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4)
발동
하시아의 이야기.
내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 발밑이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기습.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얼른 염동결계를 쳤다.
하지만 몸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고.
옥상 바닥을 때려 부수면서 뛰어 올라온 놈이, 순식간에 내 허리를 잡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완력이 아니라 기술.
파일 드라이버, 자칫하면 전신불수다!
뻐어어억!
“컥!”
슬슬 염동결계를 펼칠 정신력도 끝난 나는 얼른 몸을 굴렸다.
사실 마력방어만 해도 충분했지만, 적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연속기에 아작 날 거다.
하지만 상대는 구르는 내 발목을 잡고는 벽에다가 후려쳐 버렸다.
뻑! 뻐어억!
날 무슨 파리채처럼 계속 후려치는 연타.
여기서 마력방어를 풀어 버리면 피떡이 된다!
“크으윽!”
내가 들고 있던 거문을 휘두르려고 하자, 상대는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퍼버버벅!
땅바닥을 구르던 나는 얼른 일어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어억.”
아, 안 좋네.
염동결계를 쓰지 못할 정도로 정신력이 날아갔다.
거기다가 상대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마찬가지로 후드를 쓴 거대한 덩치.
기습이었다지만 나를 몰아붙이다가, 반격하려니까 풀어 버린 실력.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니다.
사도다.
사도가 둘이나 튀어나왔다.
“락셀! 폐하에게 1황후 전하에 대해서 말씀드리던 중이었습니다! 한데 이래 버리면 폐하가 저희들의 말을 믿지 못하시죠!”
“…….”
나를 기습한 덩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후드를 벗었다.
사자 머리.
하지만 이목구비가 기억에 있었다.
“상장군 락셀이냐? 사자 수인으로 모자라서 아예 사자 인간이 되어 버렸네?”
“…….”
“둘이 제국군 동기 동창이라서 타락도 같이 하셨어? 눈물 나는 전우애라서 나까지 울고 싶어진다.”
나는 말하면서 상태를 점검했다.
어깨와 다른 잔부상은 그렇다 쳐도, 정신력을 너무 많이 썼다.
그리고 예렌 하나만 상대하는 거라면 몰라도…… 락셀까지 적이면 골치가 아프다.
둘 다 제국군에서 내로라하던 장군들이었다.
어깨의 녹존을 뽑아 버린 예렌이 말했다.
“폐하, 진정하시고 말씀을 들어 주시길. 하시아 전하께서는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저희들은 가능한 한 살려서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희들을 믿지 못하시는…….”
“너희들은 타락했다. 당연히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겠지.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다른 부분이다.”
하시아가 정말로 살아 있나?
치명상이었지만 내 눈으로 최후까지 본 건 아니다.
그리고 마녀들의 계보도가 사실이라면.
엔라의 반란은…….
나는 예렌을 보았다.
“엘프들은 왜 죽였냐?”
“그들은 죽어 마땅한 범죄자였습니다. 그러니…….”
“너 지금 그게 할 소리냐?”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들의 제국군에 범죄자, 반역자가 한둘이었냐? 칠죄신과 싸우겠다면 나는 누구라도 받아 주었고 전우로 삼았다. 과거가 어찌 되었건 제국의 깃발 아래에서 우리는 형제였고, 함께 세상을 바꿔 보자고 뭉쳤던 이들이었다.”
“폐하, 오해가…….”
“오해? 넌 결국 지금 나 하나 불러내겠다고 엘프들을 학살한 거다. 만약 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비린을 죽였겠지?”
“…….”
“아니라곤 못 하네.”
그리고 내 옆에서, 나랑 친하게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미레이를 쏴 죽이려고 했다.
예렌은 언뜻 옛날처럼 말하는 것 같지만,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수줍음 잘 타고 이성적이던 엘프 아가씨는 이제 나랑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겠다고 민간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쏴 죽이고 있었다.
“마피아가 범죄자들이다? 그럼 그냥 처벌하면 된다. 그런데 넌 고작 나랑 이야기하겠다고 사람 수십 명을 죽였어.”
“……폐하께서 저희들이 타락했다고 선입견을 갖고 멀리하실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래 놓고 안 가지면 호구지.”
예렌이 말하려는데 나는 손을 내밀어서 막았다.
“그만, 네 이야기에 일정 부분 진실이 있겠지. 하시아가 살아 있다는 말? 일단은 믿어 주마. 하지만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
“너 아까, 가능하면 날 살려서 데려가야 한다고 했지? 그러면 여차하면 죽여서 데려갈 계획이라는 거네.”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죽었다고 알고 있던 너희들도 칠죄신에게 타락했으니까. 날 죽이고 그 시체만 데려가도 방법이 있다 이거네?”
“……가능하면 거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민간인 학살보다 더 거친 방법이 있어? 얼른 해 봐.”
하는 말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해도.
날 불러내겠다고 사람 죽이고, 시체라도 데려가겠단 녀석들과는 교섭의 여지가 없다.
휙!
예렌이 활을 내게 겨누었다.
동시에 침묵하던 락셀이 나를 향해서 달려든다.
락셀의 덩치에 가려서 예렌의 사선이 전혀 안 보인다.
나는 투시력으로 확인하고 오른쪽으로 달려 나갔다.
마력질주.
핑! 핑! 핑!
내 귓불,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들.
하나는 확실하다.
예렌의 화살은 수 km를 단숨에 도달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화살이다.
하지만 정작, 그걸 쏘는 예렌의 판단 능력과 반사 신경은 특출 나게 나아진 점은 없었다.
“큭!”
물론 그래도 초인의 반열.
나는 지그재그로 피하면서 예렌에게 접근했지만, 이래저래 잔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나는 탐랑과 거문, 녹존을 순차적으로 비검으로 날렸다.
예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굴러서 피했지만…….
“계속 똑같이 피하네!”
나는 마력질주로 예렌에게 달려들면서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한 번 크게 휘둘러서 바닥에 찍어 버렸다.
“꺅!”
예렌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든 시위를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좌우로 흔들어서 막고는, 달려오는 락셀에게 던져 버렸다.
팍!
락셀이 엉겁결에 받아 드는 순간.
핑!
나는 탐랑과 녹존을 비검으로 연속해서 날려 보냈다.
퍽! 퍽! 퍽!
세 개의 소리.
내가 날린 비검이 락셀의 목, 그리고 예렌의 가슴을 관통했고.
예렌은 그 와중에도 활을 쏴서…… 내 허벅지를 뚫어 버렸다.
“으음.”
“……다리를 당하셨네요, 폐하.”
락셀에게 안긴 예렌이 빙긋 웃었다.
전투 속행.
칠성칠요의 능력 덕분에 전투 수행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예렌과 락셀의 상처다.
사람이라면 치명상인데 흑마력이 넘실거리면서 때워 버리고 있었다.
“칠성칠요가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저희들을 명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거죠.”
예렌은 말하는 도중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시위를 당겼다.
파바박!
예측 샷까지 섞어서 난사하는데, 마력질주로 달려서 피하는데도 상처가 늘어난다.
애당초 재장전이 필요 없다는 게 너무 사기다!
팍!
그래도 이대로 계속 소모전을 벌일 순 없어서 내가 달려드는데…….
휙!
예렌을 안고 있던 락셀이 위로 훌쩍 뛰어서는 피해 버렸다.
그리고 공중에서 다시 예렌의 화살이 쏟아진다.
“큭!”
나는 몸을 숙여 피하면서 탐랑과 거문을 비검으로 날렸다.
맞교환.
“후우우.”
락셀과 예렌이 땅에 착지했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내 옆구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면 예렌과 락셀은 가슴이 박살 나는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여전했다.
소모전이 되면 내가 이길 수가 없다.
“아니…….”
“예, 폐하. 저희들은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어요. 칠죄신이 돌아올 날이 정말 코앞까지 닥쳤으니까요.”
락셀에게 안겨서 나를 노리던 예렌이 활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폐하, 이제 그만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폐하도 사실 저희들과 다르지 않은, 시대의 망령이시니까요.”
“뭐?”
“시릭 카라카스는 대영웅, 칠죄신을 물리친 영광스러운 황제죠. 하지만 100년이 지나니 사람들은 황제의 위업을 망각하고, 스스로 다툼을 반복하면서 결국 칠죄신이 돌아오게 만들었죠.”
예렌이 나를 안쓰럽게 보았다.
“폐하가 왜 지금의 세상을 책임지셔야 하나요? 폐하는 하실 만큼 하셨잖아요. 환생해서까지 더 하실 필요가 있나요?”
“…….”
“인간에게 100년은 충분히 긴 기간 아닌가요? 우리들이 타락까지 감수한 이유 중 하나는…… 폐하를 이제 편하게 해 드리고 싶어서예요.”
예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폐하는 정말 위대하신 분, 하지만 칠죄신이 돌아올 때마다 계속 이런 일을 반복하실 건가요? 그것은 위대하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지만 신이에요. 그래서 폐하도 결국 추방이라는 형태로 내쫓을 수밖에 없으셨고요.”
“…….”
“폐하는 책무를 다하셨어요. 이제 그만 쉬셔도 돼요.”
예렌은 천천히 활을 다시 들어 올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필사적으로 방책을 강구했다.
정신력이 바닥인 건 둘째 치고, 락셀이 너무 문제다.
내가 설사 예렌을 몰아넣어도 락셀이 방패이자 도우미, 이동 역할을 수행하는 이상.
퍽!
화살이 날아온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옆으로 뛰었지만 옆구리와 다리에 또 얻어맞았다.
3연사.
“……동시에 여러 발 쏠 수 있는 건 숨기고 있었죠. 폐하를 유인한 다음에 잡기 위해서요.”
“…….”
도주도 막혔다.
예렌의 압도적인 사거리가, 지금은 절대로 도망갈 수 없는 기회 공격 범위가 되어 버렸다.
비행할 정신력도 모자라지만, 설사 한다고 해도 예렌에게 맞고 꼬치구이가 되어 버릴 거다.
한데 예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이제 그만 포기하시라니까요. 지금 세상을, 100년 전의 망령인 폐하가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면서 지킬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애들이 있다.”
“그래서요? 이미 다들 한 사람의 어른이 아닌가요? 설사 어른이 아니라고 해도, 그게 반드시 우리들의 부탁보다 중요한가요?”
“…….”
나는 순간 대답을 못 했다.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하다.
하지만 제국군, 눈앞의 전우들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었다.
타락한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되지만…… 무작정 부정할 수가 없다.
“아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전우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를 믿고 따라와 주세요.”
“…….”
예렌의 말에 반박할 논리는 있지만 얼른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 주변에 여전히 건재한 이종족들이 있어서 종종 까먹고 있지만…… 나는 결국 100년 전의 인물이다.
내가 알던 인간 신하, 전우들은 다들 가 버렸다.
“폐하, 설사 폐하가 이번에도 정말, 기적적으로 다시 칠죄신을 추방한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은요? 매번, 매번 그러실 건가요? 대체 언제까지?”
“…….”
예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은 그럴듯하다. 내가 여전히 시릭 카라카스였다면…… 진지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르지.”
“……예?”
“그런데 지금 내 이름은 리젠 리브라타거든.”
아멜리아.
갑자기 아멜리아가 엄청나게 보고 싶어졌다.
여기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리고 이놈들에게 죽거나 끌려가 버리면.
아멜리아는 어떻게 될까.
내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막내 도련님의 죽음을 슬퍼할까?
근엄한 척하지만 놀려 먹기 좋은 로데릭 형은?
장난스럽지만 정색하면 매서운 칼비나 누나는?
그리고 내 아버지.
리브라타 영지에서 나를 떠나보내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던 리브라타 백작은?
예렌이 당황했다.
“……폐하? 대체 무슨 소리를.”
“지금 나는 시릭이면서도 리젠이다. 리젠의 기억, 인간관계, 추억들도 전부 있다. 까먹고 있었지만…… 하나하나 기억나기 시작했다.”
“…….”
“시릭 카라카스가 이 시대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나는 2대 황제 후보 리젠이기도 하거든.”
나는 허리를 펴고는 웃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마치 내가 싫어서 죽겠는데 의무감만으로 이 짓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칠죄신에게는 갚아 줄 빚이 있고, 나는 지금 시대에서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
“내 가족! 내 사람은 누구도 못 건드려! 그리고 예렌과 락셀! 너희들은 그걸 배신했다!”
나는 가슴을 누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지치고 힘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 같이 웃고 떠들고, 자식들이 안아 주고, 같이 밥 먹고 술 마시면 다 풀리는 법이야! 아빠는 그걸로 충분하거든!”
“……폐하.”
“아, 미안하다. 예렌, 넌 미혼이지? 자식 생긴 보람, 모르나 보네.”
퍽!
그 순간 예렌이 발끈하며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이제까지와 다르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다리와 복부를 뚫고 가는 화살.
외려 예렌이 더 당황했지만 나는 천천히 심장에 올린 손에 힘을 가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다음에는 이 심장의 성능을 짐작하고, 발동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처음에는 리젠의 몸이 너무 허약했고, 성장한 지금도 다음을 약속할 수가 없다.
그래도 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너희들이 타락하게 만들어서. 우리는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
“다시 미안하다. 이런 식으로 끝나게 돼서.”
“……폐하는 저희들을 못 이기십니다.”
예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내 가슴을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에 마력을 불어 넣으면서.
확신을 담아서 말한다.
“아니, 이제부터 이긴다.”
만물의 마력을 먹어 치우는 괴물.
용의 심장.
드래곤 하트(Dragon Heart) 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