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5)
새로운 희망
다 말했다.
“시릭 카라카스의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나, 리젠 리브라타는 손뼉을 쳤다.
짝!
상영 종료의 신호.
소파에 앉아서 듣던 내 자식들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리엘은 없다.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렌시엘이 방으로 데려가서 달래는 중이었다.
다들 침묵만 흐르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라니까? 자, 크레딧 올라가는 중이니까. 물건 잊지들 말고 퇴장하세요.”
길었다.
나도 한 5일은 밤새워 가면서 이야기한 기분인걸.
정적.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듣던 메이호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게, 그게 사실이라고요?”
“구구절절해서 별로 재미없었지? 원래 자서전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각색되는 법이라니까.”
“어,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메이호가 벌떡 일어나면서 랑에이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에 나는 정색하고 나무랐다.
“메이호, 앉아!”
“……아, 아빠!”
“처음부터 약속했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너희 어머니 편을 들라고.”
랑에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셀렌은 괴롭게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유하는 너무 입술을 깨물어서 흉이 질 지경이었다.
메이호가 부들부들 떨자, 리세라가 손을 잡고는 앉혔다.
“언니, 앉아요.”
“…….”
메이호는 덜덜 떨면서 자리에 앉았다.
오르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이걸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겁니까?”
“다 지난 일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말했다.
“그때 너희들은 너무 어렸다. 아니, 설사 성인이었어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나와 황후들 사이의 이야기, 너희들에게 책임감이나 부채감을 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그래요? 나, 나는…….”
“인간은 일찍 죽거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실제로 저렇게 되고, 약 10년 뒤에 나는 사망했다. 나보다…….”
나는 무심코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유하의 대모, 카미르가 말했다.
“아이들이 어머니와 지내야 하는 시간이 훨씬 기니까.”
“…….”
“그래서 전부 입을 다물고 가 버리신 거군요, 폐하.”
아이들 사이에서 경악.
잠자코 듣던 세탄도 눈을 크게 떴다.
메이호는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만 흘렸다.
“……아, 음. 장모님. 굳이 그걸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전부 다 말하려고 모인 자리 아닙니까?”
나는 턱을 긁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심각하게들 생각하지 마라. 이젠 다 지난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다 잊을 수 있더라.”
“…….”
다들 멍한 얼굴이었다.
그 끔찍한 걸 어떻게 넘긴 거냐고.
물론 나도 그게 하루아침에 가능했던 게 아니다.
시릭일 때는 서로 얼굴 안 보고, 가능하면 생각 안 하고 살고. 그냥 결혼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로 취급해 버리고.
그리고…… 리젠 리브라타로 환생해서 즐거웠으니까.
아멜리아가 내 옆에 있어 주고, 가룰이 바보짓 하고, 로데릭이 잔소리하는.
그냥 그게 좋았다.
천천히 회복된 거다.
“양위는 왜 하려고 하신 겁니까?”
침묵하던 장남, 세탄이 불쑥 물었다.
날카로운 질문이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냥 지치더라.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치더라고.”
아무리 일해 봐야 보람이 없으니까.
내 버팀목이었던 가족들이 사라지니, 한계에 달했다.
자식들의 침묵.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미안하지만 하나 더 추가하자. 황후들도 사실 이런저런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다. 속에 품은 진실이 있을 거고. 그런데 그거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물론이고, 애들한테도.”
“…….”
“난 이제 더는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싶지 않다. 미안하지만 나 죽은 다음에 해라. 어차피 난 인간, 오래 안 걸릴 거다.”
자식들이 멍하니 본다.
아, 좀 민감한 화제였나?
아무튼 마무리를 지은 나는 손짓했다.
“다들 어머니 손 한 번씩 잡아 드려라.”
“…….”
메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동생인 오르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려고 하자 메이호가 으르렁거리면서 노려보고.
나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호야, 그만해라.”
“……그치만.”
“이래서 말을 안 하려고 했던 거다.”
나는 새삼스럽게 말했다.
“이미 칠죄신과 그 무리들은 이런 제반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나쁜 방법으로 알게 될까 봐, 괜히 더 오해하게 될까 봐 미리 말해 두는 거다. 남은 애들에게도 괜한 오해 하지 않게, 미리 일러두고.”
“…….”
랑에이와 이셀렌, 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 다 내 눈도 못 보고 자리를 피한다.
관계자지만 내 입장에서 말하는 걸 들은 건 처음이겠지.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장남을 보았다.
“그리고 세탄.”
“예.”
“엔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니, 그야 오해하는 게 당연하다만.”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헝겊을 꺼내 들었다.
펼치자 나오는 칼 조각.
“엔라가 나와 만나서 건네준 거다. 파군의 칼날 조각이다.”
“……철혈성군이 그걸 회수하려고 적에게 투신했다는 겁니까?”
“칠성칠요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사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일부러 두둔했다.
세탄이 친어머니인 엔라에게 살수를 날리게 둘 순 없다.
엔라를 처단해도, 내가 할 일이지 아들에게 시켜서는 안 되지.
세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칠성칠요가…….”
“칠성칠요는 생명의 지보, 단순한 검이 아닙니다.”
카미르가 문득 말했다.
“칠성칠요는 칠죄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칠죄신을 추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요. 그중 하나가 부러졌다는 건, 카라카스에 사는 모든 생명의 위기입니다. 4황후가 모든 것을 저버리고 그 수복에 나설 만은 합니다.”
“…….”
내가 시선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카미르는 계속 말했다.
“만약 그 조각들을 전부 회수한다면, 유하가 검을 새롭게 벼릴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칠성칠요가 부활하겠죠.”
세탄은 나를 빤히 보고는 머리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저는 아버지를 따라서 싸우겠습니다.”
“이젠 못 믿겠다고 안 하냐?”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못 믿겠다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세탄은 손으로 목을 눌렀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을 이리도 생각해 주는 분은 아버지밖에 안 계십니다.”
“…….”
장남의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메이호가 서럽게도 울면서 어깨를 떤다.
내가 리세라에게 좀 부탁의 시선을 던지는데…….
달칵.
문이 열리고 미리엘이 돌아왔다.
눈시울이 빨개진 미리엘은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저씨가 아빠예요? 그래서 세라가 아빠라고 하던 거예요?”
“으음. 그래.”
“정말로 우리 아빠 맞아요?”
미리엘이 애타는 목소리로 부른다.
나는 몸을 숙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래, 아빠다.”
“……아빠.”
와락.
미리엘은 내게 안겨 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많이 울고 왔는지,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등.
내 팔을 꼭 잡은 작은 손에 힘껏 힘이 들어간다.
“아빠, 아빠……. 아빠.”
“그래, 그래.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다…….”
그냥 미안하지.
자식 앞에서는 황제고 뭐고 그냥 아빠다.
내가 미리엘을 토닥여 주는데 메이호가 다가왔다.
다 큰 애인데도 뺨에는 눈물투성이.
“아빠.”
메이호가 내 목을 끌어안고는 어깨에다가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미리엘을 안고 있던 팔 하나를 풀어서 메이호를 안아 주는데.
이번에는 리세라가 와서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으음.”
꼼짝 못 하게 되었군.
세 딸에게 포위당한 내가 난감해하는데 오르카가 다가왔다.
이야기를 듣다가 몇 번 눈시울을 붉힌 녀석.
“……아, 음. 죄송합니다, 아버지.”
“처음 봤을 때처럼 말 까지?”
“……그건 모르고 한 거잖아요. 제가 알았으면 어떻게 그래요.”
오르카가 투덜거리자 나는 웃었다.
“알아. 그래도 너 봐서 좋았다.”
“…….”
“딸도, 아들들도 다 잘 컸어. 내가 옆에 제대로 있어 주지 못했는데도…….”
오르카는 머뭇거리다가 헛기침을 했다.
“메이호 누나, 저도 좀…….”
“뭐?”
펑펑 울던 메이호가 홱 돌아서 노려보았다.
남동생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깝치냐는 적대의 시선.
하지만 내가 어깨를 토닥이니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래, 이리 와라. 오르카.”
“…….”
오르카는 낯설어하면서도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작은 체구.
나는 오르카를 팔로 안고는 툭, 툭 등을 두드렸다.
“그래, 이렇게 잘 커 줘서 고맙다. 정말로…….”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르카는 굉장히 부끄러운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원래 남자들은 이런 포옹에 좀처럼 잘 대응을 못 하거든.
나는 풀어 주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네가 있어서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
오르카는 왕권을, 다크엘프의 정보망을 계승하지 못한다.
머지않아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내 아들이,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오르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자, 나는 이제 됐으니 어머니들 찾아가서 안아 주고 와라.”
“……아빠.”
메이호가 이제는 한탄의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럴 수 있겠냐고.
하지만 나는 작정하고 말했다.
“그만,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에게 내 편 들어 달라고, 어머니들 미워하라고 전부 다 말한 게 아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문제가 있어도 우리 부부 사이지, 너희들이 누구 편을 들고 말고 할 게 아니야.”
“…….”
“너희들이 이 아버지의 부족한 점을 너그러이 받아 줄 수 있다면, 어머니에게도 그래 줬으면 한다. 부탁한다.”
내가 머리를 숙여 보이자 메이호가 비명을 질렀다.
“아빠! 하지 마요. 고개 숙이지 마. 하지 마. 내가 잘못했어요…….”
“그래요, 아버지. 우리들이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오르카도 허둥지둥 내 고개를 들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짐짓 버티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약속하는 거다?”
“알았다니까! 그만해요, 아빠! 나 미쳐요!”
메이호가 애걸하자 나는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메이호는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지금 당장 하고 와.”
“…….”
메이호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본래 메이호는 랑에이와 크게 사이가 벌어졌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알고서도 데면데면한 사이고.
내가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자 메이호가 기겁했다.
“……아, 진짜! 알았어요! 세라야. 나 좀 도와줘.”
“예, 언니.”
아무래도 혼자 가기는 힘든지 메이호는 구원을 요청했다.
리세라는 일어나다가 내 등을 짚고는 속삭였다.
“언니가 어리광 부리는 거 귀엽죠?”
“누가 어리광을 부려? 엄마랑 또 싸울까 봐 나 좀 말려 달려고 데려가는 건데.”
“예,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아버지.”
리세라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웃었다.
메이호는 약이 오른 얼굴로 리세라를 보다가, 역시 내 이마를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짐짓 피하면서 말했다.
“랑에이랑 화해하고 나면…….”
“아, 진짜! 알았어요!”
메이호는 성을 내면서 억지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못 이기는 척 받아 준 내가 웃자 메이호는 투덜거렸다.
“……아무튼 금방 해치우고 오면 되잖아. 가자, 세라야.”
메이호는 리세라를 데리고 걸어갔다.
남은 오르카는 어색하게 말했다.
“으음, 저도 어머니와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길게 해도 된다.”
오르카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남은 미리엘의 등을 쓸어 주면서 한숨을 흘렸다.
오래전의 이야기.
다 털어 버리니 후련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아이들이 이렇게 알아 버렸는데도, 다들 어떻게든 가족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어서.
“…….”
미리엘이 아무 소리가 없어서 살펴보니 내 품에 고개를 묻고는 잠들어 있었다.
너무 지쳐 버린 모양이다.
“그래, 그래…….”
“으으응.”
살짝 잠들었던 미리엘은 깨 버리는 신음을 흘리면서 더 내 품을 파고들었다.
“……아빠, 가지 마요.”
“그래, 이제 어디 안 간다.”
“진짜요?”
미리엘은 눈을 비비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앞으로 아빠랑 같이 잘래요.”
“…….”
눈을 떼면 내가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하는 건가.
하지만 미리엘은 생긴 건 어리고, 실제로 천족의 계산대로라면 어린애지만.
리젠하고 황녀인 미리엘이 같이 자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누가 보고 듣기라도 하면 이상한 오해가…….
“안 돼요?”
미리엘이 불안하게 물으면서 내 옷자락을 꼭 잡았다.
나는 얼른 말했다.
“당연히 되지.”
오늘은 오랜만에 딸하고 손잡고 자자.
권력은 이러라고 있는 거지.
침실에서 잘 수는 없으니 응접실에 자리를 따로 마련하기로 했다.
미리엘만이 아니다.
한밤이지만 자식들과 마저 이야기나 나누다가 잠들 계획이다.
오드벨이 가려 뽑은 시종들이 준비하는 걸 지켜보던 내게 사람이 다가왔다.
마녀 카미르.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정말로 가슴이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장모님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카미르는 거듭 말하면서 내 팔을 잡았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만 정말로 긴하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의 과거를 다시 거론하게 되어서 굉장히 송구합니다만.”
“예, 하셔도 됩니다.”
“자리를 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카미르와 함께 발코니로 나왔다.
한참 뜸을 들인 카미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와 하시아 사이의 자제분, 그러니까 황녀 전하되실 분은…….”
“…….”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두근.
가슴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