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34)
찢었다가 붙었다가
카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이 자리의 사람들을 물려 주시죠.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입니다.”
“…….”
“내가 지금 대답할 마음을 품은 건, 당신이 마녀들의 원로라서가 아닙니다. 내 아내를 길러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만 외인(外人)이 들어도 될 이야기는 아닙니다.”
카미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두 나가서 기다리세요.”
“…….”
마녀 원로들은 호기심과 불만이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는 다들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건 나와 유하, 그리고 카미르였다.
카미르가 내게 시선을 보내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전후 사정을 말하자면 제법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편하게 할 이야기도 아니고요.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생각했다.
역시 피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고 싶습니다.”
“예?”
“황자와 황녀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가능하면 몰랐으면 했고요. 하지만…….”
메이호는 그 일로 크게 오해해서 랑에이와 틀어졌다.
지금도 편한 관계는 아닐 것이다.
거기다 엔라는 아예 반란까지 일으켰다.
정말 이중 스파이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내 아들, 엔라의 아들인 장남은 대체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까.
하나하나 짚어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내 가족이 엉망이 됐네요.”
“…….”
“내가 한다고 했는데. 한 번 고꾸라져서는 일어나질 못하네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장모님. 따님을 데려가 놓고…… 뭐 잘한 게 없습니다.”
“당신이 잘한 게 없다면 세상 누구도 잘한 게 없습니다. 시릭. 당신은 여전히 제국의 영웅이고, 내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카미르는 내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따라 사악한 신과 맞선 전쟁, 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시아가 사람을 참 잘 골랐…….”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카미르의 말을 끊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더는 숨길 수가 없을 것 같고요. 숨겨도 결국 남의 입으로 듣게 될 것 같아요. 괜한 오해를 더 키우기 전에 그냥 내 입으로 하는 게 낫겠죠.”
“그러면 황도에서 이야기하자는 건가요?”
“예. 둘째 아들 오르카, 둘째 딸 메이호, 그리고 넷째 딸 리세라가 있는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교차 검증을 위해서 황후들이 있는 것도 나을 것 같군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황후들에게는 괴로운 이야기가 될 테니 동석 여부를 물어보겠습니다만.”
“참가할게요.”
지켜보던 유하가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각오를 굳혔다.
“전 참석하겠습니다. 피하고 싶지 않아요. 반드시 참석하게 해 주세요.”
“……그렇다는군요.”
카미르는 유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령화비 전하, 지금 곧 황도로 올라가실 채비를 갖추시죠.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예.”
유하는 몸을 돌려서 나가 버렸다.
황망한 발걸음.
카미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공포를 모르던 아이인데, 지금은 겁에 질려 있군요. 당신이 저렇게 만든 겁니다.”
“……욕이 아닌 건 아는데, 그렇게 들리네요.”
마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감정, 칠정(七情)이 하나 상실되어 있다.
유하 같은 경우에는 공포를 모르고 태어났고.
카미르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나무라겠습니까? 아까 다소 과하고 엄하게 말씀드린 건 송구합니다. 다들 보는 앞이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저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예. 다른 원로들의 불평불만을 사전에 차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의 장모인 카미르가 엄히 따져 물으면 다른 이들의 입이 막힌다.
엔라와의 싸움, 기타 복잡한 이슈들에 대해서도.
카미르가 싹 정리해 준 것이다.
“그러면 한번 사위님을 안아 봐도 될까요?”
“장모님의 말씀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카미르는 나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합니다. 보아하니 아주 괴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약속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밖에다 하지 않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미르는 내 등을 쓸어 주다가 물러났다.
“그러면 제국 정부와 합의를 마치기 위해서 마령화비 전하와 제가 올라가는 식으로 둘러대기로 하죠. 이러면 되겠습니까?”
“그리해 주시면 아주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제국 정부와 마녀들이 합의 중이라 하고, 당분간 모든 마력검의 생산을 멈춰 주세요.”
“자기 칼부터 먼저 만들어 달라고 강짜를 부리던 이들도 수긍하겠군요. 제국 정부의 지시라면 그들도 어쩔 수 없겠죠.”
“만약 불응하는 이들이 있다면 제국군이 마녀들을 보호할 겁니다. 그러면 마녀들도 나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겠죠.”
카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절실하게 원하는 이들에게, 제국군에 들어오면 받을 수 있다고 미끼를 던질 생각인가요? 예전의 모병 방식이군요.”
“내 생각을 바로 알아주시네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예전에 당신이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말씀하셨죠.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카미르는 빙긋 웃었다.
오래 산 사람답게 정치적인 센스도 있었다.
이걸로 마녀들의 지지를 얻어 냈다.
위치헬의 일을 마무리한 나는 황도, 황성으로 돌아왔다.
짐을 풀고 객실에서 쉬는 중이다.
오후.
소파에 누운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저녁인가…….”
랑에이와 이셀렌, 렌시엘의 의사는 확인했다.
다들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내 취지를 이해했다.
철혈성군 엔라가 돌아선 이상, 언제 이 사실을 적이 휘두를지 모른다.
오해의 여지가 없게 아이들에게도 미리 말해 둬야 한다고.
“오르카도 온다고 하고. 6황후는 아직 꾸물거리는 중, 용공주는 그렇다 치고……. 장녀는 아직 어리니까 안 듣는 게 낫지. 하지만 큰아들이 빠진 게 아쉽네.”
엔라의 아들, 지금 동부군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가능하면 여기로 불러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나는 상념을 거뒀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넷째 딸 리세라, 둘째 딸 메이호였다.
“아버지, 돌아오셨네요?”
“그래, 좀 많이 바빴지만 잘 해결됐다.”
리세라는 다소곳하게 내 옆에 앉았다.
가까운 거리, 내 얼굴을 보려고 이러는 거다.
“이제 아버지 얼굴이 좀 제대로 보이네요. 엄청 예뻐지셨어요.”
“나 잠들었을 때 실컷 보지 않았냐?”
“그거랑 이거는 다르죠. 몸은 괜찮으세요?”
리세라는 밝게 말했다.
반면 메이호는 좀 거리를 두고 서서는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리세라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앙큼하게 말했다.
“그래서 언니랑 결혼은 언제 하실 거예요?”
“야!”
메이호가 빽 소리쳤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메이호는 머리를 긁으면서 눈을 피했다.
어색해하면서.
리세라는 리듬을 타면서 말했다.
“언니는 좋겠어요. 아빠랑 결혼도 하고~.”
“……세라, 너 그만 안 할래? 그만 좀 놀려!”
메이호가 발을 구르면서 화를 냈다.
내가 웃음을 참고 있자 메이호는 뭐라고 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거, 음. 으으음. 으음……. 아, 아. 아버…….”
“새 신부라고 부끄러워하네요.”
“너, 진짜!”
메이호는 소파 베개를 리세라에게 집어 던져 버렸다.
리세라는 귀여운 비명을 지르면서 나동그라졌다.
그 와중에도 계속 웃는 걸 보니 장난이다.
보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괜찮아, 아빠도 기뻤단다. 우리 메이호는 아빠랑 결혼할꼬얌?”
“할꼬얌?”
“진짜! 둘 다 그만 안 해!”
메이호는 방방 뛰면서 화를 냈다.
하지만 나와 리세라로서는 웃음만 계속 터졌다.
리세라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얼른 결혼 안 해 주시니까 저러잖아요.”
“나도 놀랐단다. 설마 다섯 살 때 하던 말을 아직도 믿고 있을 줄을…….”
“나, 나 화낸다! 화낸다!”
메이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자 리세라가 일어나서는 팔을 잡았다.
“알았어요, 언니. 장난친 거예요.”
“…….”
메이호가 대답을 안 하자 리세라가 팔을 잡아끌었다.
“그냥 편하게 앉으세요. 편하게.”
“…….”
메이호는 못 이기는 척, 내 옆에 앉았다.
리세라도 내 옆에 앉았고.
“…….”
어째 포위망이다?
이거 두 딸이 아빠에게 용돈 달라는 그 상황 아닌가?
나도 모르게 품속의 지갑을 확인하는데…….
메이호가 매우 어색하게 물었다.
“……그, 저기. 죄송한데, 아빠 맞죠?”
“보통 가정에서는 나올 일이 없는 문장이다만. 맞다. 내가 시릭 카라카스고 환생했다.”
“마, 말씀은 알겠는데요. 그게 솔직히…… 믿기 힘들거든요? 세라나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고. 아니, 믿기 싫다는 건 아닌데…….”
“뭐 바로 믿을 필요야 있나. 무리할 필요 없다.”
100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환생이라면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리세라가 내 어깨에 턱을 대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언니. 무작정 결혼하기보다는 서로를 좀 더 알아 가야죠.”
“아, 너! 진짜 콱!”
“꺅! 아빠, 언니가 괴롭혀요!”
메이호가 손을 뻗자 리세라는 내 어깨 뒤에 숨었다.
메이호는 투덜거렸다.
“……진작 설명해 주지. 난 괜히 이상한 생각만 해 가지고. 세라가 계속 놀리잖아요.”
“사실 그게 말인데.”
나는 많이 고민했지만 그냥 말을 꺼냈다.
“둘 다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줄래?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같이 식사하시게요?”
“……음, 먹으면서 들으면 얹힐 거다. 저녁은 일찍 먹고 모이자.”
나는 내 허벅지 위에 올린 깍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너희 어머니들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이리됐는지 밝히려고 한다.”
“…….”
무거운 침묵.
나는 손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사실 어지간하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부부 사이의 문제에 괜히 너희들에게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 어머니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래서 너희들을 답답하게 했고, 괴롭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숨기고 싶었다.”
“아버지…….”
리세라의 부름.
나는 깍지 낀 손,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세라야, 호야. 하나만 약속해라.”
“……뭘요?”
메이호의 말.
호야라는 애칭은 왜 리세라만 예뻐하냐고 울어서 달래려고 붙여 준 별명이다.
아빠인 나만이 부르는 별명.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너희 어머니들을 미워하지 마라.”
“…….”
“그게 조건이고 내 부탁이다. 어머니를 미워하지 마라. 다들 힘들어했다. 이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100년 동안 괴로워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적어도 너희들은 받아 줬으면 한다.”
“……그럼 아버지는요?”
메이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싫어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아빠 편을 들어 줘요? 난 아빠 편을 들 거예요.”
“…….”
목이 콱 막혔다.
다 큰 딸이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리면서 이러는데, 아빠가 무슨 말을 더 할까.
리세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내 손을 붙잡았다.
깍지를 풀고는 내 왼손을 잡더니, 메이호에게 이른다.
“언니.”
“……응.”
메이호도 내 오른손을 잡았다.
내 양손을 각각 둘째 딸과 넷째 딸이 붙잡고 있었다.
“예전에 저는 아버지에게 사람 손은 왜 두 개냐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으음.”
“아버지는 그때 저를 끌어안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저를 안아 주려고 손이 두 개인 거라고요.”
리세라는 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아버지의 한 손, 한 손을 잡아 드릴 수 있어요.”
“…….”
말이 안 나온다.
나는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됐다.
이걸로 됐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 그러면 저녁에…….”
벌컥!
그때 문을 열고 가룰이 뛰어 들어왔다.
가룰은 막 입을 열려다가 내가 리세라, 메이호와 손을 잡은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가룰은 180도 돌아서서는 외쳤다.
“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냥 말해.”
가룰은 내가 시릭이라는 거 아직 모르나?
아니, 들었어도 확신은 못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가룰이 소리 높여 말했다.
“제국군 레릭 대장군께서 급한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세탄 카라카스 천검장이 중앙군을 급히 찾아왔다고 합니다!”
“……엥?”
세탄 카라카스.
동부군에서 복무하는 내 장남이 아닌가.
지금 어떻게 중앙군으로 온 거지?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가룰이 이어서 말했다.
“세탄 천검장께서 말씀하시길! 중앙군과 협력해서 반역을 저지른 서부군을 정벌하겠다고 합니다! 제국에 등을 돌린 반역자, 4황후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결의하셨다고 합니다!”
“…….”
딸이 봉합해 준 가슴을.
아들이 쫘악 찢어 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