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4)
꽃피는 봄이 오면
나는 계속 일했다.
황후와 내 자식들은 여전히 같은 황성 안에 살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일절 내 눈에 띄지 않았다.
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간혹 눈치 없는 신하 놈이 제 딴에는 충언이라고 황후, 자식들에 대해서 발언하면.
나는 참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보름이 1개월이 되고.
1개월이 1년이 된다.
들끓던 감정도 서서히 식어 버린다.
“일이나 해야지…….”
오늘도 혼자만의 저녁 식사.
아무도 없는 식탁에서 적당히 배를 채운 나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천년제국은 갈수록 번성하고 있었다.
나는 자는 시간 빼고 일만 했으니까.
집무실로 들어가서, 책상을 짚은 나는 멈칫했다.
인기척.
“…….”
방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칠성칠요는 잠들었고, 그 이후로 발동하지 않았다.
숨소리가 들려온다.
책상 아래서.
“…….”
조심스럽게 확인한 나는…… 멈칫했다.
리세라.
넷째 딸아이가 책상 아래의 빈 공간에 쪼그려 앉아서는 잠들어 있었다.
“…….”
어떻게 들어온 걸까?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1년 만에 보는 딸의 모습에 갑자기 목이 콱 메어 왔다.
어린 딸아이가 곤하게 잠든 모습은 아버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의자에 앉아서 리세라를 바라보았다.
“아, 아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웃음.
“으응.”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리세라가 손으로 눈을 비볐다.
눈을 깜빡거린 딸아이는 흠칫하고, 의자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빠.”
“응, 그래…….”
“잘못했어요.”
리세라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손을 가로저었다.
“아니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
아이들이 만나러 오지 못하게 막아 버린 건 나다.
1년 동안 지켜졌으니 나름 철두철미한 체제였다.
리세라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죄송해요. 다들 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마구 떼를 썼어요.”
“화내는 거 아니다.”
“……하지만 아빠는 일에 바쁘시니까. 방해하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
리세라가 연신 사과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다. 사과하지 마라.”
“……그러면 시녀들에게 화 안 내실 거죠?”
“응, 오늘 일은 비밀로 하마.”
내가 몇 번이고 부드럽게 달래자 리세라는 그제야 좀 안심한 얼굴이었다.
딸아이가 하도 눈치를 보니…… 애처롭다.
나는 얼른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니?”
“……아빠에게 이거 드리고 싶어서요.”
리세라는 주저하면서 등 뒤에 감춰 놨던 꽃다발을 건넸다.
물망초였다.
겨울이라도 정령무희의 정원이라면 필…….
“응, 고맙다. 그런데 여기 온 거, 어…….”
황후를 떠올린 순간, 갑자기 마음에 풍랑이 일었다.
……황후들이 지금 자식들을 내세워서 나를 회유하려는 건가?
“…….”
리세라가 겁먹었다.
나는 얼른 표정을 풀고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겠다. 이만 돌아가렴.”
“……죄송해요.”
리세라는 망설이다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아빠는 저희들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
아.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본능과.
이것도 황후들의 수작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동시에 든다.
슬슬 1년이 됐으니, 내 화가 식었을까 떠보는 거 아닐까?
“……세라야.”
“예.”
“너희들을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아빠는…….”
자식의 언행을 순수하게 받을 수가 없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다시 보고 싶구나.”
“……제가 어른이 되면 아빠를 다시 볼 수 있어요?”
“응, 아빠는 그때만 기다리면서 여기서 일하고 있으마.”
거짓말이다.
내 나이는 이제 50이 넘었다.
수명이 긴 종족인 자식들이 다 성장할 때까지…… 버틸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 딸아이가 준 물망초 꽃을 꼭 잡고는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예.”
리세라는 긴장하며 손가락을 걸고는 도장을 꾹 찍었다.
꾸욱.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한참을 그대로.
1분이나 애써 유지하던 리세라가 고개를 수그렸다.
떨리는 어깨.
흐느끼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서 딸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세라야?”
“……가기 싫어요.”
이제 할 말은 끝.
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딸아이는 울면서 말하고 있었다.
목이 콱 메어 왔지만.
나는 애써 거짓말을 했다.
“미안하다. 아빠가 할 일이…… 할 일이 아주 많아서. 일이 너무 많거든.”
혹시 리세라가 황후에게 대본이라도 받은 거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생각, 자식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가 못나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빠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아빠는 잘못 없어요.”
리세라는 도리질을 쳤다.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갑자기 자식과 예기치 못한 재회, 그게 나를 설레게 했고 동시에 암담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자식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인간으로 치면 이제 갓난아이, 참 어린 아이들이니까.
이 나이대 애들에게 엄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고.
“제가 멋대로…….”
리세라가 울면서 말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우는 딸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나는 부드럽게 일렀다.
“아니,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어른들의 잘못이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야.”
“…….”
“나와 너희 어머니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거지, 너희들은 잘못이 없어. 비록 떨어져 산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을 언제나 사랑하고 있단다.”
피로 물든 꿈을 살아온 나의 귀중한 보물.
리세라는 주저하다가 나를 향해서 팔을 뻗었다.
안아 달라고.
“……그래, 세라야.”
나는 딸을 양팔로 꼭 안아 주고는 속삭였다.
“아빠는 늘 너희들을 사랑한다. 오빠와 누나, 동생에게도 잘 말해 주렴.”
내가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너희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다.
리세라는 울고 울다가 지쳐서 잠들어 버렸다.
시녀를 시켜서 후궁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한참 책상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상황에 짚이는 게 있었지만 나는 심란했다.
지금은 쉬고 싶었다.
한데 침실로 돌아가는 복도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 재상 오드벨.
복도 모퉁이에 선 놈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다들 물러가라.”
따라온 호위들과 시종들을 물리친 나는 오드벨을 향해서 다가갔다.
오드벨은 내 발소리에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5m 앞에서 멈춰 선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뭐 캤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폐하.”
내가 자식들의 일에 정색하는 걸 오드벨도 알고 있었다.
오드벨도 지금 목숨을 내걸고 이 짓을 벌인 거지.
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말했다.
“2황후, 3황후, 어느 쪽이냐?”
“……나야.”
모퉁이 너머.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이셀렌이었다.
나는 오드벨을 노려보았다.
“리세라 때문에 딱 한 번만 살려 준다. 당장 꺼져라. 난 지금 심하게 실망했고, 이후에 다시 한 번 이딴 짓을 하면 네 목을 벤다. 아니, 그 이상을 할 거니까 궁금하면 해 봐라.”
“……죄송합니다, 폐하.”
오드벨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났다.
리세라는 어린애다.
시녀와 경비들을 피해서 자기 혼자서 내 집무실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내부의 묵인, 혹은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오드벨과 이셀렌이 도와준 거지.
“…….”
모퉁이 너머.
목소리만 들려오더니 이셀렌은 침묵했다.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면서.
“동네 카페도 아니고 한자리에 모일 리가 없지.”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때 다들 엄청나게 바빴는데, 너희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숙덕공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하시아가 너무 싫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짬이 안 났을 거다.”
“…….”
당장 엔라는 전선을 책임지는 장군이고, 렌시엘은 후방에서 지원 중이었다.
촉나라 오호대장군이 한 전선에 등장하는 거야 게임에서나 가능하지.
“하지만 최종 결전 직전에는 다들 바쁘게 오갔지. 그래서 일곱 명이 정말 어떻게 한자리에 모였다? 하시아가 살아 돌아와서 나한테 말하면 너희들은 끝장이었어.”
왜 원군 안 보내 줬어?
그 한마디면 내가 눈 돌아갔지.
“하시아가 죽어도 부관 하나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끝나. 관우에게 원군 안 보낸 거 유비가 나중에 다 알잖아. 군대는 기록이 다 남아.”
“…….”
구원군을 안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하고 멍청한 계획이다.
황후들도 다들 전쟁을 아는 몸, 그런 계획은 안 쓴다.
즉, 서큐버스가 보여 준 것과 황후들의 진실은 다르다.
“그런데 말이야. 난 이제 니들 이야기를 믿을 수도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살아 있는 너희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말할 게 뻔하거든.”
“…….”
“그게 맞나,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못 해먹겠다. 그러다가 위에 빵꾸 날 거고.”
그때 황후들의 반응.
하시아의 죽음에 분명히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걸 나에게 내내 숨겼다.
뭘 어떻게 믿을까?
“황후 중에 누가 죄가 더 크고 작고 하는 이야기 따위 할 거라면 돌아가라. 그 일은 그냥 생각하기 싫다.”
딸아이를 만나서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참담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자식의 말, 행동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부부 사이에 신뢰가 깨진다는 건 그런 거다.
이셀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히 용서받을 생각은 하지 않아. 그저, 나는 당신이 너무 무리…….”
“걱정하지 마. 나는 머지않아 죽을 거다.”
“…….”
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는 인간이고 나이가 50이 넘었다. 이 나이 먹고 핏대 세우는 것도 귀찮고 한심해. 찾아와서 보채지 않아도 제국의 권력은 송두리째 너희들에게 넘어갈 테니까 알아서들 잘해라.”
“…….”
“좋아하잖아? 그놈의 권력, 제국을 나눠 먹을 생각이나 했겠지. 좋겠다. 싹 다 처먹어서.”
탁.
뒷걸음질 치는 소리.
나하고 단둘이 있을 때, 이셀렌이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는지 안다.
지금 내 말에 어마어마한 상처를 입었을 거란 것도 안다.
이셀렌은 그래도 애써 버티면서 말했다.
“……잃,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
“…….”
“용서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그저 우리들은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 그…….”
“…….”
분명히 그렇다.
칠죄신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다크엘프들도 정말 숱하게 죽어 나갔다.
이셀렌은 오로지 나를 믿고 종족의 명운을 걸었고.
“그래, 잃어버린 게 너무 많지.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 이상의 나라로 만들어야 해. 멈출 수가 없다.”
비록 내가 아내들과 등을 지고, 자식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안아 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전우들.
제국의 탄생을 기원하면서 온갖 노역을 마다하지 않은 백성들.
그들의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나는 제국의 황제.
계속 일해서 문명을 꽃피우고 인류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과 같이 갈 마음은 들지 않아.”
“…….”
“나는 혼자 가다가 혼자 죽을 거다. 이게 우리 끝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도 가라. 자식을 잘 키워라.”
“…….”
“가라, 이셀렌. 더는 보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다.”
탁.
……탁.
발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
황후들은 하시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진짜 원흉은 칠죄신이다.
“……아.”
칠죄신이 마지막에 말했지.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라고.
정말로 악질은 칠죄신이고, 황후들은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다고 황후들을 용서할 수도 없다.
“하하하.”
칠죄신은…… 일부러 그런 것이다.
놈은 이런 걸 즐기니까.
황후들을 무작정 증오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올가미를 내게 뒤집어씌우는 것.
감히 신에게 덤빈 황제를 가족들과 찢어 놓는 것.
이게 바로 놈이 나한테 친 ‘장난’이었다.
“이래서 결혼은 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쓴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지.
아내도, 자식도 얼굴 안 보고.
그냥 제국을 위해 일만 하면서.
신하들이나 굴리면서 일만 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겠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의 인생.
그저 한마디로 넘겨 버릴 수 있겠지.
“너희들은 결혼하지 마라.”
탄식하는 내 눈에 창밖의 광경이 보였다.
하얀 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시아와 만났던 그때처럼.
세상이 아무리 추하고 더러워도 눈은 새하얗다.
“겨울이 왔다…….”
겨울의 만남으로 시작한 내 삶은.
이제 겨울에 저물고 있었다.
혼자 남은 겨울.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아주 긴 겨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