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3)
Blurry
상황은 복잡해도 해야 할 일은 하나.
서큐버스를 잡아야 한다.
상대는 초능력자, 거기다가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더욱 강력해졌다.
거기다가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상대.
방심하지 않는다.
나는 칠성칠요 여섯 자루를 내 주변에 띄우고, 파군을 손으로 잡고는 뛰어들었다.
퍽!
단숨에 관통.
“…….”
하시아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다른 특수한 능력도 아니다.
심장을 꿰뚫은 치명상.
“쿨럭. 쿨럭.”
하시아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
나는 얼이 빠져서 바라보았다.
치열한 전투를 예상했다. 아니, 그걸 바랐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칼을 맞을 거라고는.
하시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처럼.
“적을 믿으면 안 되지?”
“…….”
그 눈발이 휘날리던 날처럼.
피 흘리는 하시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서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우리가 행복하게 웃고 떠들던 그 시절처럼.
나는 칼을 뽑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은 다 믿어 버렸네, 내 사랑.”
“무슨…….”
하시아는 자기 가슴을 관통한 파군에 손을 대었다.
끼기기긱!
괴상한 소리, 칼이 비명을 지른다.
―안…….
칠성칠요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쨍그랑!
파군이 깨져 나갔다.
칠죄신을 상대하면서도 날 하나 상하지 않던 검이 박살 난 것이다.
“……행복해야 한다, 시릭.”
파군의 칼날이 가슴팍에 박힌 하시아가 뒤로 물러났다.
생명이 꺼져 가는 얼굴.
그녀의 뒤에 나선형의 검은 공간이 열린다.
텔레포트…….
“하시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하시아는 검은 공간으로 넘어갔다.
피를 흘리고 죽어 가면서도.
나를 보고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정적.
침묵.
“…….”
나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하하.”
웃음이 나오네.
나는 그냥 웃었다.
“아, 진짜 기가 막히네. 인생 꼬라지 봐라.”
“시, 시릭.”
“괘, 괜…….”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돌아보았다.
한때 사랑했었던 여자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젠 아니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있었냐? 다 봤으면 가라.”
“…….”
“우리 앞으로 얼굴 보지 말자. 아, 외교적으로 말하면 당분간 시간을 갖자. 한 5천 년 정도?”
랑에이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나섰다.
“시…….”
“아, 그래, 2황후 전하. 하시아 뒤통수치고 황후들 대가리가 돼서 팔자 좋으시겠어?”
나는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랑에이가 얼어 버리건 말건.
뭔 상관이야.
“니들은 인생 잘 풀려서 좋겠다? 난 완전히 개좆된 것 같은데?”
“…….”
“그래, 말을 안 하는 거 보니 양심은 있나 보네. 진작부터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가라.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
“…….”
“가. 얼른.”
계속 보고 있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입을 열려던 황후를 다른 이들이 만류하기를 몇 차례.
결국 다들 물러가기 시작했다.
차마 나를 혼자 놔두고 갈 수 없다는 듯이 미적거렸지만.
나는 이제 지겨웠다.
정적.
1황후의 후궁에는 나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고작 1시간도 안 지났다.
여전히 밤공기는 시릴 정도로 맑았고, 달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림 속의 하시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 진짜.”
눈물도 안 나왔다.
나는 제국의 황제.
만민이 영웅이라고 노래하고 추앙하는 시릭 카라카스.
사악한 신을 물리치고 인류의 시대를 연 남자라는데.
“하하하.”
대체 나에게 무엇이 남은 걸까?
밤이 가고 아침이 왔다.
보통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개인 정비를 하고, 내 아이들을 본다.
출근하기 전에 아이들 얼굴 보는 기쁨이었지.
하지만 일어난 나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크엘프 시종장이 내게 와서는 일렀다.
“폐하, 황자와 황녀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가라고 해. 오늘부터 문안하지 말라고 하고.”
“예? 폐, 폐하. 갑자기 무슨…….”
“다시 말해?”
반사적인 포효.
시종장이 얼어붙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피곤하고 다 귀찮다. 당분간 오지 말라고 네가 알아서 둘러대라. 처리해.”
“소, 소신이 어찌…….”
“이러라고 월급 줬잖아. 가서 해. 그리고 오드벨 들어오라고 해라.”
“…….”
시종장은 곤혹스러워하다가 물러갔다.
자기 선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10분도 안 돼서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제국 재상 오드벨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가기 귀찮으니까 들어오라고 해.”
잠시의 소란.
오드벨이 들어왔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부른다고 바로 오네?”
나는 오드벨을 노려보았다.
이놈은 6황후의 오빠, 벌써 소식이 들어간 건가?
하지만 오드벨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실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 가려서 해라.”
“……예?”
오드벨은 당황한 얼굴.
아무래도 그 문제가 아닌가?
내가 의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오드벨이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제국군의 기록물 보관소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실화인지 방화인지 확인 중이었습니다만 방금 방화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뭐!”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폐하?”
“몇 시에 벌어졌냐?”
내가 노려보면서 묻자 오드벨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어제저녁 10시경입니다. 큰 화재는 아니었고, 또 폐하가 후궁으로 가신지라, 아침에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범인은?”
“죄송합니다. 현재 조사 중입니다만…….”
하시아다.
기록물을 불태운 다음에 내 쪽으로 온 거다.
왜?
칠죄신의 종복, 당연히 나 엿 먹이려고 한 거지.
나는 그 사실을 곱씹으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 마라.”
“예.”
“앞으로 내 눈에 황후들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해라.”
“……예?”
“나와 황후들의 스케줄이 단 1초도 겹치지 않게 하라고.”
제국의 황후는 지금 일곱 명.
단순히 얼굴을 안 보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황제고, 이런저런 공식 행사에서 황후들과 함께 다니는 게 정상이다.
오드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아마도 평생.”
“…….”
오드벨이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한참 신음을 흘리던 놈은 마지못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마라. 그러면 불충으로 간주한다.”
“…….”
오드벨은 6황후의 오빠이기도 하다.
오드벨은 고뇌의 신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그러면 새로 황후를 들이시겠습니까?”
“미쳤냐.”
“…….”
오드벨은 또 한동안 고민하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황후분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고 노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국에는 안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 죽이잖아.”
“…….”
오드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절대 돌릴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닫고.
“……일단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행정부에 새로 담당을 둬서 폐하와 모든 황후들의 일정이 어긋나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래. 머리카락도 내 눈에 안 들어오게 해라. 총력을 기울여라. 황후들도 괜히 나 보겠다고 뭐 하려고 하면 네가 사전에 차단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오드벨은 일단 지금 내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받아들였다.
이후에 시간을 두고 내 기분을 풀어 볼 생각이겠지.
하지만 이건 그럴 수 없다.
너무 멀리 왔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난 1주일 정도 쉰다. 관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정말 급한 거 아니면 부르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럽다거나, 멋대로라고 안 하냐?”
“……폐하의 옥체는 제국의 지보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셨으니 쉬실 때는 쉬어야죠.”
오드벨은 내 눈치를 보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쉬시는 동안 황자, 황녀분들과 지내시겠습니까?”
“…….”
문득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보게 되면 견딜 수 있을까?
아이들을 보면 황후들이 떠오를 텐데.
내가 그 마음을 아이들에게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니, 아이들도…… 나한테 안 보이게 해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드벨이 다시 물었다.
내가 아이들을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부에 따로 업무 맡겨. 애들하고 황후들, 다 내 눈에 안 보이게 해.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아주 큰일, 그러니까 내 아이들이 중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보고하지도 마라.”
“…….”
“그냥 안 보고 살고 싶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황후들을 모조리 폐하고, 사약을 내릴 수도 있었다.
이종족들이 들고일어나?
전후 사정을 밝히면 군말 못 할 거다.
안 밝혀도 지들이 어쩔 건가?
황후들 살리겠다고 나랑 해보겠다고? 제국군이 반역의 무리들을 싹 다 밟아 버릴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
내 귀여운 아들과 사랑스러운 딸.
아이들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을 순 없었다.
“애들이 대체 무슨 죄야…….”
“…….”
“오드벨, 당장 오늘부터 실행해라.”
오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연회를 준비할까요? 제국에서 제일가는 술과 무희들을 준비하겠습니다.”
“재상이라는 놈이 주지육림 권하는 꼬라지 봐라. 내가 정신줄 놓고 매일 술에 취해서 나랏일 팽개치는 황제면 좋겠냐?”
“가끔은 그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됐고. 제국군 군사 기록, 특히 최종 결전 직전의 기록을 가져와라.”
오드벨이 곤혹스러워하자 내가 추가했다.
“불타고 남은 거라도 침실로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내가 침대에 눕자 오드벨은 결국 머리를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나는 천장을 보면서 혀를 찼다.
혼잣말.
“아, 그래도 이성계보다는 내가 낫지. 자식들끼리 서로 안 죽였으니 어디야.”
그리고 나는 침실에서 쉬면서 남은 기록물들을 훑어보았다.
나는 당시에 군단장들에게 자유로운 재량권을 주었다.
기록의 상당수가 소실되었지만, 당시 기억과 남은 기록을 얼추 짜 맞추면 윤곽이 보인다.
“……병력이 비는데.”
하시아의 구원 요청, 나한테 보고가 안 들어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구원부대를 조직한 흔적…… 같은 것은 있었다.
모호하다.
“…….”
초능력, 비전은 진실의 거울이 아니다.
머릿속의 생각을 보여 주는 거다.
즉, 내가 봤던 하시아의 타락은 어디까지 진실인지 모호하다.
“하지만 서큐버스를 봤을 때 반응, 황후들이 뭔가를 했지. 대체 어디까지 했는지…….”
이젠 알아낼 방법이 없다.
기록은 없고, 하시아는 없다.
당시에 복무했던 이들도 많이 죽어 버렸고.
황후들은 자기들 유리한 이야기만 할 테고, 만에 하나 진실을 말해도 난 못 믿을 테고.
생각할수록 수렁이다.
“마음이란 간사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했나…….”
칠죄신의 마지막 말.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벽에 기대져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칠성칠요.
원래 과묵한 놈이기는 한데 이 상황이 되어서도 말이 없네.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파군이 부러졌다. 칠죄신의 추방에 박힌 쐐기 중 하나가 풀어진 거다.
“그래, 나도 놀랐다. 아마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서큐버스는 처음부터 칠성칠요를 노리고 온 거다. 추방된 칠죄신을 보다 빨리 돌아오게 하려고. 안 부러지는 검이지만 파괴 방법을 따로 마련한 거겠지.”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게 칠죄신의 계획이었다.
하시아를 타락시키고.
10년을 기다렸다가.
내가 행복에 겨운 순간 푹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내 사람, 황후들을 믿을 수 있겠냐고.
의심하고 괴로워하라고.
“칠죄신이…… 멘탈 파괴 전문이라는 건 알았는데 진짜 미친놈이네. 작정하고 날 몰아넣었어.”
―한 자루가 부러졌으니 차단은 약해졌고 칠죄신이 돌아오게 된다.
“……그게 언제냐?”
―모르겠다. 그때를 대비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 미안하다, 시릭.
“아니다, 내가 미안하지. 쉬어라.”
―더는 옆에 있어 주지 못…….
목소리가 끊어졌다.
정말로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다 가는구나. 다.”
스승은 가 버리고.
아내와 자식도 이젠 볼 수 없고.
함께해 온 검은 잠들었고.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다 가라, 다 가.”
기댈 곳도 없는 황제.
그게 나다.
그래도.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