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2)
뭍에 올라온 고기
내 여섯 번째 부인.
정령무희 나비린 카라카스.
엘프들 사이에서 공주님이라고 불리고, 본인도 공주처럼 사는 여자다.
나름대로 지략이 뛰어나지만 감정적인 게 단점이다.
“그래도 그렇지. 황후씩이나 되는 여자가 사람 다 듣는 데서 저러면 정치적인 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나비린의 주변 엘프들이 움직였다.
수영장의 손님들에게 다가간 마피아 놈들이 말로 위협하고, 때로는 돈을 건넨다.
제칼의 암흑가를 엘프 마피아가 지배하고 있다는 건 알려진 사실.
수영장 손님들이 슬슬 빠지기 시작했다.
“진짜 해 버리네.”
나비린이 이럴 거야 짐작은 했다.
그래서 저격의 위협을 고려하면서도 사람들을 놔뒀던 건데.
내 허벅지 위에 앙큼하게 앉은 미레이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물었다.
“특관님, 저 사람은 누구예요?”
“몰라. 모르는 여자야.”
“…….”
쿵! 쿵!
나비린은 화났다는 걸 과시하듯이, 일부러 발소리를 울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뭐 엘프답게 청력이 뛰어나니까 우리 대화를 다 들은 거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 정확히는 내 무릎 위에 앉은 미레이를 노려본다.
미레이는 깜짝 놀라서 내 가슴에 찰싹 붙었다.
“히이익! 저 사람이 엄청 무섭게 저 노려봐요! 특관님, 혹시 뭐 잘못하셨어요?”
“야, 너랑 내가 같이 있는데 누가 화내면 상식적으로 네 잘못 아니냐?”
“아, 그런가?”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미레이는 진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비린은 미레이를 보면서 쏘아붙였다.
“당장 떨어지지 못해요! 감히 누구 앞이라고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하는 거죠?”
“누구 앞이긴. 모처럼 쉬는 사람에게 갑자기 와서는 소리치는 여자 앞이지.”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나비린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겁먹어서 내 목을 끌어안은 미레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트, 특관님. 저 사람 울려고 해요. 어떻게 해요?”
“아냐, 안 울어. 제 딴에는 자존심이 센 분이라서 절대로 안 울어.”
“시, 시릭. 지금 나를 얼마나 모욕하려는 거죠? 아무리 나를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지 않나요?”
“너 지금 도리라고 했냐?”
내가 어이없어서 돌아보자 나비린은 정말 억울하단 얼굴이었다.
“당신의 망측한 짓을 보세요! 그게 어디 부끄러워서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나요? 적어도 숨어서 하려고 하셨어야죠!”
“특관님,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좀 사과하세요. 미안하잖아요.”
미레이는 여전히 눈치도 없게 이딴 소리를 했다.
막 화를 내려다가도 식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고, 어차피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 많지도 않잖아. 저격수에 대한 정보 확인이나 좀 하자.”
“…….”
“네가 아는 엘프 중에 없지? 그것만 말해.”
내가 사무적으로 묻자 나비린은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드릴게요.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그래, 역시 그러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돌아가.”
“……뭐라고요?”
나비린이 어이없어하는데, 그때 엘프 하나가 다가왔다.
나비린이 방해물이라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는데, 엘프는 얼른 말했다.
“공주님. 폴라리스 카지노에 조커즈 놈들이 쳐들어와서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토르랑을 데려가겠다고요? 그냥 놔두세요. 어차피 더 건질 것도 없는 조무래기니까.”
“하지만 내가 내놓으라고 했으면 온갖 조건을 붙였겠지?”
내가 비아냥거려도 나비린은 입을 다물었다.
심호흡을 거듭한 그녀는 갑자기 방긋 웃었다.
“토르랑의 딸 미레이, 저는 나비린 카라카스라고 한답니다. 당신이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정당한 부인이 됩니다. 그러니 예법을 안다면 좀 물러나겠어요?”
“에에엑? 특관님! 유부남이었어요!”
“미쳤냐. 난 애들은 있어도 부인은 없어. 죄다 사별했다.”
미레이의 반문에 나는 딱 잘라 말하고 이어서 나비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갑자기 여기서 시릭 카라카스를 왜 찾으시는데?”
“……랑에이의 직감과 이셀렌의 정보, 렌시엘의 이성적인 판단까지 고려해 봤을 때 당신이 정말로 시릭의 환생이라는 게 맞겠죠. 거기다가 지금 나에게 대놓고 빈정거리는 거나, 감정 있어 보이는 게, 꼭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네요.”
“저, 잘은 모르겠는데 일어날게요.”
미레이가 눈치를 보면서 내 무릎 위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손에 힘을 주어서 내 옆에 앉혀 버렸다.
“트, 특관님.”
“위험하니까 일단 내 옆에 있어.”
“……저 여자분이 그렇게 무서워요? 제가 편들어 드려요?”
“…….”
난 저격을 우려하는 거지만 그냥 착각하게 놔두자.
나비린은 미레이를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100년 사이에 여자 취향이 아주 나빠졌군요. 그런 천하고 바보 같은 여자가 마음에 드나요?”
“자칭 머리 좋은 니들보단 낫더라.”
“……당신 진짜 막 나가네요.”
“이제 와서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데, 내가 솔직하게 말해 줘?”
나는 돌아보면서 쏘아붙였다.
“너희들이 나라 말아먹은 건 능력에 한계 있었다고 치자. 권력이 탐나서 그딴 배신 때린 것도 기가 막히지만 일단 나중으로 미루자. 그래도 애는 제대로 키웠어야지.”
“……뭐라고요?”
“리세라의 눈. 너, 제정신으로 그랬냐?”
아, 올라오네.
내 넷째 딸 리세라는 하프엘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다.
그러니 엘프들은 결코 패권을 잡을 일이 없다.
그래서 엘프들은 리세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데 나비린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그 아이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제가 그 아이의 눈에 이상이 생기게 했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극구 나를 말리더라. 그래서 나도 좀 참아 보려고 했는데…….”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안 따질 수가 없네.
나는 이마를 누르고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법률적으로 우리들은 이제 남남이거든? 그래서 서로 모른 척하고 살려고 했는데도 참을 수가 없네. 아무리 그래도 애는 건드리지 말아야지.”
“누가 남이라는 거예요? 전 아니에요!”
“법률이 그래. 그러니까 우리 애는…….”
“……제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세요?”
나비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비린은 머리 좋고 우아한 공주님인 척하지만 상당히 감정적이고, 특히 나한테 무시당하는 걸 못 참았다.
그래도 뻔한 거짓말을 하는 바보는 아니다.
나비린이 비틀거리자 호위하는 엘프들이 얼른 달려와서는 부축했다.
반쯤 무너진 나비린이 더듬더듬 말했다.
“……다, 당신. 설마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제가, 제가 제 딸의…… 눈을 멀게 했다고요? 진심으로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뭔데?”
리세라의 눈이 멀어 버린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게 인위적인 인체 실험의 결과라는 것도 사실 아닌가?
“이제 와서 둘러대려고 하지 마. 이미 정황증거는 다 있거든?”
“너, 너무해요.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죠? 아무리 제가 미워도, 절 그런 나쁜 여자로 보고 있었어요?”
나비린은 주저앉아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는 척?
내가 가늠해 보려는데 옆에 앉은 미레이가 속삭였다.
“……저기, 특관님.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세요. 울잖아요.”
“넌 좀 빠져 있어.”
“당신은 빠져 있어요! 조금 있다가 발가락을 싹 다 짓이겨 버릴 테니까!”
나비린은 우는 중에도 버럭 소리쳤다.
미레이가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리자, 나는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 너무해. 너무해요. 너무해요.”
그러자 그걸 본 나비린은 와앙, 하면서 서럽게도 울음을 터트렸다.
나비린을 따라온 엘프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수영장의 손님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직후라는 거다.
“아니, 그러면 뭔데.”
“말 안 할 거예요. 그래요. 제가 나쁜 년이네요. 제가 다 나빠요! 예! 당신만 계속 바라보고 살았던……. 어디다 손을 올리죠!”
나비린은 울다가 내 어깨에 턱을 괸 미레이에게 호통을 쳤다.
미레이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이거 손이 아니라 턱인데요?”
“앞으로 음식물을 제대로 못 씹게 만들어 드리도록 하죠.”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 거라면 돌아가. 슬슬 위험해진다.”
“……예?”
나비린은 울다 말고 멍해졌다.
나는 혀를 찼다.
“2km 밖에서 저격하는 황당한 능력자가 왜 마피아만 골라 죽이고 있겠냐? 너 잡으려고 꾀어낸 거야.”
“그게 무슨…….”
“제칼의 뒷골목을 주름잡는다는 엘프 마피아들도, 결국 네 수족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걸 팍팍 쏴 죽이면 네가 올 거라고 계산한 거지.”
나비린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도 생각에 잠겼다.
“절 이제 와 노린다고 해서 무엇을…… 아니, 잠깐만요.”
“…….”
나비린은 짚이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두어 번 훔치고는 무릎을 꿇고 바르게 앉았다.
그러더니 주변에 있는 호위들을 돌아보고는 정색했다.
“지금부터 제 바깥어른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변을 각별하게 경계하세요.”
“예, 공주님!”
엘프들이 흩어지자 나비린은 다소곳하게 말했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노여움은 잠시만 미뤄 주시고 귀를 열어 주셨으면 한답니다.”
“듣고 있으니까 말해 봐.”
나비린이 갑자기 예의를 차리는 까닭.
실무적이고 공식적인 이야기를 하잔 의미다.
“먼저 말해 두지만 리세라의 건강은 절대로 제가 해친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반대라고?”
“……저는 리세라를 치료하려고 했답니다.”
“말장난하면 진짜 화낸다? 하프엘프의 종족적 특성을 치료하려고…….”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나비린은 고개를 다시금 가로저었다.
“리세라는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악화를 멈추려고 온갖 수단을 다한 겁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살아 있을 적만 해도 리세라는 건강했어.”
“당시에는 그랬지만 이후는 다르답니다. 그 아이는 폐하와 저의 아이, 특별한 혈통이랍니다.”
“…….”
진짜인가?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비린은 거듭 말했다.
“돌이켜 보니 폐하께서 크게 오해하실 만하지만 제가 어찌 딸이 다치는 일을 하겠습니까? 폐하는 제가 그리 모진 여자라고 생각하셨답니까?”
“…….”
응……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니다.
나비린은 머리 좋고 냉정한 척하지만 상당히 감정적인 여자였다.
내가 무시 좀 하면 발끈하고, 화내고, 제풀에 못 이겨서 울음을 터트린다.
비록 해결 방식이 과격하고 좀 막 나갈 때도 있지만, 본성이 악하진 않다.
“그래서 리세라는 그냥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고, 너는 그걸 치료하려고 한 거다?”
“이야기는 길어집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정말로 오해입니다. 일단 지금은 저를 믿어 주셔야 한답니다.”
“……일단 그렇다고 치자. 요점이 뭔데?”
“제가 엘프들 사이에서 공주님이라고 불리면서 특별하게 취급받는 이유는 폐하께서도 어느 정도 아실 겁니다.”
“정령과 엘프들을 이어 주시니까요.”
미레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와의 대화를 방해받은 나비린이 발끈했지만…… 그래도 무시할 모양이었다.
나비린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폐하, 그 정령의 균형이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바람의 정령마술을 쓴다고 쳐도 2km 밖의 저격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멈칫.
나비린은 말하다가 기겁하고는, 나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폐하!”
“…….”
내가 움찔한 순간.
퍽!
피가 튀었다.
저격.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서 날아온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