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40화 (13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40)

피에 젖은 꿈

제국군의 본진.

지휘 막사.

“서부 3군단 전멸! 피해 상황은 확인 중입니다!”

총수의 자리에 앉은 나에게 보고가 들려온다.

“적의 숫자는 500? 아니, 2천! 확인 중에 있습니다!”

“하장군 드롯셀 님, 휘하 병력들과 분연히 싸우다가 전사하셨습니다!”

“상장군 브웬 님이 말씀하시길 오늘 저녁까지가 한계라고 합니다! 랑에이 님이 급히 휘하 부대를 파견하셨지만 못 버팁니다!”

“렌시엘 님의 긴급 보고입니다! 적이 로벤의 식량 창고를 급습! 모두 다 불타 버렸다고 합니다!”

“엘프 제5정령궁사부대 전멸! 524명, 전원 물러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끝없는 비보들.

나를 따라 숱한 전장을 거쳐 온 장수들의 얼굴에 주름이 패었다.

“서부 2군단! 패퇴했습니다! 적은, 적은 칠죄신입니다!”

술렁거리는 신음들.

장수들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 아니, 칠죄신이 왜 거기에?”

“어떻게 된 겁니까? 칠죄신은 분명히 북부 전선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폐하! 당장 군대를 돌리셔야 합니다!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아닙니다!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우리는 북부의 적들에게 유린당할 것입니다! 서쪽은 버려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우리의 목적은 칠죄신을 잡는 것입니다!”

“서쪽의 장병들은 다 죽게 놔두자는 겁니까?”

장수들의 비명 소리.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신 아니랄까 봐 신출귀몰하군.”

“…….”

“야, 왜들 그래. 웃으라고 한 말인데, 웃어.”

내가 웃어 보이자 제국군 장수들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래, 총수인 내가 당황하면 안 되지.

나는 가능한 한 가볍게 말했다.

“우린 서쪽으로 간다.”

“폐, 폐하. 그건…….”

“북부의 적은 엔라에게 맡긴다. 이기는 게 아니라 시간만 끄는 거면 충분히 해낼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죄신이 서쪽에 있다는 건 우리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거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비책이 있잖아? 놈을 이 세상에서 추방하기 위한 마지막 수를 쓸 때가 왔다.”

“저기, 폐하.”

그때 녹색 머리카락의 여자 엘프가 발언했다.

상장군 예렌, 엘프 제일의 궁수다.

“송구하지만 서쪽에는 마녀왕 전하께서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안위가 걱정됩니다.”

“걱정할 거 없다. 스승…… 아니, 하시아는 알아서 몸을 뺄 거다.”

텔레포트를 할 수 있으니까.

진작 도망쳤을 거다.

나는 장수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자, 서쪽으로 가서 칠죄신과 일전을 치른다.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다. 모두 내일 아침까지 준비를 마쳐라.”

“제국 만세!”

“폐하 만세!”

내 결단에 제국군의 장수들은 일제히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다들 빠져나가는데 예렌이 서 있었다.

나는 지도를 보려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왜? 예렌, 무슨 문제라도 있어?”

“……폐하.”

예렌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내게 다가왔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입니다만. 그러니 부디 침착하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뭔데 그래?”

“……하시아 전하께서 칠죄신에게 사로잡히셨다고 합니다.”

“…….”

나는 가만히 예렌을 바라보았다.

원래 전장에는 온갖 풍문이 떠돌아다닌다.

황제인 내가 팔이 여덟 개가 달렸다거나, 모든 이종족의 피가 섞였다거나.

출처 불명, 근거 없는 이야기는 많았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야,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승님은 걱정할 거 없어.”

“그게…… 한둘이 아닙니다.”

“…….”

내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 간다.

내가 시선으로 재촉하자 예렌은 더듬더듬 말했다.

“……2군단의 병사들이 돌아오면서 전해 온 이야기입니다. 하시아 전하께서 칠죄신과 거래를 하셨다고 합니다. 병력들을 살려 주는 대신에 혼자 남으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칠죄신이 왜 그러는데?”

나는 정색했다.

“그놈은 그런 거래에 절대 응하지 않아. 그냥 싹 다 죽이는 거 알잖아?”

“압니다. 알지만…….”

“…….”

예렌이 계속 말하자 나는 이마를 눌렀다.

하시아가 죽었다?

텔레포트로 달아나면 그만인데?

“……말도 안 된다니까.”

불길한 예감.

내 귀가 뜨거워진다.

나는 하시아와 30년을 함께 지냈다.

그런데…….

“폐하! 급보입니다!”

뛰어 들어온 건 상장군, 사자 수인 락셀과 마족 체스터였다.

둘 다 내 발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외쳤다.

“방금 다크엘프 특병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하시아 전하께서 칠죄신에게 사로잡히셨다고 합니다!”

“어서 구출 작전을 세우셔야 합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현기증.

“폐하!”

예렌의 비명.

비틀거리던 나는 책상에 손을 얹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폐하! 소신이 지금 당장 하시아 전하를 구출하겠습니다! 부디 저를 보내 주시옵소서!”

“폐하, 락셀은 너무 거칩니다. 신, 체스터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제국에서 기라성 같은 상장군들이 앞을 다투어 말한다.

너무나 믿음직한 이들이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 돼. 구출 작전은 없다.”

“폐하! 하시아 전하께서는…….”

“지금 들어오는 보고가 사실이라면 하시아는 죽었다.”

의외로 말은 쉽게 나왔다.

내 친구, 내 신하가 죽는 일은 너무나 많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크엘프의 보고는 교차 검증을 3회 거치지. 지금까지 틀린 적은 네 번, 그러니 하시아는 전사했다.”

“폐하, 아직 모릅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하다못해 살아 있으신지 확인부터…….”

예렌이 나서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 못 한다. 칠죄신의 소굴에 들어가면 절대 무사히 못 나와.”

“폐하, 그래도 하시아 전하께서는…….”

“죽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칠죄신이 그녀를 살려 둘 리가 없다.

설사 숨이 붙어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군과의 결전장에서 바로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예렌이 다시 말했다.

“폐하, 그래도 만에 하나…….”

“그 만에 하나 때문에 너희들과 병사들을 죽게 할 순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는 제국군 총수의 명령이다. 하시아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체스터, 이셀렌에게 정보 통제하라고 전해.”

“……비밀로 하시겠다고요?”

“너희들처럼 구하겠다는 애들 나온다. 그래서는 안 돼.”

나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우리가 무슨 대가를 치르고 여기까지 왔더냐? 락셀, 네 약혼자인 브리엔이 죽었고, 예렌, 네 동생인 유센도 죽었다. 체스터, 너 또한 부대를 이끌다가 전멸한 적이 있지 않더냐.”

“…….”

“수많은 장병들이 죽어 나갔다. 이제 결전이 코앞인데 헛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예렌이 간절하게 말했다.

“폐하, 하시아 전하는 폐하의 소중하신 반려 아닙니까. 사태가 다릅니다.”

“다를 게 없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꿈, 우리들의 꿈, 제국의 꿈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시아가 특별 취급을 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폐하, 그분은 황후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분이시자, 또 폐하의 스승이신…….”

“그래, 사적으로는 내 소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하시아를 구하려고 했다가는 너무 많은 병사들이 죽는다. 칠죄신의 함정인 게 훤히 보이는데 거기에 끌려갈 수 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칠죄신의 손에 떨어진 순간, 멀쩡할 리가 없다. 이미 온갖 고문을 당해서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을 거다. 제국군의 규범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를 바랄 따름이다.”

“폐하, 어찌…….”

“……그만하자.”

나는 얼굴을 가렸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달려가고 싶었다.

나는 왜 텔레포트를 제대로 못 하는가 생각만 들고.

예렌과 락셀, 체스터를 비롯한 장군들에게 맡겨 볼까 생각도 든다.

“……그냥.”

그냥 내 소중한 가족이니까 구출하자고.

이 한마디만 하면.

제국의 모든 장병들은 기꺼이 나를 위해서 그래 줄 것이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피를 바칠 것이다.

그들이 믿는 내가 원하니까.

그럴 수 없다.

모든 작전 계획이 세워졌고 건곤일척의 결전만이 남았다.

시간도, 병력도 없다.

하시아를 구하겠다고, 이 20년간 죽어 간 수많은 전우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혼자 있게 해 줘라.”

“……그럴 수 없습니다, 폐하.”

예렌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 어깨를 손으로 누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폐하의 뜻은 알겠지만 그 명령은 받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

“락셀, 체스터.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칠죄신은 포로를 잡지 않습니다.”

예렌은 애써 말했다.

“……폐하를 동요하게 만들려는 함정입니다. 누가 가건 다 당합니다. 계획대로 칠죄신을 추방하려면 우리들이 폐하를 받쳐 드려야 합니다.”

“하, 하지만…….”

내가 정리했다.

“출진 전까지는 비밀로 한다. 만약 적이 진군해 온다면 결전지는 워길드나 탈론 평야, 둘 중 하나가 될 거다. 만에 하나…… 칠죄신이 하시아를 인질로 전열에 내세울 수도 있으니 전장에 도착 직후에 장군들에게 알려라.”

“…….”

“절대 봐주지 말라고 전해라. 하시아의 숨이 붙어 있다면 내 손으로 베겠다.”

온건하던 체스터가 부르짖었다.

“폐하!”

“그래야 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다. 너희들은 못 할 테니 내가 직접 처리한다!”

다들 나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한참의 침묵.

문득 내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12년 전의 일이다. 쿼드론 회전, 나는 대패해서 달아나고 있었다. 추격해 오는 칠죄신의 종복들을 막고자, 내 병사들은 하나하나 시간을 벌겠다고 목숨을 걸었다. 다크엘프 한스, 인간 이븐, 수인 갈로즌까지. 모두 다.”

“…….”

“전우들이 나를 위해서 시간을 끌고, 하나둘씩 전사하고 결국 난 혼자 남아서 달아났다.”

장군들이 새삼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니까.

“포위망은 좁혀지고 나는 절체절명이었다. 체력은 떨어지고 말도 지쳤다. 그때, 민가가 나타났다. 나는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민가의 문을 두드렸다.”

“…….”

“나온 건 인간 노인 부부였다. 두 사람은 내 복장을 보고, 바로 알아보았다. 제국군 총수인 시릭 님이십니까? 얼른 여기에 숨으시죠. 두 사람은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비밀 저장고에 나를 숨겨 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추격군이 들이쳤다. 칠죄신의 종복들은 나를 보지 못했냐고 두 노인을 위협했다. 당연히 말뿐이 아니었다. 끔찍한 비명과 소리들이 들려왔다.”

“…….”

“그래도 두 사람은 내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예렌이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내가 밖으로 나갔다. 부부 중 남편은 죽었고, 아내도 죽어 가고 있었다.”

그 광경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두 사람을 본 순간…… 나는 순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었다. 내가 대체 뭐기에? 내가 칠죄신에 대항한다는 게, 이 선량한 부부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인가?”

“폐하.”

“나는 두 노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죽어 가는 아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씀하시더군.”

절대 잊지 못할 이야기를.

“저희 두 사람의 아들과 손자는, 제국군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을 옳다고 믿고, 당신을 따르겠다고 뛰쳐나갔지요. 그리고 죽었습니다.”

“…….”

“남편은 당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저는 세상일은 잘 모릅니다. 그저, 아들과 손주가 죽은 게 헛된 일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겁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나에게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부디 사악한 신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우린 당신을 믿었으니까.”

정적.

나는 이야기를 끝맺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말하지 마라.”

“……폐하.”

락셀은 괴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터는 어찌나 분하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흘러나왔다.

예렌은 소리 없이 흐느끼면서 어깨를 떨었다.

나는 짐짓 웃어 보였다.

“자, 이야기는 끝이다. 둘 다 돌아가서 출진…… 준비해라.”

“……곁에 있어 드리면 안 될까요?”

예렌이 안타깝게 말했다.

나는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눈물에 젖은 눈으로는 활도 제대로 못 쏜다. 가서 정비해라. 내일 진군한다.”

“알겠습니다.”

“……예, 폐하.”

다들 물러갔다.

총사령관의 막사에 나 혼자 남았다.

밖에서 호령하는 장군들과 병사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들.

“…….”

하지만 내 귀에는 멀게만 들렸다.

가슴에 들리는 문장은 하나.

하시아가 죽었다.

하얀 눈송이가 휘날리던 날, 나에게 꿈을 이루러 가자 말한 스승은.

이 꿈은 피를 부른다면서 포기해도 된다고 말한 연인은.

행복해야 한다면서 가 버렸던 아내는.

이제 없다.

나를 떠난 수많은 전우들처럼.

영영 가 버린 것이다.

뚝.

“…….”

눈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짐짓 웃었다.

힘들 때 웃는 게 일류다? 그게 아니다.

“아, 진짜. 그래요. 당신이 못 우니까 내가 울게 되네. 이딴 약속 하지 말라니까.”

스르릉.

그때 서늘한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검들이 날아왔다.

일곱 자루의 검.

칠죄신을 칠 수 있는 칼, 칠성칠요.

하시아와 함께 찾아낸 비보.

“……그래.”

과묵한 검,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알았다.

하시아는 죽었지만.

“가자, 친구.”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파군의 칼자루를 꽉 잡았다.

칠죄신.

사람의 생명을 멋대로 유린하면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능멸해 온 사악한 신.

반드시 타도해야 할 적이지만 이제 개인적인 한도 하나 생겼다.

내 스승, 내 동지.

내 아내의 피 값을 받아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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