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3)
과거가 다시금
나비린의 비명.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염동결계를 발동했다.
동시에 팔로 미레이를 끌어안으면서 수영장 안으로 몸을 날렸다.
괜히 수영장에서 노닥거린 게 아니다.
아무리 강맹한 화살이라도 수중에서는 위력이 확 죽는 법.
뭉클뭉클.
투명한 물속에서 피가 번져 나간다.
내 어깨, 들어오기 직전에 맞아 버렸다.
“……!”
미레이가 깜짝 놀랐지만 나는 녀석을 잡고는 내 아래로 밀어 넣었다.
팍! 팍!
수면 속에서 진동이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저격이 연이어지는 거다.
맞으면 큰일, 나는 염동력을 써서 재빠르게 이동했다.
파아악!
“후우우.”
풀장의 반대편까지 이동하여 올라온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각도상 여기까지는 저격을 못 한다.
“트, 특관님!”
미레이가 기겁하며 나를 살폈다.
내 왼쪽 어깨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뻥 뚫렸다.
미레이가 얼른 내 상처를 누르는 사이, 나는 앞으로 팔을 뻗었다.
슉!
탐랑과 거문, 녹존이 나를 향해서 날아온다.
“위치는 파악했다. 이제 다녀올 테니까…….”
“시릭!”
푸아악!
그때 나비린이 풀에서 올라오면서 비명을 질렀다.
홀딱 젖어 버린 이브닝드레스.
수영복도 아니면서, 내가 물속으로 뛰어들자 놀라서 무작정 뛰어들어서 쫓아온 거다.
물의 정령마술을 쓴다지만 무모한 짓이었다.
“헉, 허억.”
막 올라온 나비린은 나를 향해 달려오려다가 휘청거렸다.
“아, 거. 준비운동도 안 하고 수영장에 뛰어들지 마라. 몸도 약하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나비린을 손으로 붙들었다.
나비린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는 내 어깨를 보았다.
“얼른 치료해야 해요!”
“어깨 좀 뚫린 거 갖고 뭘. 정리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안 돼요! 다른 애들을 시켜서…….”
“2km가 아니야. 더 멀다.”
후보 빌딩에 감시로 붙여 놨던 녀석들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방금 저격.
날 노린 게 아니다.
이래저래 짚이는 게 있으니 내가 직접 해결해야 했다.
“금방 다녀온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또 오해하고 화내고 가 버리려고!”
나비린은 급하게 말했다.
“잘 들어요! 우리가 1황후를 싫어했던 건 맞지만 그 상황은 오해가…….”
“그거 말하지 마라.”
“말할 거예요! 당신을 지금 못 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나비린은 양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글썽거리는 눈물.
감정이 북받치는지 울먹거린다.
“또, 또 우리 안 보려고요? 또? 저만 놔두고 훌쩍 가 버리려는 거예요?”
내가 막 대답하려는데…….
퍽!
그때 건너편의 엘프 호위 중 하나가 쓰러졌다.
우리 쪽을 향해서 이동하려다가 저격당한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빠르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와서 하자. 나비린, 네가 말하는 거 들어줄 테니까 대신 애들 좀 안전하게 지켜!”
“시릭!”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을 굴러서 뛰어올랐다.
비행.
적의 방향은 알았다.
밤하늘로 순식간에 상승한 나는 앞으로 쭉 날았다.
“내가 접근하는 걸…….”
내 예상이 맞다면.
내가 날아서 단숨에 다다를 것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혹시나 해서 나는 염동결계를 발동했다.
염동결계는 그냥 켜기만 해도 정신력을 잡아먹고, 이동 중에 유지하려면 더 어렵다.
거기다가 복수의 초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면 정신력이 곱절로 소모된다.
즉, 비행하면서 염동결계를 유지하면 순식간에 정신력이 바닥이 난다.
하지만…….
퍼버버벅!
삽시간에 염동결계에 꽂히는 충격들.
다섯 발이나 날아오고 있었다.
염동결계를 쓰지 않았다면 진작 꿰뚫려서 추락했을 거다.
하지만 덕분에, 화살을 어디서 날리는지 알았다.
무려…….
3km 밖의 빌딩 옥상!
휘이이익!
연이어지는 저격을 막아 내면서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바닥에 착륙했다.
예상대로의 적.
검은 망토,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인물이 활을 들고 있었다.
전에 엔라와의 결전을 방해했던 놈이다.
“…….”
나는 그대로 바닥을 차면서 대뜸 탐랑을 비검으로 던졌다.
한데 상대는 다리를 쫙 찢어 주저앉아 회피하면서…… 시위를 당겼다.
피잉!
“큭!”
비명을 듣고 염동결계를 발동한 것보다 빨리 나한테 꽂힌 화살이다.
음속, 아니 광속!
퍼어억!
염동결계로 막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들기는 충격량에 밀려난다.
혹시 몰라서 마력장까지 발동했는데도, 너무 어마어마한 충격량이라서 버티지 못한다.
연사에 밀려난 내 몸이 옥상 벽에 부딪혔다.
“……뭐야?”
분명히 내 염동결계 위에 충격이 오긴 했는데 화살이 안 보인다.
내가 의아해하는데…… 상대가 활을 바닥으로 내렸다.
무언의 제스처.
나도 경계하면서 일단 염동결계를 풀었다.
이동하면서 유지하느라 정신력이 엄청 빨리 소비되었다.
지금 등에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몸이 지쳤다.
“뭐하자는 거냐, 너?”
“…….”
“왜 미레이를 노렸지?”
저격수가 노린 건 내가 아니었다.
미레이다.
내가 미레이를 안고 풀로 떨어지는 바람에 내 어깨에 맞은 거다.
“미레이는 그냥 애잖아. 네 목적은 나나 황후를 꾀어내는 게 아니었나?”
“…….”
“그러고 보니 전에 엔라를 감싼 것도 너지? 너는 사도고.”
내가 계속 물어도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고 틈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혹시…….
“그 얼굴 가린 후드 벗어 봐라.”
“…….”
“명령이다. 벗어.”
서로 적으로 만난 사이, 말도 안 되는 대화다.
하지만 나는 심증에 잡히는 게 있었고.
적은 여전히 묵묵부답.
하지만 활을 움켜잡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인다.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고 싶다.”
“…….”
“진짜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맞나 보네.”
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침묵으로 버티던 상대가 나를 향해서 활을 들어 올렸다.
더는 대화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빈 활시위에 검은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화살이 아니라 흑마력을 쏘아 내는 것이다.
“…….”
타락했다는 증거.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짚어 나갔다.
“다들 2km 밖의 저격이라는 걸 파악하고 경악,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급급했지. 하지만 네 사거리는 2km가 아니라 그 이상. 3km까지 가능했다. 일부러 적당히 한 거지.”
“…….”
“화살이 아니어도 되는데 굳이 화살을 쓴 것도 마찬가지. 자기 실력을 감춰서 적의 오판을 유도한다. 궁수의 기본이자 요체지.”
나도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탐랑과 거문, 녹존을 내 주변에 띄우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거리라면…….”
내가 이긴다!
핑! 핑! 핑!
나는 탐랑과 거문, 녹존을 연달아 비검으로 날렸다.
하지만 궁수는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하면서 시위를 연신 당겼다.
퍼버벅!
염동결계가 흔들리는 충격.
염동결계도 내구력이 있고 깨질 때는 깨진다.
그러니 그 전에 잡는다!
“아아아아!”
나는 구르는 상대를 향해서 다리를 날렸다.
발끝만 텔레포트시켜서 적의 가슴팍을 걷어찬다!
퍼어억!
난데없이 나타난 발차기에 궁수는 가슴팍이 차여서 날아갔다.
“큭.”
처음으로 지르는 비명.
궁수는 구르는 중에도 용케 바닥을 짚고는 다시 시위를 놓으려고 하지만.
퍼버버벅!
나는 상대를 노려보면서 주먹 연타를 날렸다.
내 주먹질을 텔레포트시켜서 날리는 연타.
염동연격권!
“으으윽!”
상대는 충격에 버티려고 마력을 끌어 올렸지만, 나는 연격권으로 적을 묶고는 마력질주로 달려들고 있었다.
손에는 돌아온 칠성칠요의 탐랑과 거문을 들고!
“아!”
궁수는 외치면서 뒤로 크게 뛰며 시위를 놓으려고 했지만…….
퍼어억!
내가 날린 비검, 녹존이 궁수의 어깨를 꿰뚫고 벽에 박혀 버렸다.
“으으윽!”
궁수가 몸부림을 쳐도 마력이 안 일어난다.
나는 혀를 차고는 말했다.
“포기해라, 녹존은 적의 마력을 흡수한다.”
베는 정도로는 미미하지만, 이렇게 찔러 버리면 마력을 계속 흡수한다.
궁수는 어떻게든 흑마력을 일으키고, 정신 집중을 해 보려 했지만 그것도 안 되자 오른손으로 칼날을 잡으려고 했다.
“야, 이.”
퍽!
나는 기가 막혀서 얼른 그 상대의 손목을 발로 밟아서 벽에다 눌러 버렸다.
이어서 손에 쥔 탐랑을 적의 머리에 겨누며 말했다.
“허튼수작 하지 마라.”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도를 생포했다?
적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기쁘다기보다는 착잡했다.
“지금 현존하는 엘프들 중에서 이런 초장거리 저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녀석은 없다. 1km 밖의 저격? 말이 안 되는데 2km를 넘는다고? 불가능하지.”
“…….”
“하지만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엘프 제일의 궁수.”
후드 아래에 드러난 턱선.
내가 언뜻 기억하는 것과 닮아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애당초 옥상에서 버틴 이유는 뭐냐? 저격이 실패했다면 이탈하는 게 기본 아닌가?”
“…….”
“나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냐? 그래서 엘프들을 쏘고, 내 옆에 붙어 있던 미레이를 노린 거 아니냐? 그리고 내가 날아올 걸 알면서도 기다린 거냐?”
당연하지만 정령무희 나비린이 훨씬 더 거물이다.
미레이가 마피아 두목 딸이라고 해 봐야 엘프들 사이에서 배분은 상대도 안 된다.
즉, 궁수가 미레이를 노린 건 내 옆에 있어서다.
“……미웠으니까요.”
“…….”
“당신 옆에서 웃고 떠드는 이들이 밉습니다, 폐하.”
귀에 익은 목소리.
궁수가 음울하게 말했다.
“저는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폐하의 곁을 맴도는군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타락한 녀석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만.”
나는 탐랑의 칼끝으로 후드를 벗어 넘겼다.
단아한 미모, 뾰족한 귀.
여자 엘프.
그리고 나와 함께 칠죄신에 맞섰던 전우이자 제국군 제일의 궁수로 이름을 날렸던 장군.
상장군 예렌이었다.
칠죄신과의 최종 결전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체를 찾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고.
예렌은 나한테 길을 열어 주고는 행방불명되었다.
그런데 100년을 넘어서, 이렇게 타락해서 나타난 것이다.
“어디 미용실에서 그렇게 염색해 주냐?”
내가 알던 예렌과 생긴 게 똑같지만 피부가 연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렌은 씁쓸하게 웃었다.
“섀도우엘프라고 하더군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예쁘네, 어울린다.”
“…….”
예렌은 수줍어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는 예전처럼 대화하고 있었지만,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예렌의 어깨를 칼로 꿰고, 다른 손은 발로 눌러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남은 칼을 그녀의 목에 댄 상황이다.
“제국은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단, 타락은 예외다. 너도 잘 알 텐데.”
“…….”
“미레이는 왜 노렸냐?”
“귀여워하시더군요. 저한테는 그런 장난을 한 번도 쳐 주시지 않았으면서요. 폐하께서 다른 장군의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엉덩이를 걷어차 주는 걸 제가 얼마나 시샘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셨죠?”
예렌은 간절하게 말했다.
타락하면 칠죄신에게 물들어서 미쳐 버린다.
그걸 감안해도 너무 앞뒤 없는 이야기다.
“세상에 하고많은 타락 이유가 있었지만 그게 이유냐?”
“물론 아닙니다. 이건 그냥 말씀드린 거고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1황후, 하시아 전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