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32)
우리는 원래대로
반란의 수괴.
4황후 엔라.
두 개의 뿔, 악마의 꼬리가 달린 푸른 피부의 아름다운 여마족이다.
남자가 기죽을 정도로 화려한 미녀지만 웃고 있으니 친근해 보인다.
하지만 적이다.
엔라는 7계위까지 쓰는 강적, 거기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준비를 해 오긴 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8황후 유하도 문제, 전투가 시작되면 어떤 태도를 취할지 모른다.
“……아, 잠깐만.”
갑자기 엔라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그대가 이렇게 예쁜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큰일이군. 너무 두근거리는데. 주체가 안 돼.”
“주책이 안 되는 거지.”
“아, 어쩌지. 원래 시릭도 너무 좋았지만 이건 치명타인데. 저기, 음, 우리…….”
엔라는 슬쩍 엄지로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 침실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
“…….”
이런 소리 하는 중에도 엔라의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여자하고 칼로 많이 싸워 봤다.
등에 찬 대검이 얼마나 자유롭게 노니는지 안다.
내가 싸늘하게 바라보자 엔라는 다시 웃었다.
“결판내기 전에 몸을 맞대는 것도 좋잖은가? 본래 우리는 서로의 목숨을 노렸던 사이. 그러다가 마음에 불이 붙어서 몸을 섞고 함께하게 되었고.”
“이야기 다 끝났지?”
“잠깐만요.”
그때 유하가 나서면서 말했다.
“4황후 전하는 나와 약속했습니다. 이 방 안에 있는 동안은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고요. 실제로 그동안 서부군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반란 수괴를 붙잡아 둔 거냐, 잘했다.”
“그래, 나도 유하의 다이어트를 도와주고 있었지.”
나와 엔라가 짠 것처럼 주고받자 유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친김에 확인했다.
“엔라,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냐?”
“꽤 오래전부터. 구체적으로는 그대가 원탁회의를 열겠다고 귀족원에서 발표할 때부터.”
“…….”
그러니까 오드벨이 내가 시릭의 환생이냐고 물었던 시점?
엔라는 그때부터 여기에 숨어서 나를 기다린 거다.
……아니, 이걸 어떻게 사전에 알고 막냐?
“아, 이러니까 이셀렌이 서부군에서 네 종적을 못 찾았지. 한참 전부터 여기에서 숨어들 계획만 짜고 있으셨다?”
“그래.”
“카마엘이라는 놈이 서부군 운운한 것도 나를 낚기 위한 거고?”
“피아를 막론하고 속였지.”
반란 선언조차도 나를 여기서 마주하기 위한 거다.
정신 나간 기책이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무작정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이 도시에 들어왔을 시점에서 거행해도 돼. 그 외에도 기회가 꽤 많았을 것 같은데? 가령 제국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편승해서 나를 찌르면 훨씬 더 확률이 높았지.”
“…….”
“……아니, 관두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투항하고 서부군을 설득해. 그러면 참형으로 봐주마.”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럼 정리하자.”
“그 전에 잠깐, 그대에게 해 둘 말이 있다.”
엔라는 차분하게 말했다.
“유하는 나와 내기를 한 것뿐이야. 대신 나는 여기서 얌전하게 그대를 기다리기로 한 거고. 그 외에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다.”
“알겠다. 유하, 더는 따지지 않을 테니 물러나라.”
“…….”
유하는 지팡이를 들고 간절하게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색하고 호통을 쳤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해득실이 아니라 나라와 인류를 생각하는 일이다. 네가 마녀들의 수장이라면, 이 도시를 수호하는 자라면 피해를 줄일 방법을 생각해라!”
유하는 움찔하고는 물러났다.
나는 탐랑을 잡고 엔라를 노려보았다.
엔라 역시 등의 검을 잡고는 웃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피가 흐르는 것은 필연, 만약 목 하나로 끝나는 전쟁이 있다면 단연 으뜸이라.”
“그래, 애들 죽일 거 뭐 있냐?”
나는 바로 탐랑을 뽑아 휘둘렀다.
엔라는 바로 뒤로 달리면서 피했지만 나는 마력질주로 달라붙어서는 탐랑으로 찌르고, 거문까지 뽑아서 휘둘렀다.
홱!
결국 엔라도 대검을 뽑아서 거문을 막았다.
퍼어억!
그 순간, 나는 다리로 땅을 박차면서 엔라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유하라는 변수를 두고 싸우느니, 장소를 옮긴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고 우리 둘은 한 덩어리가 돼서 추락했다.
공중전.
이렇게 되면 염동력과 비행이 가능한 내가 유리하다.
나는 떨어지면서 양손의 칼을 들고는 난타하듯이 엔라를 치고 베었다.
퍼버벅!
하지만 엔라는 마력장으로 무게중심을 잡고는, 가벼운 건 맞고, 무거운 건 흘리면서 나에게 외려 반격을 가했다.
휙!
나는 추락하던 중에 재주를 넘어서 피하고는 탐랑을 놓았다.
쐐애애액!
비검, 엔라는 급하게 대검을 들어서 막았지만.
퍼억!
그 순간, 나는 주먹을 텔레포트시키면서 탐랑의 칼자루를 때렸다.
“크윽!”
막아 냈다 싶은 순간, 염동권으로 가해진 충격.
그리고 추락이 끝났다.
퍼어어억!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리면서 엔라의 몸이 튕겨 나갔다.
원래는 제대로 낙법을 구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건데…….
엔라는 충격이 연이어지는 중에도 마력방어, 마력장을 깨트리지 않았다.
엄청난 집중력이다.
튕겨 나간 엔라는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재주를 넘어서 착지하려고 했다.
내가 바로 달려들려고 하는데.
“흐아아압!”
그 순간 엔라의 검에 보라색 마력이 어리더니 3m짜리 빛기둥이 되었다.
7계위 능력, 마력검강!
지면의 나를 향해서 떨어진다.
콰아아아앙!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땅울림.
나는 염동력으로 몸을 급선회, 얼른 옆으로 뛰어서 피했다.
보통 검강은 1회성, 한 번 쓰면 연사를 못 한다.
하지만 7계위의 절정에 달한 강자는 다르다!
엔라는 지상에 착지하고는 다시 횡으로 긋고, 내리쳤다.
콰가가가가!
하나같이 땅을 쪼개 버리는 공격들.
내가 크게 뒤로 뛰어서 피하는데도 돌무더기가 날아와서 나를 후려쳤다.
이걸로 염동결계를 쓰기는 너무 아깝…….
부우웅!
그 순간 엔라가 검강을 5m까지 늘이면서 휘둘렀다.
퍼어억!
얼른 염동결계를 펼쳤지만 내 몸이 밀려나면서 속이 울렁거린다.
“이젠 늘어나기까지 하네.”
예전에는 2m였는데 100년이 지나니 3m, 그리고 단시간이지만 5m까지 늘이다니.
우리의 추락, 굉음을 들은 이들이 거리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민다.
“뭐, 뭐야?”
“싸움이다!”
하나같이 험상궂고, 날카로운 눈매들.
그들은 엔라의 검강을 보고는 정색했다.
“헉, 검강? 7계위라고?”
“그, 그걸 유지하고 있네? 뭐야? 괴물이다!”
“도망가!”
몇몇은 부리나케 달아나고, 또 몇몇은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엔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 생각 나는데? 우리 둘이 싸우면, 군대도 멈추고는 누가 이길지 지켜봤잖아?”
“…….”
엔라는 강적이다.
단순히 7계위로 그치지 않고 엄청난 집중력과 경험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
나는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서 던졌다.
삐요오오옹!
밤하늘로 올라간 신호탄이 펑, 펑 소리를 내면서 터져 나간다.
이걸 본 알베르트가 긴급사태라고, 바로 이셀렌에게 전달할 것이다.
엔라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다크엘프의 통신망은 약해졌을 텐데? 전달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거야.”
“너 정말 내가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왔다고 생각하냐? 전국 각지에서 칼잡이들이 몰려든 위치헬이 툭하면 칼부림이 난다는 거, 이미 알고 왔는데? 유하가 의도적으로 대면을 피하는 거, 곡절이 있을 텐데?”
“…….”
엔라가 멈칫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누구 하나쯤은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서부군의 암살 시도, 떠돌이 칼잡이인 척하고 나를 푹 담그려는 거, 하고도 남잖아. 혹시 거물이 튀어나올지도 몰라서 각별히 병력을 준비시켰다.”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그야 없었지. 12가문과 귀족들의 사병을 빼돌렸으니까. 그리고 내가 잠입한 직후에 위치헬 근방으로 진군하라고 명령했고, 이제 들어오라고 신호탄 쏜 거다.”
병력이 위치헬 근처까지 오게 시간을 끈 거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12가문의 기사에다가 사병 5백, 후속부대 제국군 3천.”
“…….”
“네 잠깐의 승기는 지나갔다.”
상대는 철혈성군 엔라, 나 다음가는 지휘관이다.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하다.
엔라의 대담한 기습은 나의 지리적 우위와 사전 준비로 카운터 칠 수 있다.
엔라는 검을 내리고는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진실을 말해 주지.”
“시간을 끌어 봐야…….”
“내가 불리하지. 그러니 믿을 수 있겠지.”
엔라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내가 안에서 흔들고, 그대가 밖에서 부순다.”
“…….”
짧은 말, 하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엔라는 칠죄신 무리에 잠입한 이중 스파이라는 의미였다.
언더커버, 갱단에 신분을 속이고 잠입한 경찰처럼 내부 정보를 빼내겠다고.
정말 황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엔라는 유하 방에서 매복하는 황당한 기책도 쓰는 여자지.
“지금 무간도 찍고 있다고? 어떻게 믿지? 증거는?”
“정보를 주지. 현재 칠죄신의 사도는 일곱 명, 그중 셋이 사라졌고 남은 넷은 황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황도의 주변, 위성도시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
“…….”
“만약 네가 군대를 일으켜서 서부로 진격한다면 그들이 황도를 유린할 테니까. 또 사도는 칠죄신의 완전 재림을 꿈꾸면서 암약하고 있으니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엔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도의 머릿수는 이셀렌도 몰랐지? 쓸 만한 정보 아닌가?”
“…….”
헛소리?
지금 시간을 끌어 봐야 불리한 건 엔라다.
즉, 진짜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
“누가 멋대로 칠죄신 패거리에 잠입하래? 대체 누가 너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는데?”
“……스스로 판단했다.”
엔라는 작게 말했다.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안쪽에서 붕괴시키겠다고. 그리고 황후들 사이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고.”
“지나쳐. 말이 안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언더커버는 신용을 쌓기 위해서, 갱단의 악행에도 가담해야 한다.
그래도 엔라가 벌인 일은 너무 스케일이 크다.
그냥 자기에게 불리해지니 둘러대는 것 아닌가?
엔라는 조용하게 말했다.
“유하는 믿어도 된다. 내가 시험했다.”
“……아, 그러니까 막내도 저울에 올리고 이리저리 주판 튕기셨다? 애는 네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킨 줄 알고 열심히 설득하던 중이었고? 유하가 없는 자리니까 이제야 본심을 꺼내셨고?”
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준비를 다 마치면 유하를 데리고 서쪽 도시, 워길드로 와라. 혼자 오기 어렵다면 병력은 1천, 우리도 병력 1천과 함께 마중하겠다. 거기서 파군을 고치게 해 주마.”
“…….”
“칠죄신은 파군이 고쳐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곧 증거가 될 테지.”
그리 말한 엔라는 품에서 조각을 꺼내 보였다.
손바닥만 한 금속.
나에게 보여 준 그녀는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부러져 나간 파군의 칼날이다. 일부를 회수했다.”
“워길드에서 만나면 나머지를 전부 다 주시겠다? 그걸 어떻게 믿겠냐?”
“…….”
“당장 다 그만둬라. 계책이 아니면 죽어 마땅하고, 계책이라도 허락할 수 없다.”
엔라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오래 고민하고 결의한 일이다. 나는 10년을 후회하고, 100년을 기다리고, 앞으로 1,000년이 흘러도 용서받지 못할 죄업을 저질렀으니.”
“…….”
“나는 여전히 칠죄신의 사도들에게 속내를 의심받는 처지, 그대와 진심으로 싸워야지. 그러니 부디…….”
처연하게 뇌까린 엔라가 땅을 차면서 달려들었다.
파아아악!
달리는 그녀를 따라서 원형의 마력이 퍼지고, 그 영역에 불꽃이 치솟아 오른다.
엔라의 마력영역, 염화진!
사방을 불살라 버리는 장판을 펼친 마족이 3m에 달하는 검강을 휘두르려고 한다.
“하아아압!”
파아악!
엔라의 기합에 맞춰서 나 역시도 마력영역을 전개했다.
내 마력영역은 영역봉쇄.
남의 마력영역을 없애 버리는 카운터다.
엔라의 마력영역을 꺼트린 나는 탐랑과 거문을 교차해서는 검강을 막아 냈다.
퍼어억!
칠성칠요는 불굴, 검강을 막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쥔 내 몸이 상하면서 크게 뒤로 밀려난다.
발이 붕 뜨고, 울컥 피가 올라온다.
하지만 나는 날아가는 중에도 손을 앞으로 뻗었다.
비검!
“음!”
대검을 막 크게 휘둘러서 허점이 드러난 엔라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흐읍!”
탐랑을 피하고, 이어서 날아오는 거문 역시도 예상하고는 쳐 냈지만…….
파아악!
내가 공기를 찢고 달려들 줄은 몰랐겠지!
나는 날아가던 중에 허공을 차고는 반전, 비행으로 엔라에게 달려든 것이다.
탐랑과 거문을 미리 날려 보낸 건, 칼이 두 자루니 그것만 막으면 된다고 방심을 유도한 것!
퍽!
엔라의 안색이 변하는 순간, 텔레포트로 서너 발을 갈긴 직후였다.
“아아아아!”
거리를 무시하고 주먹을 날린 나는 앞으로 주먹을 쭉 뻗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탐랑이 엔라의 뒤통수를 노린다!
퍼어어억!
피와 살점이 튀는 소리.
“…….”
“으으음.”
우리 두 사람은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엔라는 얻어맞는 중에도 나에게 박치기로 응수했고, 돌아온 탐랑이 엔라의 어깨를 찢었다.
착! 착!
나는 돌아온 두 검을 잡고는 숨을 골랐다.
마력은 괜찮은데 비행이 워낙 정신력 소모가 크다.
엔라도 피를 좀 보고, 체력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서로 마지막 패를 까야 하는 상황이다.
뚝, 뚝.
엔라의 어깨를 타고 흐르는 붉은 피.
검지 않다.
마력도 검은색이 아니었고.
즉, 엔라는 칠죄신에게 영혼을 바친 게 아니다.
내 시선에 엔라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여, 지금은 내가 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게.”
“…….”
“말의 진위보다는 피와 철이 확실하다. 우리는 알고 있잖은가.”
본래 적대하는 군세의 총대장끼리 직접 합을 겨뤄서 결판내는 일은 비상식적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나와 엔라는 서로의 목을 노리고 치고받고, 군대를 부려서 치열하게 뚫고 막고, 계략으로 후려치고, 뒤통수 치고 또 치고.
어쩌다가 사정을 알고, 더 어쩌다 보니 서로 어깨를 붙이고 싸우고.
그러다가 나 대신에 칼을 맞고 쓰러지고.
마음을 허락하고 몸을 함께 했다.
“그래, 말로 할 시점은 지났지.”
“……그렇다. 다 원래대로 돌아간 거지.”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