끝장낸다.”
꼬여 버린 과거사.
제국의 존치까지 흔들리게 만든 매듭.
이제 풀어 버릴 때가 왔다.
내가.
우리 가족들이 당한 만큼 복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