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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38화 (137/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38)

선택의 순간

나는 하시아와 함께 카라카스를 떠돌았다.

정처 없는 여행.

사흘에 한 번은 전투가 벌어졌다.

야생동물을 시작으로 산적, 때로는 본격적인 무장 병력까지.

툭하면 내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하시아가 든든한 방어벽이 되어 줬냐고?

그녀는 나를 훈련시킨다는 이유로, 여간해서는 나서지 않았다.

나도 동의했고.

카라카스에서는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겪어야 강해지니까.

굶주리지 않으니 행복한 거지.

싸우고 지식을 배우고, 각 종족의 문자를 익히고 다시 싸우고.

그렇게 10년.

나, 시릭은 스무 살이 되었다.

오랜만에 도시다.

여관 겸 술집.

짐을 푼 나는 바로 내려갔다.

몸이 더러워졌지만, 일단 먹고 나서다.

“아, 또 사고 안 쳤으면 좋겠는데.”

하시아가 먼저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름다워서 사람 눈에 확 띄는데, 나사 빠지게 굴어서.

혹시 모르니 내가 옆에 있어야 한다.

애도 아닌데 신경 쓰는 게 귀찮지 않냐고?

10년 동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온갖 지식을 알려 주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일자전승의 초능력까지 전수해 주었다.

“진짜 스승의 은혜가 하늘 같은데…….”

내려간 나는 멈칫했다.

백청발, 하시아의 머리카락은 어디서도 눈에 확 띈다.

한데 이번에는 마주 앉은 여자가 있었다.

누구지?

내가 멈춰 서서 살피는데 하시아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10년이 지나도 손발을 맞출 생각을 안 하시네.”

하시아와 마주 앉은 여자가 나를 쏘아보았다.

단정한 미모.

겉은 검고 속은 빨간 머리카락, 로브를 입은 걸 보니 마녀였다.

“당신이 시릭인가요? 저는 유하라고 합니다. 하시아의 여동생이죠.”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말한 적 없는데?”

하시아가 의아하게 물어도 나는 모른 척했다.

유하는 대뜸 말했다.

“두 분이서 아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그만두세요.”

“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의아하게 보는데 유하는 하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언니, 원로회에서 출석 요구가 있습니다. 당장 돌아오세요.”

“돌아가면 근신하라고 하겠지? 안 돌아가.”

“언니, 슬슬 후보도 정해야 하니…….”

“시릭에게 이미 물려줬는데?”

“……예!”

하시아는 말 대신에, 텅 비어 있는 맥주잔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휙!

내가 반사적인 염동력으로 낚아채자 하시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착실하게 수련 중.”

“어, 언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죠! 그, 그건…….”

“초능력은 마녀들 사이에서 대대로 계승되는 비술, 밖으로 유출해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이해할 수 없어요. 언니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러는 거죠? 이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한데요!”

“남자는 아래로 말하는 법.”

하시아가 진지하게 말하자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스승님. 그거 하지 말라니까.”

“왜? 난 감동했는데. 어제 강도들 두들겨 패면서 말하는 게 멋졌어, 시릭.”

“지, 지금 제정신이에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언니는 마녀의 적이에요! 아니, 이 인간도…….”

“내 제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

서늘한 목소리.

하시아는 나사가 빠지고 슬픔은 모르지만, 분노는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시아는 정색했다.

“원로회에 전해. 허튼짓하면 나도 작정한다고. 파군은 마지막에 찾으러 가겠다고 전하고.”

“……언니는 늘 마음대로 행동하고 방종해요. 정말 마녀들 전부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에요?”

“우리가 친구도 아니었잖아? 아, 이것도 시릭이 한 말.”

하시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유하는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어째 못된 것만 가르친 죄인이 된 심정이라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하는 테이블을 짚고는 일어났다.

“……일단 다시 올게요. 더는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얼굴 봐서 좋았어. 사랑해. 이건 내가 한 말.”

“…….”

유하는 곤혹스러워하다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났다.

나는 일단 물었다.

“자매라고요?”

“예쁘지? 결혼할래?”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으니까 농담은 아니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하시아는 검지로 턱을 긁었다.

특유의 버릇.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설마 나에게 초능력 물려준 거. 금기였어요?”

“정신의 힘은 마녀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비술이지. 하지만 엘프의 정령마술처럼, 마녀 전용이라면 존재를 꽁꽁 감출 필요도 없잖아?”

미리 시켜 놨는지 웨이트리스가 술잔 두 개를 가져왔다.

하시아는 흑맥주가 꽉 찬 술잔을 두드리며 말했다.

“초능력은 아무 종족이나 쓸 수 있어. 그럼 마녀들만이 독점할 이유는 없지.”

“세상일은 그렇게 안 돌아가죠.”

하시아의 동생, 유하가 기겁한 이유가 이해가 갔다.

마녀들의 비술을 인간인 나에게 넘겨주다니.

하시아는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했지만, 초능력을 다루는 걸 보면 마녀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하시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차하면 유하하고 결혼해. 그리고 유하의 딸에게 초능력을 물려줘. 그러면 마녀들도 더는 문제 삼지 않을걸.”

“말을 참 쉽게도…….”

“네 꿈을 위해서는 결혼이 가장 빠른 길인데?”

나는 정색하고 주변을 살폈다.

내 꿈.

칠죄신을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하시아는 깍지를 끼고는 나를 보았다.

“인간과 일곱 이종족은 서로 제대로 된 교류를 한 적이 없어. 가끔 서로 섞여도 단발성, 역사의 흐름에서 순식간에 휘발될 뿐이지. 네 꿈을 정말 이루려면 너 혼자서는 안 되고 인간만으로도 안 돼.”

“…….”

“모든 종족이 하나로 뭉쳐서 일어나야 해.”

“정략결혼이라고요?”

나는 바로 이해했다.

10년 동안 정치, 문화에 대해서도 하시아에게 교육을 받았고 또 내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

이제 대등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다.

하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적이지만 그만큼 잘 먹히지.”

“하지만 이종족은 일곱이잖아요. 그걸 어떻게…….”

“결혼을 일곱 번 해.”

“…….”

스승, 미쳤어?

내가 무슨 태조 왕건도 아니고.

하시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넌 남자답게 잘생겼지만 어차피 이종족들에게 외모만으로 어필하는 건 한계가 있지. 마음을 사로잡아.”

“그런 건 말하기 전에 복선부터 좀 깔아 줘요.”

“남자를 부하로 삼고, 여자를 사로잡아. 어린아이를 네 수하로 들이고, 노인이 너를 위해서 죽게 해. 네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해.”

역시 하시아는 대화 능력에 문제가 있다.

하시아는 담백하게 물었다.

“아니면 꿈을 포기할래?”

“예?”

“마녀들이 모여 사는 곳, 발푸르기스는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아. 하지만 세상일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지. 너는 초능력을 가졌으니 특별한 손님으로 대접받을 수 있어. 유하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초능력을 전수해 준다는 명목이면? 네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발푸르기스에 머무를 수 있어.”

“…….”

하시아는 준비해 뒀단 투로 말했다.

“발푸르기스에서 머무르면 칠죄신의 더러운 짓도 덜 봐도 돼. 거긴 최소한 굶주리는 아이들은 없으니까. 그리고 방금 본 내 동생은 예쁘고 귀여우니까 남자로서 만족스러운 배우자겠지.”

“잠깐만요.”

“불만스러워? 하지만 유하의 대모, 카미르의 비호를 받으려면 그게 가장 나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만약 그런다면 스승님은 어쩌시게요?”

하시아는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지금 널 나무라려는 게 아니야. 너도 이제 충분히 성장했고 선택지를 알려 주는 거야. 어린 시절의 꿈을 꼭 이뤄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이제까지 함께해 왔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소리를…….”

“양자택일이 아니야. 만약 네가 발푸르기스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면, 나도 그리할 거야. 너와 내 동생, 그리고 조카를 지켜보고, 네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침대 옆을 지켜 줘야지.”

하시아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네 딸의 대모가 되겠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장쾌한 가족계획을 세우셨네요. 술 마시고 꿈나라 이야기 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면 네 꿈을 어린 시절의 소망이라고 슬그머니 덮어 버릴 수 있다는 거지.”

하시아는 조용하게 말했다.

“지금 세상은 사람이 툭하면 굶어 죽고, 장래 희망은 신의 노예인 세상, 지옥이지만 안에서도 계급은 있지. 그리고 나는 내 제자가 적당히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놨어.”

“…….”

“지금 세상의 기득권은 칠죄신과 그 종복들이야. 네 꿈을 이루겠다면 결국 칼을 들어야 해.”

하시아는 나를 빤히도 바라보았다.

“네 꿈은 수십만 명을 죽게 할 거야. 그건 아주 괴로울 거고.”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략결혼 생각은 없습니다. 하게 되더라도 상호 간에 어느 정도 호감은 있어야죠. 유하 아가씨는 나를 스승님을 망친 놈팡이로 보던데.”

“네 칭찬을 많이 하니까 싫어하더라고.”

“…….”

집 나간 언니가 이상한 인간 남자랑 단둘이 10년이나 여행 다니면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물었다.

“내가 발푸르기스 안 들어가는 경우에는 따로 계획이 있겠죠? 우리가 10년 동안 맛집 탐방만 다닌 것도 아닐 테고.”

“별 중에서 제일 밝은 별은 칠성, 어둠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태산북두이니라.”

아이들이 부르는 민요였다.

내가 의아하게 보는데 하시아가 설명했다.

“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어. 일곱 별의 이름을 가진 일곱 자루의 검이 있지.”

“…….”

“발푸르기스에 한 자루가 있어. 그리고 이종족마다 그 강력한 검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단서라도 있을 거야. 우리는 이 단서들을 10년 동안 긁어모았고.”

“그게 칠성칠요군요.”

하시아는 좀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그걸 말했던가?”

“10년을 같이 다녔는데 당연히 눈치를 채죠.”

“음, 다크엘프들의 정보망에 안 걸리게 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 하지만 이것도 슬슬 끝이고.”

하시아가 나를 보았다.

선택하라고.

“칠성칠요를 찾는 길과 발푸르기스에 은거하는 길, 전자는 피를 많이 볼 거라 이거군요. 찾으러 갑시다.”

“좀 더 생각해 봐도 되는데.”

“벌써부터 은거하고 싶지도 않고,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노예로 살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걸 많이 봤습니다. 설사 발푸르기스에 숨는다고 해도, 칠죄신의 노예 인장은 찍어야 할 거고요.”

“…….”

“노예로 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앞의 맥주잔을 염동력으로 들어 보였다.

하시아 역시도 염동력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쨍!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흑맥주가 금방이라도 넘치려고 했지만,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염동력으로 조절해서는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아니, 나만 그랬고 하시아는 튀어서 흘러내리는 맥주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고 있었다.

“…….”

저런 모습도 아름다워 보이다니.

기가 막혀서 보자 하시아는 옆머리를 넘기면서 말했다.

“매일 보고 있지만 새삼스럽게 너무 예뻐? 이것도 시릭이 한 말.”

“응, 예쁘네.”

“…….”

하시아가 당황한 반응이었다.

나도 덩달아서 당황해 얼버무려 버렸다.

“……이거 마시고 일어납시다.”

“그럴까…….”

어색해진 분위기.

더는 오갈 말도 없는데.

우리 둘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그냥 앉아 있었다.

새삼스럽게 서로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다르게 보게 된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되었다.

누가 먼저 손을 뻗었는지.

그걸 생각하기도 전에 시작해 버렸고.

시작하니 멈출 수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사정에 망설이기도 했고, 그만둘 이유를 애써 찾았지만.

불안함을 달래려는 갈망, 외로움을 채우려는 갈증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하나가 된 게 가장 행복했다.

함께 잠든 침대에서 아침을 맞아서.

내가 먼저 눈을 떠서 당신을 바라보고.

잠시 뒤에 일어난 당신이 웃으면서 새삼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리는 게.

너무나 사랑스러웠는데.

영원히 함께라고 믿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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