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39)
Au Revoir
싸움이 이어졌다.
싸우고 지고 도망가고, 다시 일어서고 이겼지만 지고.
나는 다시 일어나고, 내 사람을 늘려 나갔다.
그렇게 싸우기를 어언 20년.
끝끝내 살아남으면서 투쟁하고, 점차 성과를 거두는 나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류의 힘.
제국군과 칠죄신의 최종 결전이 임박하게 되었다.
“후우.”
그리고 나는 목욕물에 잠겨 있었다.
오랜만에 도시에 들어와서 씻는 중이다.
“으으응.”
내 앞에 앉아 있는 은발의 다크엘프가 귀여운 소리를 낸다.
이셀렌은 물에 잠긴 내 손을 꺼내더니, 하나하나 잡고 문질러 주었다.
“안마냐?”
“응.”
주물주물.
암살여왕이라고 불리면서 수많은 피를 뿌린 이셀렌이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순한 양이다.
결혼한 사이.
하지만 봐도 봐도 사랑스럽다.
이셀렌이 풀어 준 손을 가져온 나는 그녀의 어깨, 이어서 목 그리고 뺨을 어루만졌다.
이셀렌은 자기 뺨을 내 손에 문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이빨로 손가락을 물었다.
깨물깨물.
내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가락을 움츠리자, 이셀렌은 방금 물어 댔던 손가락을 핥아 주었다.
찰방거리는 물소리에 야릇한 소리가 섞인다.
“으음.”
나는 이셀렌에게 손을 맡겨 두고는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칠죄신의 종복들, 그 정예군을 잡는 포진은 완성됐다.
이번 전투만 이긴다면 칠죄신을 잡을 수 있다.
“……실감이 안 나네.”
내가 혼잣말을 하자, 이셀렌이 내 손가락을 핥던 걸 멈추고는 몸을 돌렸다.
서로 바라보고 앉은 자세.
가슴을 맞대고 밀착한 이셀렌은 내 목을 양팔로 끌어안고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내가 이러는 게?”
“라그리즈는 나하고만 있으면 이렇게나 사랑스럽지.”
“…….”
연갈색 뺨이 살짝 상기된 이셀렌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목을 장난스럽게 깨무는 어리광.
나는 이셀렌의 목을 안고는 한숨을 쉬었다.
다크엘프는 약하다.
칠죄신의 아래에서 정보 전달 능력만으로 필사적으로 살아온 그들은 온갖 암계와 공증인으로서의 신뢰로 생존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이 다크엘프들을 제국에 합류시키는 데에는…… 이셀렌의 결단이 매우 컸다.
그녀는 자기 한 몸이 아니라 4천만에 달하는 목숨을 내게 건 것이다.
“…….”
이셀렌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 아니 여자만이 아니다.
남자도, 아이도, 어른도.
제국의 모든 생명들이 나를 믿고 따라오고 있었다.
내 꿈, 칠죄신을 없애 버리고 좀 사람답게 살아 보자는 이 꿈.
이 꿈을 믿고 죽어 간 사람이 수십만 명이다.
성공해야 한다.
“후우.”
말로 표현해서 수십만이지, 실제로 퇴각하면서 죽어 가는 병사들을 봤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
내 목에 키스하던 이셀렌이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다른 생각 해?”
“행복해서 멍해졌어.”
한참의 침묵.
이셀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이…… 갖고 싶어.”
“오늘은 하루 종일 힘내야겠군.”
“장난이 아니라…….”
이셀렌은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웃었다.
“엘프 공주님이 내 아이 가졌다는 소리에?”
“…….”
이셀렌이 이러는 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나는 지금 세계의 절반을 석권한 제국군의 총수, 그리고 내 아래 모인 종족의 여성들을 배우자로 삼았다.
일반적인 혼사가 아니다.
혼인으로 맺어진 동맹, 훗날의 권세 약속이다.
물론 나는 내 아내들을 사랑하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지.
가령 내가 렌시엘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천족의 지원을 얻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치료약 지원도 없었을 테고.
제국군의 무수한 부상자들을 살려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렌시엘하고 결혼해서 어림잡아 10만 명 이상을 살렸다.
내 아내들은 제국의 권력과 종족의 앞길이 얽힌 복잡한 문제였다.
제국군의 총수인 나는 그 문제를 헤아려서 다뤄야 하고.
나는 짐짓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 라그리즈를 자주 사랑해 줘야겠네.”
“……그게 아니라.”
나약한 목소리.
더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셀렌에게 입을 맞췄다.
걱정하던 암살여왕이 눈을 감는다.
뜨거워지는 숨결.
하지만 이셀렌은 다시금 고개를 움츠렸다.
“……혹시 안 될지도 몰라서.”
“응?”
“다크엘프는…… 인간하고 혼인하는 일이 없으니까.”
그제야 이셀렌이 뭘 걱정하는지 이해가 갔다.
인간과 일곱 이종족.
칠죄신의 아래에서는 서로 교류가 뜸하던 이들이다.
인간―엘프, 인간―수인, 인간―마녀는 자손이 나온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었다.
다른 종족과 절대로 혼인하지 않기로 유명하던 천족, 렌시엘도 내 딸아이를 가졌다.
엔라도 내 장남을 가졌고.
하나둘씩 아이를 가졌고, 이제 마지막까지 남은 건 다크엘프 이셀렌이었다.
“……혹시 안 되는 걸지도 모르니까.”
이셀렌이 울적해했다.
온갖 정보를 다루고, 요원들을 부려서 증거 하나 없이 암살하고 다니는 여왕님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고민에 한숨짓는 아내였다.
“나랑 하는 게 싫다고?”
“아, 아냐. 엄청 좋아. 좋지만…….”
이셀렌이 툭,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혹시 괜히 헛된 기대 하게 만들면 미안하니까. 당신에게도, 다른 여자에게도…….”
“난 그냥 섹스 하는 게 기분 좋아서 매일매일 하고 싶은데. 15분도 안 지났는데 또 하고 싶어지는데.”
“…….”
진심이면서도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아내와의 잠자리가 즐거운 건 당연하지만…… 내 아이를 손으로 안아 보았을 때의 감동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주변에는 언제나 죽음이 어른거렸다.
칠죄신이 보낸 암살자가 느닷없이 달려들고, 패주하면서 전우들이 나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걸 숱하게 봐야 했다.
그런 나에게 생명의 탄생, 내 핏줄을 안아 본다는 건 세상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내 여자가 고민으로 울적하게 둘 수도 없지.
“그럼 당분간 너하고만 할까. 라그리즈와의 잠자리가 너무 좋아서 흠뻑 빠졌으니까.”
“……무, 무슨. 그런 소리 하지 마.”
이셀렌이 내 가슴을 톡 때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긴 귀에다가 속삭였다.
“사실인데. 이제부터 또 할 거고.”
“아, 안 돼.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러면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 네가 해 줘.”
“…….”
이셀렌이 부끄러워하면서 눈을 흘겼다.
수줍게 달아오른 뺨, 일렁거리는 자수정 빛 눈동자.
요염한 다크엘프의 마음에도 불이 붙었다.
“정말…….”
나는 웃으면서 이셀렌의 허리를 잡고는 내 쪽으로 당겼다.
내 고민, 그녀의 고민 같은 건 서로 이렇게 섞이다 보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이셀렌이 자세를 고치려는데…….
드르륵.
갑자기 욕실 문이 열렸다.
이셀렌은 순간 정색하고는 사나운 얼굴이 되었다.
나하고 단둘이 있을 때만 풀어지는 거지, 그녀는 평소에 냉혹무비한 여왕이다.
이런 무례한 방문자쯤은 단숨에 찢어 죽일…….
“아, 미안하다.”
하지만 들어온 여성.
내 첫 번째 아내.
하시아는 예외다.
“스승님?”
나는 만사 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말하려던 하시아는 내 아래를 빤히 보고는 말했다.
빤히.
“아, 미안하다.”
“……아니, 왜 같은 말을 반복하십니까? 뭐 어쩌라고요?”
“그쪽에도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말로만 사과하지 마시고 좀 더 행동적인 사과를 해 주시죠?”
나는 지지 않고 맞부딪쳤다.
그러자 하시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
“으아아! 진짜 하려고? 당신 뭐야!”
“이걸 원한다고 말한 건 너잖아? 제자가 이리도 화났으니 스승이 달래 줘야지. 이것도 시릭이 한 말.”
“아니, 좀!”
“벗고 있는 네가 잘못한 거야. 이것도 시릭이 한 말.”
하시아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말했다.
“아, 이셀렌은 같이 하는 걸 싫어하던가? 방해해서 미안해.”
물러나서 팔로 몸을 가린 이셀렌은 표정 없이 하시아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경계하는 얼굴.
하시아는 다른 아내들하고 이래저래 사이가 별로다.
나는 중간에서 중재했다.
“아무튼 뭔데요? 이야기할 거면 나갈게요.”
“할 말은 두 가지가 있어. 개인적인 기쁜 소식은 나중으로 미뤄 두고, 잠깐 서쪽을 둘러보고 올게.”
“예? 그쪽은 왜요?”
“칠죄신의 잔병들이 서쪽을 두드리려 하고 있어. 숫자 파악은 안 되는데…….”
듣고 있던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봐야 수백, 천도 안 되는 병사들입니다. 서쪽을 지키는 아군은 군단 병력만 셋, 하시아 씨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
이야, 이셀렌 화났네.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도 화가 나는데, 아까 하시아의 제스처가 성질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와 스승님은 서로 장난친 거지만.
하시아는 내 첫 아내, 알고 지낸 기간이 남다른 데다가 원래 죽이 맞는다.
하시아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뭔가 이상해서. 좀 보고 올게. 병사 백 명만 끌고 갈 테니까.”
“아, 1주일 안에는 돌아오셔야 해요? D―day니까.”
뭐, 문제없겠지.
하시아는 여차하면 텔레포트를 할 수 있으니까.
한데 하시아가 갑자기 웃었다.
“나 없이도 혼자 잘 할 수 있잖아?”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세요? 이제까지 쭉 같이 했는데, 결전에도 함께해 주셔야지.”
“그래, 그런가? ……그래.”
하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시릭.”
“예?”
“그 어린아이가 이리도 장성해서는 마침내 꿈을 이룰 때가 왔구나. 많이 불안했는데, 여기까지 오니 참…… 감개가 무량하다.”
“…….”
“너는 나에게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나야말로 너에게 많이 배웠다. 이런 능글맞은 소리를 하는 점, 사람을 대하는 법, 너를 몰랐다면 영영 몰랐겠지.”
“그래요, 내가 알몸만 아니었으면 참으로 감동적이었을 거예요.”
하시아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고맙다. 잘 자라 줘서.”
“……미치겠다, 진짜.”
“다 너한테 배운 거라니까?”
하시아는 빙긋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행복해야 한다, 시릭.”
“잠깐, 지금 바로 간다고요? 제대로 인사해야죠.”
“나오지 마. 곧 다시 보게 될 텐데.”
하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그래도 내가 허둥지둥, 벽에 걸린 수건을 잡으려고 하는데.
첨벙!
이셀렌이 내 어깨를 잡아 앉히고는 올라타 버렸다.
“……으음.”
나를 멈춰 버린 이셀렌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늘 저런 식이네.”
“……아, 마녀라서 그래. 너무 미워하지 마.”
“마녀들도 저 사람은 싫어하는데?”
“뭐?”
“…….”
이셀렌은 말하고도 후회 어린 기색이었다.
하지만 짐작이 갔다.
초능력.
스승님은 나에게 전수해 준 힘, 사실 이건 마녀들의 비술(秘術)이었다.
일자전승의 비밀 병기.
그런데 하시아는 덜컥, 인간 남자인 나에게 물려준 것이다.
마녀들 사이에서 하시아의 평가가 나빠질 만도 했다.
내가 칠죄신의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 최종 결전까지 다다랐으니 대놓고 말은 안 나오지만.
“…….”
이셀렌은 당연히 이걸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겠지.
그런데도 말하지 않았던 건, 내게 하시아가 남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승, 연인이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함께해 온 파트너.
내 꿈의 시작 지점.
“라그리즈.”
“…….”
하지만 이걸 구구절절하게 말해 봐야 이셀렌은 마음만 상하고, 더 토라지겠지.
내 첫 아내라지만, 여왕인 그녀가 존대하고 씨라는 존칭까지 붙이잖아.
이셀렌이 하시아를 얼마나 어려워하고, 복잡한 마음인지 알려 주는 증거였다.
다른 아내들도 마찬가지지만…….
칠죄신을 없애고 전쟁을 마무리하면 다 끝날 일이다.
이게 내 눈으로.
마녀 하시아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