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1)
승리의 만가
피가 끝도 없이 쏟아지는 대전쟁.
그 막바지에서.
푸아아악!
내가 연이어 날린 여섯 자루의 검이 적을 꿰뚫었다.
검에 꿰인 흑발의 남자가 웃는다.
단정한 얼굴이지만 몸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
지금 칠죄신이 쓰는 몸이다.
보통 거한의 육체를 쓰는 놈인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체구가 작았다.
―하하하하하,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느냐? 황제, 이걸로 네가 이겼다고? 과연 그럴까?
칠죄신이 크게 외친다.
―나랑 노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다! 황제!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하고 괴로운 것인지 지금부터 괴로워…….
뎅겅!
나는 대답하지 않고 목을 날려 버렸다.
털썩!
칠죄신이 쓰던 몸이 쓰러졌다.
몸에 감돌던 검은 기운이, 거짓말처럼 엷어져 간다.
“아…….”
“아아아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들.
하늘을 메우던 먹구름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장군, 피가 흐르는 가슴을 누르고 비틀거리는 병사.
살아남은 제국군들이 나를 본다.
“우리가…….”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쳤다.
“이겼다!”
정적.
그리고 수십만의 제국군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으아아아아아!”
“칠죄신을 이겼다!”
“제국군 만세!”
“폐하 만세!”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익숙한 얼굴의 장군들이 달려와서는 내 곁을 지킨다.
“폐하!”
전장을 호령하던 호걸들도 하나같이 펑펑 울고 있었다.
우리의 꿈.
칠죄신을 추방해 버린 세상이 왔으니까.
하지만…… 전장 곳곳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얼굴들.
몇몇이 빠져 있었다.
예렌과 락셀, 체스터는 내게 길을 열어 주려다가 칠죄신의 영역에 휩쓸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 외 유명을 달리한 장군, 병사들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하시아는 죽었다.
예상과 다르게, 하시아를 인질로 내세우지 않았다.
칠죄신은 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 있을 리가 없다.
“…….”
소중한 가족이.
전우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도 많다.
내가 그들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야 했다.
“자, 이제부터 제국의 시대다!”
내가 검을 들어 올리면서 선언하자 다들 함성을 질렀다.
기나긴 압제에서 해방된 기쁨.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로.
시간이 흘렀다.
천년제국을 세운 나는 황제로서 문명을 발전시켰다.
정말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그동안 칠죄신을 타도하자는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지만, 각 종족의 갈등이 터져 나왔다.
다들 내 말은 들었지만, 워낙 아옹다옹하니.
계속 바빴지만 행복했다.
아내들과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는 늘 아이들을 매일 보았고 밤마다 아내들을 찾았다.
가족.
그게 내 삶의 원동력이니까.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천년제국에서 가장 큰 기념일은 해방일이다.
제국군이 칠죄신을 추방하고 인류의 자유를 되찾은 날.
축하연에서 거나하게 취한 나는…… 후궁으로 향했다.
1황후의 후궁.
주인이 없는 건물로.
호위들을 물리고 혼자 들어간 나는 복도에 우두커니 섰다.
벽에 걸린 그림.
하시아는 변치 않은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오랜만이네요.”
나는 취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면서 복도 의자에 앉았다.
3억을 넘는 제국민들이 나를 숭배하고, 뛰어난 문무백관들이 나를 흠모한다.
하지만 이 건물에 들어오면.
이 그림 앞에 오면 나는 황제가 아니라 시릭이었다.
“당신이 왜 그렇게 가 버렸는지…….”
하다못해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칠죄신을 물리친 직후, 나는 장병들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하시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죽었다는 건 당연하다.
칠죄신에게 인질로 잡혔는데 살아남을 리가.
“머리로는 알지만…….”
수십 년 전에 행방불명이 된 자식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저 이렇게.
당신의 그림을 보면서 옛 추억을 떠올릴 뿐이지.
“스승님, 당신과 만나서 난 꿈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같이 누려 줬으면 했는데.
왜 하필 마지막 순간에.
취한 머리에 다시금 이 생각이 맴돈다.
“……아.”
눈시울이 뜨거워지자 나는 얼굴을 가렸다.
제국의 위대한 황제.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남자.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할 텐데.
이 그림을 마주하면 아니다.
“……유하는 잘 있어요. 스승님이 걱정하지 않게.”
8황후, 마령화비.
하시아의 동생.
나와 결혼했다.
어느 정도 정략적인 목적도 있었다.
1황후, 마녀왕 하시아가 죽은 이상 나와 마녀 중 누군가가 결혼하는 게 낫다고.
그리고 나는 유하를 골랐다.
그녀의 언니인 하시아를 앗아 갔다는 책임감도 있었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유하는 착한 마녀였다.
나도 금방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아니지. 이건 아니지. 그래요. 동생분은 참 매력적이더군요.”
이러면 마치 내가 의무감으로 유하를 아내로 삼은 것 같잖은가.
설사 본인이 안 듣는 자리라고 해도, 아내에게 심각한 결례지.
실제로 사랑스럽기도 하고.
“사실 스승님 동상이라도 세울까 했는데, 그건 좀. 여기에 조각상 하나 세울까요?”
나는 내 동상도 광장에 하나만 세우라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스승님의 동상도 옆에 세우고 싶긴 한데.
1황후가 죽었다고 한들, 다른 황후들과 형평성이 안 맞는다고 이야기가 나올 게 훤했다.
물론 내가 작심하면 다 찍어 누를 수 있겠지만.
“그거 보면 눈물 나서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이러는 건 가끔 여기서만…….”
“가련한 광경이로군.”
멈칫.
환청인 줄 알았다.
또각. 또각.
하지만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여기는 황성, 그중에서도 후궁이다.
당연히 경계가 삼엄하다.
물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긴 했지만.
그건 아는 사람이 극소수다.
아니, 애당초 이 건물에는 아무도 없다.
황제인 내가 호위도 물리고 여기서 시간을 보낼 때, 사전 점검은 당연하니까.
그럼 누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
머리로는 경종이 울리지만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이 발소리.
그리고 아까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던 것이었다.
기대감.
나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 내서 불러 보고 싶지만, 대답이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꾹 참고.
“…….”
또각, 또각.
발소리의 주인이 어둠 속에서 멈춰 섰다.
희미한 달빛에 얼굴의 일부가 간신히 드러난다.
신비로운 미모.
금색 눈동자.
“……스, 스승님?”
나는 반사적으로 불렀지만 상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니 이젠 이름으로 불러야지.”
“아니, 어떻게…….”
내가 반사적으로 걸어가려는데.
우우우웅!
갑자기 내 검이 스스로 날아서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저것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고.
“……뭐야?”
나는 반사적으로 멈춰 섰지만 이 검은 칠성칠요다.
칠죄신을 마지막에 베어 버린 검.
그 친구가 지금 경고하고 있었다.
“…….”
재회의 반가움도 잠시.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시아는 죽었다.
그것도 10년 전에.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
술에 취한 내가 환각을 보는 것? 아니, 그러면 칠성칠요가 이렇게까지 경고할 게 아니다.
그러면 가짜.
적.
“…….”
나는 칼을 잡았다.
취했지만 마력을 일으켜서 술기운을 몰아내고, 적을 주시한다.
하지만 상대는 나직하게 웃었다.
“보고 싶다고, 그렇게 날 보고 싶다고 섧게도 말해 놓고는 실제로 보니 칼을 겨누다니.”
“……너 뭐냐?”
“나도 좀 놀랐어. 아이일 때도 울지 않던 네가, 헌헌장부가 되어서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울지는 않던 네가, 정작 내가 옆에서 사라지니 그리도 원통하게 슬퍼하다니.”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슬픔이라는 건가. 역시 없던 감정을 배우려고 해 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
선공할까?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하시아가 맞을 수도 있다.
나는 호흡을 정돈하면서,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만약 나를 해하고자 하는 적이라면 거리를 좁히려고 하겠지.
“그래, 가 줄게.”
또각또각.
기둥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여자.
발끝부터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시아가 즐겨 입던 하얀 로브가 아니었다.
훤히 드러난 다리, 검은 가죽 스타킹으로 둘러싸고.
매끈한 복부와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는 가죽옷.
아름다운 목덜미, 농염한 미소를 띠는…….
“…….”
뭐야.
나는 얼어붙었다.
하시아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머리에는 두 개의 뿔.
등에는 박쥐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것은 손을 뻗어서 자기 손으로 꼬리를 어루만졌다.
하트 무늬 마크의 꼬리.
“……뭐야?”
“너무 예뻐져서 몰라봤나 봐? 시릭이 한 말.”
“…….”
익숙한 대화.
나는 눈앞의 현실이 뭔지 치가 떨리도록 알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했다.
“……타락했다고?”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다른 종족으로 거듭나는 것.
칠죄신의 무리들은 회생이라고 부르고, 제국에서는 타락이라고 부른다.
종족 자체가 바뀌어 버린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다.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친 종복, 사악하게 변모해서는 인간과 일곱 이종족을 본능적으로 적대했다.
하시아, 아니, 뭔지 알 수 없는 여자는 생긋 웃었다.
“서큐버스 퀸이라고 하더라. 예뻐?”
“…….”
“매일 봤지만 새삼스럽게 예뻐?”
하시아는 자기 목덜미부터 쇄골, 젖가슴까지 손으로 쓸어내렸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야릇하다.
멍해지는 머리.
호흡이 절로 거칠어지고 아래로 피가…….
“으으음!”
나는 반사적으로 염동결계를 발휘했다.
그러자 이성이 돌아온다.
“헉, 허어어억.”
방금 뭐지?
이거 정신 오염 아닌가?
만약 내가 염동결계를 펼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다.
정작 서큐버스는 크게 아쉬워하는 투가 아니었다.
“으음. 왜 막는데?”
“…….”
“이거 하면 남자 되게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다는데. 해 보지 않을래? 싫어?”
마치 침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즐겨 보자는 것처럼.
하시아……와 꼭 닮은 서큐버스가 그리 말했다.
나와 지내던 시절처럼.
으드득.
나는 이를 꽈악 악물었다.
제국은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락한 순간, 사망자로 취급하고는 말살한다.
당연히 인정할 수 없지.
옆에 있던 동료 병사가 칠죄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군에게 칼을 휘두르는데, 그걸 어떻게 인정할까?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친 순간, 그자는 곧 제국의 적이다.
“네가…….”
저게 하시아가 아니라면 당연히 죽여야 하고.
만에 하나.
만에 하나 하시아가……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타락한 것이라고 해도.
당연히 죽여야 한다.
어느 쪽이건 결론은 하나다.
“…….”
하시아 역시 초능력자, 거기다 타락했으니 훨씬 더 강력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국 최강, 그 칠죄신도 무찔렀으니 내가…….
“이유는 안 물어봐?”
“…….”
나는 염동결계를 유지하면서 적의 틈을 노렸다.
이미 나는 결단을 내린 뒤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하시아의 명예는 끝장이다.
내 마지막 아내, 마령화비 유하는 또 얼마나 상심하겠는가?
언니가 칠죄신에게 굴종해서 제국의 반역자가 되었다니.
누구도 모르게 내가 이 자리에서 처리한다.
서큐버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들어 봐야 할 텐데.”
“무슨 이유가 됐건…….”
“황후들.”
멈칫.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서큐버스로 타락해 버린.
내 사랑하는 스승이 고백했다.
“네 아내들 덕분이야.”
듣지 말아야 했다.
너무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