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29)
안 나오면 쳐들어가야지
내 도발.
귀족들은 바로 분통을 터트린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한미한 집안 출신이 황제 후보가 되었다고 천하를 다 얻은 줄 압니까?”
“하하하, 뭐 이런…….”
“갑시다! 그냥 가요!”
열댓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나는 혀를 찼다.
“나가는 건 마음대로인데 목은 두고 가라.”
“폐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못 나간다!”
레릭이 입구를 막고는 정색했다.
귀족들이 움찔하는데 나는 레릭을 보고는 말했다.
“아, 거. 폐하라고 부르지 마. 그냥 리젠이라고 불러.”
“예? 제가 어찌 감히…….”
레릭이 쩔쩔맨다.
그러자 귀족들이 신음을 흘렸다.
대장군이 꼼짝도 못 한다는 건, 여차하면 내가 이 자리의 귀족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단 이야기니까.
“당신이 시릭 카라카스 폐하의 환생이라 이겁니까?”
날아온 목소리.
의자에 앉은 토비우스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 무슨…….”
“이상한 괴물하고 싸우면서 그리 주장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귀족들이 반발하자 나는 정색했다.
“내가 언제 시릭이라고 했었나? 나는 그냥 사람들의 사기를 고취시켰을 뿐인데?”
“…….”
귀족들은 기막혀했지만 사실이다.
당시에 분위기를 탄 이들은 나를 시릭이라고 반신반의하면서 믿었지만, 내 입으로 내가 시릭이라고는 안 했다.
혹시나 이렇게 책잡는 놈 있을까 봐.
나는 토비우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제 뭐, 황제모욕죄라고 엮으시려고?”
“허허허, 아닙니다. 정국이 이 모양인데 어찌 감히 그 죄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4황후가 거병까지 한 마당에…….”
“…….”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토비우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토비우스는 빙긋 웃고는 자리를 권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아니, 그냥 내려다보면서 일방적으로 통보할게. 오늘로 가주에서 물러나고 은퇴하면 작위는 보전해 준다. 다만 영지는 절반으로 줄이고.”
“……무, 무슨.”
귀족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토비우스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고.
나는 테이블을 짚고는 똑바로 보았다.
“난 지금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너도 설마 키릭 레오가의 정체를 알고 의뢰한 건 아닐 테니까.”
토비우스의 눈이 오드벨을 살폈다.
오드벨의 수완이라면 이미 증거, 증인까지 완벽하게 확보했으리라는 계산.
토비우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노회한 능구렁이가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할 이유가 없지. 굳이 원탁회의를 망치겠다면 타루스나 다른 가문을 섭외하면 그만이니까.”
토비우스는 귀족원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전에 나를 저격하려고 할 때도 다른 파벌인 귀족을 쓰는 신중함을 보였고.
그런 이가 굳이 역적으로 몰릴 위험을 감수하고 레오가를 고를까?
모르고 한 일이다.
“네가 테러범과 한편이 아니라면 정말 운 나쁘게 걸린 거지. 하지만 나는 여차하면 레오가와 네 가문을 한데 엮어서 처벌할 수 있거든?”
“가능하겠지만 상당한 부작용이 발생할 텐데요.”
토비우스는 엷게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보통 안 하는데 지금 시국이 어지럽잖아? 과하다 싶어도 해야지.”
“…….”
토비우스는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얼굴.
나는 다른 귀족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냐? 바닥에 머리 박는 놈, 열 놈은 작위와 영지를 남겨 준다.”
“…….”
귀족들은 눈치만 보았다.
귀족은 명예를 중시하니까.
내 위협이 두려워서 다들 보는 데서 머리를 박았다?
대대손손 놀림감이 될 것이다.
토비우스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가 은퇴하면 제 아들은 어쩌실 겁니까?”
“엄청나게 부려 먹어야지. 뭐 운 좋게 큰 공을 세운다면 영지를 약간이라도 회복할 수도 있고.”
“서부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입장이 곤란한데 신경 써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려 좀 해 보고.”
토비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알겠습니다. 오늘로 은퇴하겠습니다.”
“아, 토, 토비우스 공작.”
“말도…….”
귀족들이 아연실색했다.
자기들이 따르는 파벌의 우두머리가 이리도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다니.
몇몇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몇몇은 분노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제국군을 앞세워 위협해서 귀족을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하지만 토비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손을 저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리젠 리브라타 폐하께서는 나를 곤궁한 처지에서 구해 주시려는 겁니다. 내가 모르고 했다고는 하나, 레오가 가문에 사주를 넣은 건 사실이니까요.”
키릭 레오가는 단순히 원탁회의를 방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칠죄신을 강림시키고는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미 레오가 가문은 끝장.
내가 여차하면 토비우스도 그리 만들 수 있었다.
증거? 로시의 증언이 있고, 그게 아니라도 조작하면 된다.
토비우스는 그냥 자기 혼자 물러나는 게 낫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나는 딱 잘랐다.
“지금 귀족들에게 나 변호해 주면서 나한테 점수 좀 따겠다? 은근슬쩍 폐하라고 부르는데, 하지 마라.”
“…….”
“그리고 사과해라.”
토비우스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곧 머리를 숙여 보이려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한테 하지 말고, 제국의 백성들에게 사과하라고. 네가 모르고 했다고는 하나 키릭 레오가에 바람을 불어 넣은 게 사실이다. 그걸 사과하라고.”
“어, 어떻게 말입니까?”
“문서로 작성하고 네 인장을 찍어. 그걸 황도 곳곳에 대자보로 붙인다.”
귀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서 그런 짓까지 하라고?”
“귀족의 체면을 뭐로 보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서 쏘아보았다.
“지금 상황이 체면 차릴 때냐?”
“대체 무슨…….”
“황도에서 호의호식하니까 4황후의 거병이 남의 집 이야기로 들려? 그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도 군사를 몰고 와서 황도를 공격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황도와 제국의 내실을 다지려는 거다.”
“…….”
“이슈는 이슈로 덮는 거군요.”
오드벨이 거들었다.
2대 황제 후보, 리젠 리브라타의 탄생? 칠죄신의 재림에다가 4황후의 거병으로 덮여 버렸다.
토비우스는 민중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대귀족이다.
그런 녀석이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보여 주면, 민심도 약간은 정리가 된다.
“도의적 책임이라는 게 있는 거다.”
“…….”
토비우스는 한참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은퇴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
아들에게 가주를 물려줘도 실권은 자기가 쥘 생각이니까.
하지만 토비우스가 민중에게 대대적으로 사과하면?
이건 귀족 사회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토비우스의 영향력은 급전직하로 추락하게 된다.
진짜로 은퇴하게 되리라.
“조, 좀 생각해 봐도…….”
“나 바쁘다. 다음 기회는 없다.”
어떻게 계산해도, 레오가에게 끌려 들어가서 멸문지화를 하는 것보단 낫지.
토비우스는 긴 한숨을 쉬었다.
“말, 말씀대로 하, 하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당장 서재로 가서 쓰자. 레릭, 너는 이 자리 지키고 귀족들이 하나도 밖으로 못 나가게 해라.”
“그래도 나가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리 부러트려.”
레릭이 눈을 번뜩거렸다.
토비우스의 서재.
2시간이 걸려서 토비우스는 스무 장의 대자보를 완성했다.
카라카스에는 복사기도 없으니 죄다 직접 써야지.
처음에 쓸 때, 토비우스는 엄청나게 굴욕적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게 몇 차례 반복되니.
얼굴에 감정이 날아갔다.
자기 죄상을 줄줄이 쓰다 보면 그렇지.
반성문 효과다.
물론 반성문을 수백 장을 써도 전혀 뉘우치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토비우스는 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됐습니까?”
스무 장을 다 제작한 토비우스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술 한 잔 줄까?”
나는 와인을 꺼내서 토비우스의 앞에 술을 따라 주었다.
토비우스는 단시간에 너무 글씨를 많이 써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연거푸 마신 토비우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앞으로 많이 힘드실 겁니다. 리젠 리브라타.”
“이미 충분히 힘들다. 죽겠어. 그리고 너도 네 자식과 가문을 지키려면 힘들 거다.”
“단둘만의 자리에서 제안하실 게 있으신가 보군요.”
눈치가 좋네.
쓸 만하다.
“네가 이 자리에서 나한테 싹싹 빌어서, 저 밖의 귀족들은 특별히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가자.”
“……팔다리를 잘랐다가 다시 붙여 주시는 겁니까?”
“표현 좋네.”
내가 귀족들에게 대뜸 머리를 박으라고 한 거?
이렇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토비우스가 대신 총대를 멨다는 이야기에 감동해서 계속 충성할 놈도 있고, 반성문은 좀 아니었다고 떠나는 귀족도 있겠지.
팔다리를 잘랐다가 다시 붙이면 예전처럼은 못 움직인다.
내가 편하게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뭘 하면 됩니까?”
“지금은 귀족원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가 아니야. 나 일하는데 괜히 나대는 놈 안 나오게 서로 물고 뜯어. 의견 통일 하지 마.”
토비우스는 숙고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협박하고 은퇴시킨 다음에 다시 부려 먹으려고 하시다니요.”
“내가 일하는데 어디서 멋대로 쉬려고 해.”
너 혼자 은퇴해서 유유자적하게 보내게 할쏘냐?
토비우스의 인품은 둘째 치고, 귀족들 사이에서 정치력은 뛰어나다.
내가 써먹기 편하게 쳐 낸 다음에 부려 먹어야지.
나는 급한 사안부터 꺼냈다.
“서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귀족들은 지금 전전긍긍하겠지. 아니면 사전에 4황후와 밀통하고 있거나.”
“예, 저도 이름들은 적당히 알아 뒀습니다만. 어쩌실 생각입니까?”
이미 명단 뽑아 놨네.
노회한 능구렁이답다.
“집과 가족이 걱정되면 다 돌아가라고 해. 아니다. 임시 귀족원 소집해. 내가 잠깐 출석해서 그렇게 말할 테니까.”
토비우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거 괜찮으시겠습니까?”
“황도에 남겨 둬 봐야 가족들이 인질로 잡히면 딴마음을 품을걸. 남은 놈들만 감시하면 되니까 내 입장에서도 편하고.”
“그래도 그들이 돌아가면 반란군의 세력만 늘려 주는…….”
“귀족이 거느린 사병과 기사들은 제국군의 편제와는 충돌해. 합류해 봐야 내부만 복잡해지지. 인간 귀족도 전쟁 수행해 본 적이 없고.”
제국은 100년 넘게 전쟁이 없었으니까.
반면 제국군의 베테랑, 칠죄신과 싸웠던 이종족 장군들은 전쟁에 이골 났고.
서부군이 귀족의 병사들을 마구 흡수해 봐야 내부적인 잡음만 커진다.
“무엇보다 가족 걱정하는 가장은 그냥 퇴근시켜 줘야지.”
“……으으으음, 정말 대단하시군요. 정치에만 밝은 게 아니라 군사, 사람들의 심리까지 훤히 꿰뚫고 계십니다.”
토비우스는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흘끗흘끗 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종종 이렇게 한담이라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 하는 일에 간섭하려면 안 받는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황제가 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
나를 보는 토비우스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린다.
반성문을 쓰면서 오랜 욕심과 망집을 털어 낸 노인이 새로운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부디 제가 일말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좋을 것 같군요.”
“그러면 내가 하라는 대로 귀족원 정리해. 그거 보고 결정하마.”
“당장 오늘 저택에 모인 이들부터 잘 설득해 보이겠습니다.”
토비우스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진심이 묻어나는 몸짓이다.
나는 이야기를 돌렸다.
“귀족원과 마령화비 사이는 어떻지?”
“황후 전하가 우리에게 먼저 접촉했습니다. 가끔 정보 제공과 영향력 행사를 원하시더군요.”
“마령화비는 니들에게 뭘 해 주고?”
“만약의 경우에 지원해 주겠다, 한마디였습니다. 실제로 지원받은 건 없습니다만……. 별 불만들은 없었습니다. 서로 목적이 같았으니까요.”
“그게 뭔데?”
“12가문의 성장을 가능한 한 막는 겁니다.”
토비우스가 밝혔다.
“귀족원의 대다수는 12가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니까요.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원탁회의에서도…….”
“이번 원탁회의도 파토 낼 거라고 예상했다? 잠깐, 이 100년 동안 후보가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게 귀족원의 공작도 있냐?”
“매번 그러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마령화비의 의뢰였다고?”
토비우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극적으로 의뢰하시지는 않았지만 서로 원하는 바가 합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원탁회의에는 가만히 계셨던 게 좀 이상합니다. 또…….”
“또?”
“최근 마령화비가 외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환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병을 핑계로 모략을 꾸미는 상투적인 수단인가?”
토비우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로서는 마령화비가 당신과 4황후 사이를 저울질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귀추를 지켜보다가 유리한 쪽에 붙으려는 게 아닌지…….”
“…….”
토비우스는 정치적으로 말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니다.
고민할 거 없다.
“직접 보면 확실해지겠지.”
“예? 제가 보낸 사자도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만. 말은 정중했지만 문전 박대를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가서 얼굴 본다고.”
남편이 왔는데 문 안 열어 주면?
뜯어내고 들어가야지.