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8)
아무튼 아들 말이 맞다
환락도시 제칼.
제국에서 제일가는 유흥시설들이 모인 곳이다.
제국에서는 합법인 카지노를 비롯해서 각종 공연, 쇼, 술.
황도의 관광을 마친 제국민들이 꼭 들르는 도시였다.
그만큼 매일 막대한 돈이 오간다.
카지노는 국가사업이지만 주변의 위락시설을 비롯해서 온갖 이권을 노릴 수 있다.
그걸 노리고 제칼에 둥지를 튼 게 바로 시골 마피아, 엘프들이었다.
“마피아 놈들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장악했네? 다른 애들이 안 막았어?”
호텔 방에 짐을 푼 내가 물었다.
둘째 아들 오르카가 대답했다.
“그야 6황후 전하께서 유흥을 담당하기로 하셨으니까요.”
“엘프와 유흥?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내가 죽고 나서 황후들은 각자 영역을 맡아서 관리했다.
그런데 6황후, 정령무희는 카지노와 경마, 복권을 비롯한 각종 도박 이권 사업을 도맡았다.
오르카가 말했다.
“관리 안 하고 놔두면 엉망이 될 테니까요. 괜한 날파리들이 꼬이지 않게 관리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겠죠.”
“그냥 정식 직원으로 고용하면 되잖아? 왜 굳이 자기 종족 마피아들에게 외주를 떼어 줬지?”
“그야 엘프들은 보통 정령수에서 살지만, 자기들도 세상 소식에 어둡다는 건 아니까요. 그래서 각 도시마다 패밀리라는 범죄 조직을 만들어서 굴리고 있죠. 원래도 폐쇄적인 엘프들이 특히 더 폐쇄적인…….”
“엘프들의 패밀리 놀음이야 이미 알아.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너 묘하게 말을 돌린다?”
오르카는 입을 다물었다.
아는 게 있는 눈치.
나는 어림짐작으로 찔러보았다.
“6황후가 제칼을 장악한 건 그다지 선한 의도가 아니다? 새삼스럽게 삥땅이라도 치고 있다?”
오르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나랏돈은 함부로 쓰면 걸립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오가는 검은돈, 특히 현금은 탈세하기가 좋으니까요. 국가 재정을 담당하시던 5황후 전하와 충돌할 일도 없죠.”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사실 증거도 없고…… 있어도 아버지에게 말하기는 좀 그래요. 가족 험담하는 게 되잖아요.”
아, 까먹고 있었는데 엘프와 다크엘프는 서로 사이가 나쁘다.
나는 내친김에 물어보았다.
“6황후랑 렌시엘하고 사이가 나쁘던가?”
“으음, 자꾸 대답하기 곤란한 말씀만 하시네요, 아버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부자지간은 맞지만 지금은 작전행동 중이다. 마음에 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라.”
“……서로 사이좋은 황후분들은 하나도 없죠? 랑에이 어머니랑 엔라 어머니는 떠돌아다니셨고, 렌시엘 어머니만 혼자서 황성을 지키셨죠. 유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을 거의 만나지 않으셨고요. 제 어머니야 원래 공식 석상에 잘 안 나오시는 분이고요.”
“…….”
새삼스럽지만 산산조각 났군.
오르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는, 다들 인사 정도는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합석도 안 하실 정도까지 악화됐어요.”
“그래도 렌시엘하고 이셀렌은…….”
“그 두 분이 각별한 사이라는 건 저도 몰랐고요. 어머니들이 서로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외려 신기해서…….”
말하던 오르카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신경 안 쓰니까 편하게 말해라.”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바뀐 거예요. 우리 집은 아버지가 있어 주셔야 합니다. 어머니는 물론, 우리들도 예전처럼 서로 웃고 떠들었잖아요?”
오르카는 웃으면서 말했다.
“형이랑 누님들하고 같이 밤새 떠들다가 자는 거, 정말 오랜만이었고,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어 주신 덕분이에요.”
“그래, 나도 행복했다. 이번 일 끝나고 또 같이 쉬자.”
“아버지가 돌아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르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있어 주시면 안 됩니까?”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들은 한바탕 크게 싸우셨어요. 아는 사람은 정말 적은 이야기고, 당시에 뭐 때문에 다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르카는 나직하게 말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권력 다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전의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요.”
“…….”
“아, 어머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이러는 건 아니고요. 어머니는 오히려 저에게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고요.”
오르카가 화들짝 놀라서 일렀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카도 이제 어엿한 성인, 자기 머리로 판단하고 이러는 거다.
“그래, 안다.”
“……아무튼 아버지가 있어 주시면 제국은 물론이고 우리 집도 전부 다 괜찮아질 것 같아요. 물론 아버지가 화가 나시고 어머니들 안 보시는 건 너무 당연한데, 아니, 그게…… 염치없는 건 압니다만.”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안다. 그래도 지금은 뭐라 할 수 없구나.”
내가 매듭을 짓자 오르카는 아쉬워하다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아, 아닙니다. 아버지도 마음이 힘드실 텐데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고맙다.”
내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오르카는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짓궂게 웃었다.
“그래서 마음에 둔 아가씨랑은 잘 돼 가냐?”
“……그거 유언비어예요.”
“그래? 그러면 세탄에게 물어볼…….”
“으아아아!”
오르카가 허둥지둥 날 붙들려는 걸 피하는데, 문이 열렷다.
잠시 호텔을 둘러보겠다고 나갔던 장남 세탄 그리고 미레이였다.
“음? 아버지, 그건 무슨 놀이입니까?”
“오르카의 첫사랑 맞히기 놀이?”
“그게 놀이가 됩니까? 이미 다 아는…….”
“아아아악!”
오르카가 비명을 질러서 멈췄다.
미레이가 깜짝 놀라서 귀를 틀어막았다.
아, 쟤도 엘프지.
한데…… 미레이의 복장이 묘했다.
평소의 헌병대 복장이 아니다.
도발적인 빨강 바니걸 슈트에다가 백의를 걸쳤다.
내가 어이없이 보는데, 외려 미레이가 나를 어이없이 보았다.
“특관님, 왜 그렇게 점잖게 입고 계세요?”
“어? 뭐가…….”
“일단 단추 두 개는 푸셔야죠. 이리 오세요.”
미레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옷을 벗기려고 하자 나는 놀라서 물러났다.
미레이는 더 이상하단 얼굴을 했다.
“설마, 그렇게 입고 밖에 정찰 나가시려고요? 다 들켜요.”
“……이상하다? 미레이가 정상인처럼 말하고 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그냥 호텔 방에 계속 계실 거예요?”
“아, 아니. 그럼 어떻게 하라고?”
미레이는 새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일단 재킷은 벗으세요. 좀 알록달록한 남방을 입으시고요. 그리고 신발도 부츠는 벗으시고…….”
미레이는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상의를 벗기고 입혔다.
어어어어, 하는 사이에 변신 완료.
거울을 보니 촌스러운 빨강 남방, 주머니에는 선글라스를 끼우고, 목에는 아주 싸구려 티 나는 금목걸이.
칠성칠요 세 자루는 바지 벨트에 진짜 아무렇게나 꽂혀 있고.
바지는 적당히 접었고 신발은 샌들이다.
“……와, 진짜 동네 바보 양아치네.”
“특관님은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냥 다니시면 안 되고요.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세요.”
“선글라스를 두 개나 갖고 다니는 바보가 되라고?”
“동네 바보로 보여야 하는 거잖아요. 어서요.”
“…….”
미레이가 갑자기 맞는 말만 계속하니까 뭐라고 할 수가 없네.
거울을 보니…… 세상에 이런 촌놈이 또 없었다.
미레이에게 당한 느낌이라 나는 한마디 했다.
“야, 나는 이렇게 입었는데 넌 왜 멀쩡한 바니걸인데?”
“무슨 소리세요. 위에 재킷 하나 입었잖아요.”
“그게 왜?”
“바니걸 입고 정작 몸매에 자신이 없어서 가린 촌년이잖아요. 모르세요?”
“…….”
세상에.
미레이가 논리적이야!
내가 뜨악해서 바라보는데 정작 미레이는 그다지 들뜬 얼굴이 아니었다.
평소에 바보처럼 밝고, 케이크만 퍼먹는 애가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오기 싫었냐?”
“……아뇨, 이것도 헌병대원으로서의 임무인데요.”
“아니, 그냥 관둬도 되는데. 생각해 보니 이거 철도헌병대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특관님 옆에서 제가 보좌해야죠.”
미레이는 빙긋 웃었다.
“특관님이 못 하시는 것도 있네요. 오늘은 제가 도움이 되죠?”
“…….”
오늘따라 세상에를 많이 외치네.
하지만 미레이가 아름다워 보이잖아.
세상에.
그때 세탄이 문득 말했다.
“두 분이서 사귀시는 사이입니까?”
“야, 넌 어떻게 그럼 모함을…….”
“아닌데요. 전 지금 특관님의 작전을 보조하는 중이에요.”
아, 어색해.
미레이가 차분하고 정상적으로 구니까 이상해!
“……케이크 먹을까, 미레이?”
“음, 사 주시게요?”
“그래, 이거 다 끝나면 사 줄게.”
그제야 미레이는 빙긋 웃었다.
“잘 먹을게요!”
“…….”
이제야 좀 마음이 풀리네.
늘 바보 같던 애가 침착하니까 나까지 불안하잖아.
세탄이 말했다.
“그나저나 아버지, 갑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중앙군의 병력을 증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오기 전에 동부대장군님에게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국민을 징병하자고?”
“예, 반란군을 누르려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중앙군의 머릿수가 크게 늘어나면 반란군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음, 아니, 그건 좀 나중에 해야겠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탄이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얼굴이자 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번 일에 내 장남인 세탄, 차남인 오르카를 데려온 건 가르치려는 목적도 있었다.
“첫째, 일단 지금 민심이 너무 어지럽다. 이럴 때 강제 동원, 징병을 하면 민심이 더 동요하고 반발하게 된다.”
“하지만 국민들은 제국군을 훌륭하게 우러러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건 칠죄신과 정면 승부를 걸었다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징병령을 내렸는데 국민들이 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강제집행 할 수밖에 없는데, 자칫하면 국가 분열이 가속화된다. 제국은 다종족 국가, 다들 문화와 사고방식이 달라.”
“음.”
세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다시 이유를 댔다.
“그리고 일반적인 반란이라면 몰라도, 엔라가 일으킨 반란은 매우 특수하다. 엔라는 서부군을 몰래, 오랜 시간 장악했을 거다. 사상적인 대의명분도 확고하게 심어 놨을걸. 우리 쪽 병력이 많아진다고 흩어질 개미 새끼들이 아닐 거다.”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병력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외람되지만…….”
“내가 있을 시절보다 제국군이 약해졌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따라서 칠죄신과 맞섰던 전우들, 인간들은 100년 뒤인 지금은 없다.
오래 사는 이종족들이야 살아 있지만 상당수가 전역했다.
“무엇보다 병력의 질이 떨어지지. 제국은 100년의 평화, 제대로 된 실전을 겪은 지도 다들 오래됐으니까. 소규모 난리나 도적 떼를 소탕하는 게 고작이었고…….”
또 카라카스에서 마력이 늘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투 경험이다.
군대도 마찬가지, 그런데 100년 동안 실전이 없었다.
제국군 안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자가 예전보다 확 줄어들었지.
내가 정리했다.
“그래, 제국군의 수준이 낮아진 건 사실이고 조만간 징병도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최대한 모병해 보려고. 일단 위치헬에 있던 칼잡이들 상당수도 중앙군에 알아서 들어왔고.”
제국군에 들어오면 새 칼을 빨리 받을 수 있단 소식에 자원입대자가 2천 명을 넘었다.
“그리고 기왕 온 김에 여기서도 입대 지원자를 찾아보려고.”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 두고 이번 임무에 임하겠습니다.”
세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지만 이해가 빨라 쏙쏙 흡수하네!
세탄과 오르카가 나란히 말했다.
“그럼 저도 변장을 마치고 거리로 나가기로 하죠. 제칼의 각종 시설은 오후부터 붐비니까 지금은 일단 지리 파악부터 해 두겠습니다. 또 전역자 클럽들이 있을 테니 분위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크엘프 요원들과 잠시 정보를 교환하고 합류하겠습니다.”
“그래, 둘 다 몸조심해라. 안전이 최우선이다.”
내가 싱글벙글 웃는데 미레이가 불쑥 물었다.
“아, 근데 특관님. 저희 아버지 만나러 오신 거죠?”
오드벨이 저지른 일.
나는 지금 미레이의 남편감(!) 행세를 해야 한다.
미레이가 제칼을 장악한 두 마피아 중 하나, 조커즈 두목의 딸이라니 뭐.
당연히 결혼 생각은 없고, 그냥 정보를 털어 내고 협력받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 하지만 당장 만나는 건 좀 아니지. 일단 지역 정보를 좀 더 파악한 다음에, 카드를 충분히 갖고…….”
“예? 그래야 하는 거였어요?”
“…….”
미레이가 갸웃거렸다.
불안하네.
내가 시선으로 묻자 미레이가 말했다.
“그냥 아빠에게 연락했는데요.”
“……그래, 네가 왜 오늘따라 똑 부러지나 했다.”
쾅쾅쾅!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달그락! 달그락!
문을 억지로 돌리는 소리.
누가 들어도 호텔 직원은 아니다.
불청객.
나와 세탄, 오르카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세탄이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작전을 변경해야지? 일단 주도권은 내주면 안 된다. 애당초 저 밖의 놈들이 조커즈인지, 스텔라인지 우린 모르잖아.”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미레이 아가씨를 감추고, 제가 돌려보내겠습니다. 저는 다크엘프니까, 엘프 놈들이 무턱대고 강짜를 부리지는 못할 겁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찾아온 적을 때려눕힌 다음에 우위를 확보해야죠. 적극적인 역습을 가하는 게 맞습니다.”
“형님, 아직 상황 파악도 안 됐는데 사고를 치면 이목이 쏠릴 겁니다.”
“정부 기관에 들러붙어서 이권을 탐하면서 마피아입네, 하는 놈들에게 숙이고 들어가면 일이 늦어진다. 아버지는 이런 곳에서 지체하실 분이 아니야.”
어라.
장남과 차남이 서로를 바라본다.
“형님, 이건 정보전입니다. 이런 건 제가 많이 해 봤습니다.”
“오르카, 이건 전쟁이다. 약하게 보이면 아무것도 안 돼.”
서로 대립하는 형제.
내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자, 둘 다 진정해. 양쪽 다 일장일단이 있다.”
“아버지는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입니까, 오르카입니까?”
“…….”
어.
이거 두 아들의 자존심 싸움인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 신하들도 이렇게 의견이 부딪치면, 서로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내게 요청했지.
이런 경우, 섬세한 디테일이 중요하다.
“일단 둘 다 생각부터 해 봐라. 저들이 왜 대뜸 문을 안 부수고 들어오겠냐? 이 호텔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콰앙!
그때 문이 박살 났다.
기세등등하게 들어오는 양복 입은 엘프 놈들.
어깨에 힘을 딱 준 다섯 놈이 험상궂게 우리들을 본다.
“…….”
오르카와 세탄이 나란히 나를 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너희 둘 중에서 많이 때려눕히는 놈이 옳다.”
아, 아버지 존심 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