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30화 (12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30)

검의 도시

황제가 사라진 지 100년.

제국은 단체들이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고 손발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나, 리젠 리브라타가 2대 황제 후보로 나서고.

또 내가 사실 시릭이라는 걸 아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국 정부의 오드벨, 100년간 황성을 지켜 온 렌시엘이 정치를 맡고.

랑에이가 경찰과 치안을 담당.

레릭이 제국군을 다스리고 아르센이 철도헌병대로 운송을 책임진다.

거기에 이셀렌이 정보를 담당하면서 보좌한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귀족원까지 정리했다.

바야흐로 황도는 내 손으로 평정되었다.

일단락을 지은 나는 변장하고, 철도를 타고 이동했다.

비상시국이라서 철도의 검문이 있었지만, 헌병대장 아르센이 내 편인데 다 프리패스다.

목적지는 황도의 위성도시, 위치헬.

8황후 마령화비가 다스리는 도시.

통칭 검의 도시.

검을 쓰는 전사, 보다 뛰어난 마력검을 원하는 자들이라면 다들 찾아오는 곳이다.

온갖 환란이 거듭되다가 내전까지 코앞에 닥친 지금, 검을 새로 벼리겠다면서 제국 각지에서 주문들이 폭주했다.

감당할 수 없는 물량에 마녀들이 사정이 어렵다고 하자, 이제는 직접 찾아와서는 아우성치고.

위치헬은 유례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제국 각지에서 칼 좀 쓴다는 이들이 몰려들었고, 자기 주문을 우선해 달라고 한다?

당연히 서로 칼부림이 난다.

지금 위치헬은 하루가 멀다 하고 피가 튀면서 치안이 나빠지고 있었다.

중앙군이 출동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소란스러워진 도시.

그 대로변을 나는 걷고 있었다.

단둘이.

동행한 하인켈이 어색하게 말했다.

“저기…… 저만 데리고 나오는 건 너무 위험하시지 않습니까?”

“대대적으로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띈다. 마령화비가 뭔 생각인지 모르겠으니 준비하기 전에 들이치는 게 나아.”

나는 내친김에 말했다.

“내 정체가 혼란스럽다고? 달라질 게 있냐, 람베르트.”

“아닙니다. 보다 더 정성을 다해서 주군을 모시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내가 하인켈의 성을 부르자 녀석은 정색하고는 머리를 숙여 보였다.

하인켈도 내가 사실 시릭의 환생이라는 걸 이제 알고 있으리라.

하인켈이 어색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에 하나가 있으니까 호위부대라도…….”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지고 정보가 새어 나가.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세간에 덜 알려진 게 너고, 또 눈치가 좋지.”

“…….”

“이런 잠입 활동에는 네가 믿음직해서 데려온 거다.”

사실 하인켈이 말하고 싶은 건, 그가 너무 약하지 않냐는 거다.

내가 알기로는 하인켈은 3계위, 이종족 전사로서 적당하지만 내가 맞서는 적들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인재는 적재적소다.

강한 놈은 강한 대로, 영리하면 영리한 대로 다 쓸 수 있다.

하인켈은 요원 경험이 길고, 나에 대한 충성심을 믿을 수 있었다.

“4황후의 선언에 상당수의 인재들이 합류했다고 한다. 서부군을 정리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황족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황후와 그 자식들이 내 쪽에 많이 모일수록, 민심이 내 쪽으로 모일 테니까.

주변에 듣는 귀가 적다는 걸 확인한 나는 새삼스럽게 말했다.

하인켈은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경청했다.

“내가 황후들을 포섭하는 게 빠르냐, 아니면 서부군의 진격이 빠르냐. 시간 싸움이다.”

“예, 알겠습니다. 다만…….”

“뭔데?”

“여왕님도 말씀하셨지만 정작 4황후 전하가 모습을 안 보이고 계십니다. 사실 전부터 서부군을 주시하기는 했습니다만…….”

“모습을 드러내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진군하기 전에는 나올 거다.”

하인켈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주변을 지나다니는 여자들을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머리에는 삼각뿔 모자, 가지각색의 로브를 입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바쁘게 걷는 자들.

“위치헬이 마녀들의 도시라고는 들었는데, 정말 마녀들이 많군요.”

마녀(魔女).

인간과 일곱 이종족, 그 마지막에 만들어진 종족.

마력검을 벼리는 여자들.

여자밖에 없는 마녀는, 종족 존속을 위해서 다른 종족과 혼인해야 했다.

하지만 마녀와의 결혼은 늘 끔찍한 파국을 맞는다.

결혼은 미친 짓이고, 마녀와의 결혼은 자살행위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마녀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은 줄을 서고 있었다.

자기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나 역시도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

옛 기억을 떠올리는데 하인켈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령화비 전하는 착한 마녀라고 불리시죠. 마녀들의 도시를 만들고, 다른 종족들과 가교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고요. 많은 선정을 베푸신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종족과 충돌하기 쉬운 마녀들을 잘 다스리고, 또 일화들을 들어 보면 존경스러운 분이더군요.”

“그래, 착실하고 성실한 여자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여자가 절대로 안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왔다.

위치헬의 안가.

잠복하고 있던 다크엘프 요원들이 맞아 주었다.

요원의 대표 알베르트가 나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잘 오셨습니다. 앉으시죠.”

“그래.”

나는 자리에 앉고는 바로 물었다.

“상황은 좀 어때?”

“마령화비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알아봤습니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큰 이상 없이 위치헬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황족 여러분들과는 50년 이상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셨고…… 또 이번에 귀족원의 사절들을 의도적으로 피한 모양새입니다.”

“내가 보자고 공식 요청을 넣었는데도 업무가 바쁘니 안 되겠다고 하더군.”

“실제로 지금 위치헬은 엄청나게 소란스럽습니다. 말다툼에서 비롯된 상해, 살인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어요. 거기다가 마녀들도 타고난 문제가 있고요.”

“…….”

원래 대량 주문이 밀려오고, 자기를 우선해 달라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치안 안정을 빌미 삼아서 제국군을 출동시킬 작정이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위치헬은 시릭 카라카스 전하가 특별하게 마녀들의 자치를 허용해 주신 곳입니다.”

“시국이 시국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마력검은 당연히 필수고, 마녀들은 내 아래로 거둬야 해.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도 8황후는 반드시 내가 데려와야 하고.”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물론 제국군이 출동하지 않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좋지. 그러니 8황후를 만나서 설득할 작정이다. 안 만나 주면 억지로라도 봐야겠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8황후는 평소에 마검탑에 머무르고 계시는데…… 원래도 경비가 철저했지만 최근 소란이 많아지면서 크게 보강했습니다.”

그리 말한 알베르트가 마검탑의 설계도면을 탁자 위에 올렸다.

나선으로 꼬인 9층탑.

내부의 경비 배치가 세세하게 적혀 있는데…….

“지금 파악한 건 4층까지입니다만. 너무 편집적이라서 저도 골머리를 싸매는 중입니다.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령화비의 위치는?”

“꼭대기, 9층에서 내려오지 않고 계십니다. 몸이 안 좋다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정말인 것 같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상공으로 침투한다면?”

“그게 가능하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만.”

“그럼 나 혼자 들어갔다가 나오마. 혹시 도시 안에 최근 특이 사항 없나?”

알베르트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령화비의 칩거 말고는 별다른 이슈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칩거가 좀 유난스러운 것 같습니다.”

“뭔데?”

“시녀들도 방 안을 둘러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염병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 꾀병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나는 마검탑의 설계도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알베르트, 여기에 요원이 몇이냐?”

“저 포함해서 열일곱입니다.”

“나는 내일 밤에 침투한다. 도시 안에 이슈 있는지 다시 한 번 찾아봐라. 최근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뭔가 수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그리고 이셀렌에게 연락해서, 다시 내가 마령화비와 만나고 싶다고 재차 전달하라고 해.”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방심시키는 거야. 내가 창문 따고 들어갈 거라고는 상상 못 할 테니까.”

“좋은 생각이시군요.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설계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뭔가 걸리십니까?”

“아니, 그게…… 비상구를 싹 다 폐쇄했어.”

고층 건물은 화재에 쥐약이다.

당연히 비상구를 만들어 둬야 하고, 마검탑도 예외는 아니다.

“경비를 보강할 거라면, 비상구 앞에 사람을 세워 두면 되지, 왜 폐쇄까지 하지?”

“으음,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내 머리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건 밖에서 들어오는 걸 막는 게 아니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나는 방에서 좀 더 고민해 볼 테니까 준비 다 되면 말해.”

“예!”

다들 남겨 두고 혼자 방으로 들어간 나는 상태를 점검했다.

착.

내가 벽에 손을 대자 가볍게 달라붙는다.

척, 척.

나는 벽을 가볍게 딛고는 천장에 거꾸로 달라붙었다.

염동력으로 공중부양까지 할 수 있는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에 비행까지 섞으면 침투야 할 수 있는데…….”

풀썩.

침대로 떨어진 나는 가지고 온 무장을 확인했다.

월검 탐랑과 화검 거문.

지금은 잠들어서 평소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력 소비 효율이 대단히 뛰어나다.

또 내가 7계위, 그 이상으로 가더라도 깨질 위험은 없고.

“만나 보면 알겠지.”

검의 도시 위치헬을 다스리는 여자.

마령화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쪽으로 데려온다.

* * *

마검탑.

최상층인 9층.

검고도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이 의자에 앉아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 선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8황후 전하, 2대 황제 후보인 리젠 리브라타가 다시 직접 찾아뵙고자 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는군요.”

“업무가 너무 바쁘니 거절한다고 하세요.”

“……외람되지만 계속 피하실 수 없는 일인 줄 압니다.”

“그럼 몸이 안 좋으니 만날 수 없다고 전하세요.”

시녀는 한숨을 삼켰다.

“그러면 방을 청소라도…….”

“나가세요.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들이지 마시고요. 그리고 메뉴를 좀 더 늘려 주시고요.”

“…….”

입이 짧은 분이신데?

하지만 식욕이 있으신 건 좋은 일.

시녀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몸을 돌렸다.

닫히는 문.

혼자가 된 여성은 한숨을 쉬었다.

안다.

다들 그녀의 이 판단을 두고는 이상한 추측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는 것쯤은.

얼른 리젠 리브라타와 협력해서, 위치헬의 혼란을 잠재워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들이 마녀들 사이에서도 나온다는 걸 안다.

알지만…….

여성, 8황후는 벽에 걸린 그림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후들이 그려진 초상화.

본래 그림에 있어야 하는 여자는 여덟 명이었다.

하지만 일곱 명뿐이다.

“언니…….”

정말 오랜만에 입에 올린 여성은 마음을 다잡았다.

“며칠 안 남았어요. 이제 조금만…….”

며칠만 더 버티면 다 끝난다.

제국의 혼란도, 가족의 불화도.

다 지켜 낼 수 있다.

리젠 리브라타가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라는 풍문, 그녀의 귀에도 들어왔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하나.

“만약 당신이 시릭이라면 더욱 여기로 오면 안 돼요. 여긴 지금 너무나…….”

끼이익.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

이어지는 발소리.

8황후 마령화비, 유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되어 간다. 검을 고칠 준비를 다 했나?”

“…….”

“칠성칠요의 마지막 검, 파군을 고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여긴 너무나 위험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