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51)
이상한 게 낚이네
초저녁.
나는 호텔의 실외 수영장에서 쉬고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가장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담그고 있다.
제칼은 카지노와 술집이 전부가 아니다.
각종 쇼와 공연이 풍성해서 여가를 즐기기 좋은 도시.
다양한 종족, 가족 단위로 온 손님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저기 웃음소리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야지.”
이 평화로운 광경을 만들려고 나와 전우들이 그토록 피를 흘리지 않았던가.
이래야 싸운 보람이 있지.
내가 여가를 만끽하는데 옆에 엘프 여자가 앉았다.
옆구리를 훤히 드러낸 수영복, 조커즈의 브레인인 쉔카였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요?”
“저격에는 한계가 있어. 정령마술이니 쏘고 난 직후에 어느 정도 궤도 수정이 가능하지만 자유비행은 아니고.”
나는 미레이와 데이트를 하는 척하면서, 그동안 저격이 벌어졌던 장소들을 둘러보았다.
“이 수영장은 후방과 좌측은 호텔 건물로 막혀 있지. 전방은 딱히 높은 건물이 없고. 남은 건 우측이다. 저격에 용이한 건물을 세 군데로 추렸고, 거길 애들에게 감시시켰고.”
“포인트를 알아내면 어쩌시려고요?”
“아서라, 너희들은 상대 못 해. 내가 처리한다. 카지노 습격 준비나 다시 점검해 둬.”
계획대로라면 정령무희가 애들을 이끌고 카지노를 나올 거다.
그러면 오르카와 세탄이 조커즈 애들을 앞세워서 토르랑을 구해 낸다.
애들에게 시가전, 혼전 경험을 쌓게 하는 용도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이 수영장에서 저격이 벌어질 확률이 아주 높고.
자식을 위험에서 떨어트려 놔야지.
또 정령무희가 오면 한바탕 푸닥거리를 치를 텐데, 애들이 안 보는 게 낫다.
쉔카가 의아하게 말했다.
“……저격 포인트를 짚으시는 걸 보니 처음부터 그걸 생각하고 호텔을 고르신 것 같군요.”
“당연하지. 아무 생각 없이 골랐겠냐?”
“으음, 젊은 인간이신데 판단력이 정말 놀라워서요. 정말 황제 폐하의 환생이신 모양이로군요.”
“아부는 됐고. 너희들도 짚이는 바가 없다 이거지? 엘프들 중에서 바람의 정령마술을 이 정도로 익힌 이는 없다?”
쉔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의 패밀리가 폐쇄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몇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입니다. 1km 밖의 저격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 2km 되는 건 금시초문입니다.”
“그러면 엘프 역사에서 최장거리 저격은…….”
“제국군의 예렌 상장군이시죠. 풍설에 따르면 그분은 990m에서 적의 심장을 맞히셨다고 하더군요.”
1.2km였고 왼쪽 눈이었다.
내가 옆에서 봐서 안다.
쉔카가 의아하게 말했다.
“하지만 예렌 상장군은 칠죄신과의 최종 결전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제자를 키우셨던 걸까요?”
“됐고, 너희들 목숨이나 잘 챙겨라. 저격수는 계속 엘프만 노리고 있었으니까. 애들 노는 척하면서 엄폐물 근처에서만 서성이라고 해.”
조커즈의 간부, 부하들이 지금 이 수영장 여기저기에 섞여 있었다.
쉔카가 깜짝 놀랐다.
“……저희들 목숨을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제국군 신병이잖아? 당연히 걱정하지.”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범죄자, 무법자를 좋게 안 보지.
하지만 나는 황제고, 범법자들도 국민이다.
이들을 어떻게 잘 굴려서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게 할까, 또 국민이 탈선하는 일을 줄일 수 있을까 고려해야지.
쉔카는 당황해서는 말했다.
“저희들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호불호로 세상을 가늠하지는 않아. 너희들의 그 폐쇄적인 패밀리 짓이 전통이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시대는 변해 가고 있다.”
나는 저 멀리 가고 있는 마족 아이, 그 손을 잡은 마족과 인간을 바라보았다.
“천년제국의 이름 아래 모든 종족이 하나가 되는 세상이 왔다. 너희들은 고작 100년이라고 얕보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이게 당연한 세상이 된다. 거기서 엘프들만 따로 놀면 갈수록 큰일일 거다.”
“으음.”
“정령무희가 6황후로 밀려나고, 엘프들이 천년제국에서 입지가 좁은 이유가 바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기 때문이야.”
쉔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새겨들을 말씀이로군요.”
“아, 새기지 마. 그냥 신병교육 시키는 중이니까. 제국군에 들어가면 너는 그냥 이병이고, 네 위에 온갖 종족들이 험담하면서 굴려 댈 거다. 마피아 두뇌였다는 자존심은 미리 버려 두라고.”
“……음, 예.”
쉔카는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이레인 아가씨와는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미레이 말이지?”
나는 한숨을 쉬고는 가리켰다.
미레이는 풀에서 배영을 하고 있었다.
솜씨가 아주 뛰어나긴 한데…….
“너 같으면 저런 바보랑 사귈 마음이 들겠냐?”
“제가 뭐가 어때서요!”
엘프답게 청력이 뛰어난 미레이는 바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다리 옆, 수영장 턱을 손으로 짚은 미레이가 투덜거렸다.
“특관님은 왜 맨날 저만 미워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 열심히 하잖아요!”
“그 귀는 대체 뭔데?”
미레이는 바니걸 슈트가 떠오르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방수 처리 된 토끼 귀까지 달고.
세상에 하고많은 수영복이 있지만 바니걸 수영복은 좀 아니지.
미레이는 도리어 어이없어했다.
“무슨 소리예요. 바보처럼 보여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일부러 바보짓 하고 있는 건데요? 안 어울려요?”
“황후가 출발했다니 작전 끝났다. 그리고 넌 누가 봐도 바보니까 굳이 추가할 필요 없어.”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미레이는 토끼 귀를 벗더니만 내게 대뜸 씌워 버렸다.
내가 어이없어서 바라보자…… 미레이는 빙긋 웃었다.
“히히, 특관님. 어울려요.”
“하하하, 그래?”
나는 웃으면서 미레이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서 물에 담가 버렸다.
버둥버둥!
미레이가 허우적거리자 나는 조금 뒤에 풀어 주었다.
그냥 가벼운 장난이다.
“어푸! 어푸! 물 먹을 뻔했잖아요! 너무하세요!”
“네가 자꾸 기어올라서 그런다. 자꾸 까먹고 있는데, 내가 너보다 4계급은 위거든?”
“그래서 특관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잖아요!”
“하하하, 두 분 다 잘 어울리시네요.”
쉔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요즘 마피아들은 나사 빠진 소리만 하는 게 유행인가?”
“음, 글쎄요. 아무튼 공주님이 이리로 오신다니 저는 경비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쉔카는 일어나면서 미레이에게 윙크했다.
잘해 보라고.
그러자 미레이도 얼른 마주 윙크했다.
“……이 화상아.”
그리고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쉔카는 미레이보고 나랑 뭐 잘해 보라고 피해 준 건데, 정작 미레이는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 안쓰러움은 나의 몫이지? 누군가는 미레이를 부담해야 해서?”
“왜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세요.”
미레이는 풀에 어깨까지 담근 채로 눈을 흘겼다.
내가 한심하게 봐도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흘끔거린다.
“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마.”
“……안 물어보세요?”
“케이크를 그렇게도 먹어도 배가 안 나오는 비법 같은 거?”
하지만 미레이는 평소처럼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첨벙첨벙.
다리로는 물장구를 치면서 내 눈치만 본다.
얼굴 하나는 예쁜 녀석이라서 이러면 불쌍해진다.
“네 본명이 이레인인 거?”
“……그거 말고 이것저것요. 사실 특관님이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아서 좀 놀랐어요.”
“마피아 두목 딸인 네가 아버지랑 절연하고 철도헌병대원이 된 사연 같은 거?”
“……예, 뭐.”
미레이는 흘끔흘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 보자. 그럼 위장 신분으로 철도헌병대에 들어갔으니 지금까지 네 모든 경력은 무효에 해고 조치인가?”
“진짜요!”
미레이가 울상이 되었다.
내 허벅지를 붙잡으려고 하기에 나는 손으로 잡고는 말했다.
“뭐 무조건 해고는 아니고. 보통 심사를 거치지. 하지만 뭐, 마피아 딸은 좀 치명적이지? 네가 헌병대 내부 정보를 빼돌리지 않았다는 확증은 없으니까.”
“아, 아닌데요! 저 집안하고 연 끊었어요!”
“누가 그걸 믿겠어?”
내가 농담 삼아서 말하는데 미레이는 정말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닌데에. 히이잉.”
“야, 야. 야.”
“으아아앙.”
다 큰 애가 갑자기 서럽게도 울자 나는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족 단위로 놀던 수영장 손님들이 나와 미레이를 보고는 혀를 차고 있었다.
“저 인간 놈 봐라.”
“아이고, 얼굴은 여자처럼 생긴 놈이. 엘프 여자를 울리고 있네.”
“찰스, 저런 거 보지 마라. 물든다.”
……순식간에 내가 나쁜 놈이 됐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미레이를 달랬다.
“야, 야.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
“아니라고요. 히이잉.”
“알았다니까. 뚝!”
“…….”
“뚝!”
미레이는 큰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특관님도 저 못 믿으세요? 제가 마피아 딸이라고 나쁜 짓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보통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으아앙!”
음.
너무 정직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또 울렸네.
나는 얼른 미레이 어깨를 두드리면서 달랬다.
“야, 야, 그만 울어. 그만 좀. 난 믿는다니까.”
“……진짜요? 진짜요?”
미레이는 펑펑 울면서 내 허벅지를 잡고 흔들었다.
“특관님은 저 믿어 주시는 거죠? 저 아닌 거 아시죠?”
“…….”
큰일인데.
더 놀리고 싶어진다.
……그러면 더 울 거라는 걸 아는데, 왠지 그래!
나는 애써 참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믿을 테니까 얼굴이나 닦아.”
“진짜 믿어 주시는 거죠?”
미레이는 수영장 물을 떠다가 뺨을 닦았다.
“…….”
예쁜 여자 엘프가 서럽게 울면서 자기 믿어 달라고 하면 안쓰럽고 마음이 흔들려야 하는데.
……미레이는 그냥 바보 같아 보여.
“내가 너무 비정하냐고? ……하지만 수영장 물로 세수하잖아.”
“예? 깨끗한 물 아니었어요?”
“……됐다. 됐어.”
나는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미레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부하를 달래는 기분으로.
“네가 지금까지 열심히 해 온 걸 헌병대장 아르센이 알고, 나도 안다. 이제 와 네 과거와 출신을 갖고 문제 삼지는 않을 거다. 그러기에는 네가 해낸 일, 성과가 너무나 눈부시니까.”
“…….”
“그러니까 집안이 어쨌건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자부심을 가져라. 너는 자랑스러운 내 부하니까.”
사실 문제기는 하다.
헌병대에 가명을 대고, 출신 성분을 숨기고 들어오다니.
오드벨이 싸잡은 대로, 엘프들은 이래저래 범죄 조직인 패밀리와 연루된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미레이가 한 일을 사문회가 열릴 만하지.
“근데 애가 좀 바보 같아야지…….”
“히이잉. 또 바보래.”
“바보라서 다행이야. 네 경력 무효는 없으니까 안심해.”
뭐 아르센도 알 거고.
내가 덮어 두라고 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다.
“애당초 이름이 이레인이 뭐야. 정갈한 아가씨 같잖아. 너랑 안 어울려.”
“어느 쪽이건 애칭은 레이라고요. 그런데 특관님은 절대 저를 애칭으로 안 불러 주시잖아요.”
“히이익.”
미레이의 요구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엘프를 애칭으로 부르는 건 부모 자식, 애인도 아주 농밀한 사이에서나 하는 거다.
미레이를 애칭으로 부르느니 그냥 수영장에서 익사하고 말지!
미레이는 뾰족하게 말했다.
“특관님도 그렇게 예쁜 얼굴로 시릭이라니, 안 어울린다고요.”
“…….”
그러고 보니 미레이도 내가 시릭의 환생이라는 걸 아나?
딱히 대놓고 말한 적 없지만, 세탄이나 오르카가 날 대하는 걸 보면 알 텐데?
정작 미레이는 나를 꼬박꼬박 특관이라고만 부르지, 진짜 하나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미레이, 내가 누구냐?”
“헌병대 특관님이시잖아요.”
“……남들이 날 2대 황제 후보라고 부르지 않디?”
“특관 관두실 거예요?”
미레이는 어쩐지 아쉬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아름다운 오렌지색 머리카락의 엘프 여자가, 물에 어깨까지 담그고는 나를 애처롭게 올려다본다.
방금 어린애처럼 울어 댄 흔적인지, 예쁜 눈 끄트머리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내려오는 달빛에 비친 그 이슬에…….
“마음이 설레느니 빠져 죽고 말지…….”
“예? 무슨 소리세요?”
“내 허벅지 좀 놓으라고. 남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미레이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싫어요. 계속 절 울리고, 놀리기만 하시고. 경력 없애 버릴 거라고 겁만 주시고.”
“…….”
널 감싸 주려는 건데?
괜히 설명하기 귀찮아진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케이크 하나 사 줄게. 됐지?”
“……맨날 말로만 그러시고 진짜 사 주시지도 않고.”
“아, 알았어. 지금 사 오라고 할게.”
내가 멀리 떨어진 마피아 애들을 부르려고 하자 미레이는 도리질을 쳤다.
“그런 건 싫어요. 싫다고요.”
“아, 왜. 뭐. 또.”
대인 관계 파탄 내기 4단 콤보!
어지간하면 정떨어지는 연타인데도 미레이는 내 허벅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맨날 나만 먹고 특관님은 안 드시잖아요. 같이 먹어요.”
“너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
“저도 특관님이 먹는 거 보고 싶단 말이에요. 예?”
미레이가 내 허벅지를 흔들면서 칭얼거렸다.
오늘따라 얘가 적극적으로 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바보 같은 애지만 그만큼 사심이 없고 순수하다.
“알았어. 먹자. 먹어. 됐지?”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그래, 알았다니까.”
내가 적당히 대답하려는데, 미레이는 손바닥으로 풀장의 턱을 치고는 단숨에 뛰어올랐다.
돌고래처럼 물 밖으로 뛰어 올라온 미레이는 냉큼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막 뛰어나온 싱싱한 인어 아가씨처럼.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에 남자라면 누구나 설렐…….
“아싸!”
“…….”
……수가 없지.
분위기 깨는 소리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주먹을 불끈 쥔 미레이는 재차 다짐을 놓았다.
“약속하신 거예요? 같이 먹는 거예요?”
“그래 줄 테니까 좀 비켜. 무겁다니…….”
“시릭 카라카스!”
날카로운 목소리.
숫제 비명처럼 들려서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돌아보았다.
내가 초대 황제의 환생이라는 소문이 솔솔 흐른다지만 이건 좀…….
“…….”
부들부들.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미레이를 노려보는 여자가 보였다.
핏줄까지 비칠 정도로 창백한 피부.
가녀린 미모에는 지금 격렬한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당장 떨어지지 못하겠어!”
6황후.
정령무희 나비린이 그물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