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6)
환생하길 잘했다
카미르의 말.
나는 내가 들은 걸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저는 칠죄신을 압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카미르가 말하는 건 다른 의미다.
그녀는 마녀 원로회의 수장, 2천 년은 족히 살아왔으니까.
“제가 어린 시절에 칠죄신이 마녀들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녀들은 일종의 실험, 아주 잔인한 실험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해야 했습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하시아나 유하, 그리고 다른 황후들도 모르실 겁니다.”
“…….”
“마녀들이 많이 희생된 그 실험 덕분에 발푸르기스는 다소의 자치권을 허용받았습니다만. 아무튼 그때의 실험은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
카미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임산부가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치더라도, 태아는 예외입니다.”
“칠죄신은 사람의 영혼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오로지 자발적으로 바친 것만 가능하다?”
“예, 그렇습니다. 설사 하시아가 타락했어도 황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물리치신 마지막 몸은 황녀 전하일 수가 없습니다.”
“…….”
최종 결전에서 내가 베었던 칠죄신의 몸은 내 딸아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긴장이 확 풀린다.
카미르는 얼른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아, 음, 으음.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카미르는 내 등을 툭, 툭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한숨을 길게 토했다.
“예, 으음. 하,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잖습니까?”
적어도 내 딸의 영혼까지 칠죄신의 손에 넘어간 건 아니다.
하지만 칠죄신은 물리력을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과 일곱 이종족, 그리고 칠죄신의 종복들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차별점이 있습니다.”
“2세 생산, 아니,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느냐죠. 이건 육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의 이야기입니다. 육체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어도, 환생을 거치면 생명을 이어 가는 게 가능한 영혼, 그게 바로 인간과 일곱 이종족이라고 들었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스승님에게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칠죄신의 종복들, 타락한 이들은 생명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
“예. 그리고 우리 마녀들은 좀 독특합니다. 우리 마녀들은 여자로만 이루어진 이들, 자식을 낳는다면 반드시 딸이 나오죠. 그러니 필연적으로 다른 종족의 남성을 배우자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족의 여자들이 마녀들을 동네 총각 뺏어 간다고 경원한다고…… 죄송합니다. 좀 경우가 없었군요.”
“아니에요. 맞는 이야기고 재미있는 소리인걸요.”
평소 하던 식으로 농담해 버렸다.
막 들은 희망찬 소식, 기대감에 내 마음이 더없이 들뜨고 있으니까.
카미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마녀들에게 계보도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가계도 말입니까?”
“좀 다릅니다. 이건 원로회에서도 일부만이 아는 것, 하시아나 유하도 모를 겁니다.”
카미르는 마력을 불러일으키더니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마력현상?
내가 깜짝 놀라는데 카미르가 말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마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카미르는 띄운 영상을 확대했다.
확대
계속 확대.
유하 피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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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의 아래를 보세요.”
유하의 아래쪽으로 그어진 선.
내 막내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일일이 적는 게 아닙니다. 마녀가 태어난다면 자동으로 기입이 됩니다. 그리고…….”
카미르가 영상을 우측으로 확 돌렸다.
그러자 붉게 칠해진 이름들이 주르륵 나온다.
하단.
루이사 사망.
루이사의 딸 사망.
크렌베리 사망.
크렌베리의 딸 사망.
“이런 식으로…… 미처 태어나지 않은 마녀들이 사망할 경우에도 기입이 됩니다. 마녀들은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변고가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죠. 이게 바로 마녀의 계보도입니다.”
그리고 카미르가 홱 돌더니 이름을 하나 확대했다.
하시아 티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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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아의 딸
“하시아의 딸은 사망자 명부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카미르의 말에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가슴이 뛰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건 확실한 겁니까?”
“실은 본래 하시아는…… 사망자 명부에 있었습니다. 한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명부에 다시 이름이 올랐습니다. 확인했을 때는 대략 110년 전후입니다.”
하시아가 서큐버스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다.
카미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계보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습니다. 오류를 의심했고, 또 유하에게 은밀하게 물어보았지만…… 유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다른 황후들을 멀리하게 되셨고요.”
“그래서 저에게 하시아에 대해서 물어보신 거군요.”
카미르가 파군이 부러진 것을 비롯한 각종 이변에 마녀왕 하시아가 관련이 있냐고 물어본 것.
생각해 보니 좀 의아했다.
대외적으로 하시아는 최종 결전 직전에 사망했는데 갑자기 콕 짚었지.
카미르는 이 계보도를 보고, 의구심을 품은 거다.
“……그럼 하시아도 살아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까?”
“그게 좀 이상합니다. 아시겠지만 마녀들도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타락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이 계보도에서 이름이 삭제됩니다.”
카미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데 하시아는 이제까지 삭제된 적이 없습니다. 사망 처리 되었다가 부활했습니다.”
“…….”
“칠죄신의 개입을 염려하시겠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계보도는 극비 사항, 거기다가 칠죄신은 본래 관심 있는 것에만 집착하고 다른 것에는 흥미가 적습니다.”
“……그러면 제 딸아이는 어떤 형태로건 무사하다. 하시아도 어쩌면 살아 있을 수 있다, 이겁니까?”
카미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비전은 자기 머릿속의 상념을 보여 주는 겁니다. 즉, 초능력자의 주관이 들어가서 왜곡할 수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하시아가 폐하를 흔들기 위해서 거짓을 섞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하시아는 현명한 아이입니다. 만약 자기 아이를 지키려고 한다면, 타락을 감수하더라도 어떤 수를 썼을 겁니다.”
카미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하던 말이 전부 다 거짓은 아닐 겁니다. 유하의 반응을 보면…… 황후들이 잘못을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무사하십니다. 아마 하시아가 당시에 칠죄신과 어떤, 아주 특수한 방식의 거래를 했던 것 같습니다만…….”
“칠죄신은 딸아이를 일부러 살려 뒀겠군요. 나를 괴롭히는 마지막 카드로 쓰려고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카미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외 여러 가지를 추측해 보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괜한 말로 폐하의 판단을 흐릴 수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카미르는 놀라서는 마주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유하의 어리석음으로 폐하에게 큰 고통을 준 죄, 실로 죽어 마땅하니 저로서는 감히 뭘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폐하가 조금이라도 이제 마음이 편해지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카미르는 한참 뒤에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예, 이야기는 길었고 밤이 깊었습니다. 폐하도 이만 쉬시고 내일 다시 대사를 의논하기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어떤 결정을 하시건, 우리 마녀들은 폐하를 지지할 겁니다.”
“새삼 감사합니다, 장모님.”
“아닙니다.”
이런 대화를 몇 차례 더 주고받고.
카미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폐하, 파군의 조각을 건네주시겠습니까? 유하에게 확인하게 하고, 다시 파군을 부활시킬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하루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거라면…….”
“……아닙니다. 폐하가 직접 유하와 마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와 오드벨 재상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내가 굳이 유하와 마주하고 껄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카미르는 배려해 주는 것이다.
나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한 유하까지도.
“……알겠습니다. 서로 시간을 더 갖는 게 낫겠죠.”
“예, 그러면 먼저 들어가서 오드벨 재상과 기다리겠습니다.”
카미르는 돌아갔다.
나보고 혼자 남아서 마음을 정리하라는 배려다.
“후우우우…….”
마음이 들뜬다.
나와 하시아의 아이가 무사하다.
가슴속에 깊이 묻어 놨던 돌덩이가 하루아침에 쓱 사라진 기분이다.
“……안 되지. 안 돼.”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다.
결국 칠죄신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내 딸을 남겨 뒀다는 소리니까.
하시아를 타락시킨 것처럼, 어떤 흉계를 꾸며 놨을지 모르겠다.
“……알았으니 이젠 안 당한다.”
답은 간단하다.
“칠죄신은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전에…….”
내가 이기면 된다.
용무를 마친 나는 거실로 돌아왔다.
가구를 치운 바닥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잠옷으로 이미 갈아입은 내 아이들이 있었고.
“……음, 이건 좀 아닌데.”
명색이 황자와 황녀인데 거실 바닥에서 재우다니.
하지만 여론을 통제해도, 침실에서 자면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른다.
내가 시릭의 환생이라는 풍설이야 계속 퍼지고 있지만.
머리를 푼 리세라가 빙긋 웃었다.
“전 여행 온 것 같아서 신나는걸요.”
“난 지겹게 다녔거든. ……아니, 세탄은 잠옷이 저게 뭐야? 진녹색 반바지라니.”
차녀 메이호의 탄식.
내 장남 세탄은 제국군 정규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브레이브맨.
세탄은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제작하신 제국군 잠옷이다.”
“국방부 디자인인 동성동명보다는 좀 낫지.”
“으으응.”
이부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미리엘이 화들짝 놀라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꼬옥.
내 손을 잡은 미리엘의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진다.
많이 운 데다가 새벽 시간이라서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리엘을 자리에 눕혔다.
“으으응, 안 잘래요…….”
미리엘은 잠에서 깨서 그렇게 말하더니, 금방 또 졸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옷자락을 잡은 손에는 힘을 빼지 않으려고 한다.
메이호는 그런 미리엘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면서 말했다.
“아빠인 거 알고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네요.”
“언니도 이제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네요.”
“……말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게 완전 우리 아빠인데 뭘. 어떻게 아니라고 해.”
잠든 미리엘을 내려다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메이호와 리세라.
그리고 오르카는 어색해하면서 내 옆에 앉았다.
“……바로 잘 거 아니라면 뭐 게임이라도 할까요?”
“오르카, 사귀는 애는 있냐?”
내가 묻자 오르카는 움찔했다.
“아, 아니. 갑자기 그게 뭔 소리예요?”
“너도 이제 성인이고 좋아하는 여자쯤은 있을 거 아니야.”
“나는 알지. 나는 알지.”
메이호가 킥킥대면서 웃었다.
오르카는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아, 아니거든!”
“아, 혹시 그 여자 말이냐?”
세탄도 내 옆에 앉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르카는 세탄을 쏘아보며 정색했다.
“아니거든요, 형님?”
“……그러고 보니 오르카는 세탄도 형님이라고 부르고 리세라도 누님이라고 부르는데 왜 나는 누나야?”
“존경할 마음이 안 들어서요.”
“어쭈? 너 지금 누나에게 기어올라?”
“이런 식이니까 존경할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아빠랑 결혼할 누나.”
“야!”
오가는 대화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웃고 있었다.
너무 즐거워서.
이렇게 자식들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너무 기뻐서.
“……아버지, 우세요?”
리세라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아옹다옹하던 메이호와 오르카도 나를 본다.
“으, 응. 아니다. 아니야.”
“아버지, 이거 쓰시죠.”
내가 눈가를 훔치는데 세탄이 담담하게 수건을 건넸다.
……상식적으로 손수건을 주는 거 아니니?
하지만 나도 그냥 수건으로 닦아 버렸다.
우리 아들이 주는 건데 뭘!
“……우와, 눈치 없는 세탄이나 그걸 받아 주는 아빠나.”
“보기만 해도 불안하네. 메이호 누나가 결혼해서 해결해요.”
“너 진짜 죽을래!”
메이호가 오르카를 쥐어박으려 하고.
오르카는 몸을 굴려서 피하고.
리세라는 그걸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세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이호에게 공격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훈수를 두고.
“하하하하.”
잠든 미리엘을 끌어안은 나는 웃으면서도 울었다.
이게 내가 바라던 거라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환생하길 잘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